잠자는 살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와 공포 - 2
- [잠자는 살인]/[복수의 여신]/[카리브해의 비밀], 애거서 크리스티, 1964~1976.


"흠, 회상 속의 살인'이라.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예,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저라면 '잠자는 살인'을 그대로 묻어 두겠습니다. 살인을 들쑤시는 건 위험합니다.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 [잠자는 살인], <회상 속의 살인>, '헤이독 박사의 조언',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다시,
나의 장편 추리소설의 원천,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 1890~1976)로 돌아왔다.

올해 3월부터 시작한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여정을 좀더 연장해보기 위해 '여성' 추리소설 작가를 테마로 잡았을 때, 
새삼 '애거서 크리스티'가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에 애거서 크리스티를 통해 첫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만 해도, 
애거서 크리스티는 내게 '여성' 추리소설 작가는 아니었다. 
​
그러던 중 최근 새삼스레 '여성' 작가 크리스티를 읽고 싶어졌던 거다.


"언제나 지켜 온 내 신조는, '우선 가장 간단하고 상식적인 설명을 찾는다'라는 거랍니다."
- [잠자는 살인], <헬렌?>,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상식적인 해석이 정답인 경우가 대부분이랍니다."
- [잠자는 살인], <회상 속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탐정은 벨기에 출신 프로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와 영국의 가상 시골 세인트 메리 미드에 사는 아마추어 탐정 미스(Ms.) 마플 할머니인데, '여성'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면모를 읽어보려면 수다스러운 미혼의 할머니 '마플 양(미스 마플)'이 활약하는 이야기를 보는 게 좋겠다 싶어 다시금 찾아본 이야기가 1976년 애거서 크리스티의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이다.
​
미스 마플이 처음 등장한 작품은 [목사관 살인사건](1930)으로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뜨개질로 소일하던 마을의 할머니가 소문과 수다를 통해 정보를 캐고 추리하면서 해결하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1976)과의 단순 시차로 보면 첫 작품이 1930년대이고 마지막 활약이 1970년대이니, 첫 '할머니' 아마추어 탐정의 등장이 오십대로 쳐도 마지막에 거의 아흔살 가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이다 보니 창작 시점이 꼭 극 중 시점과 동일하다고는 볼 수는 없겠다. 
그러니 그냥 6~80대 정도의 폭넓은 할머니 연령대에 탐정으로서 활약한 것이라 보면 되겠다.
​
그렇게 나는 '미스 마플'을 [목사관 살인사건]부터 [서재의 시체](1942), [움직이는 손가락](1943), [예고살인](1950), [마술살인](1952), [주머니 속의 죽음](1953), [패딩턴 발 4시 50분](1957) 등의 기라성 같은 작품들을 통해 만났었다.
​
미스 마플은 '할머니'이다 보니 기동성 없이 머리로만 추리하는 '안락의자 탐정'으로 보이겠지민, 나름대로 사고 현장이나 관련자를 찾아다니며 필요하면 거짓말 연기도 서슴치 않는 활동을 전개한다. 물론 전반적인 상황은 대부분 동네 여인들의 규수방 수다와 같이 조용하고 은밀하개 전개된다.
​
'여성'스럽게 수다스럽지만 매우 고요한 상황 모순 또한 내가 보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특징이다.
​
복잡하게 얽힌 듯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방식은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에서 주인공 미스 마플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데, 
복잡할수록 '간단'하고 '상식'적인 설명이 핵심이다.

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선배 격 되시는 영국 단편 추리소설 작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1874~1936)의 추리소설 이론에서도 중요하게 주장되는 내용이다. 
어찌보면, '복잡할수록 단순화시켜라'라는 조언은 비단 '살인사건'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에도 관철되는 덕목 되시겠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해야만 했어요. 그게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봐요. 18년이 흘렀는데 당신(그웬다)과 자일스가 찾아와 여러가지로 물으며 ('잠자는 살인'에 관한) 조사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로써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살인이 '잠자고'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은 거죠... '회상 속의 살인'을 흔들어 깨우려는 당신들의 행동은 정말 무서울 만큼 위험했어요. 그래서 저는 몹시 걱정했던 거예요."
- [잠자는 살인], <토키에서의 후일담>, '미스 마플의 총평', 애거서 크리스티, 1976.
​
​
[잠자는 살인]은 그웬다 핼리데이가 어린 시절 회상 속에 떠올려진 살인의 현장을 우연히 다시 찾아가게 되는 기이한 상황이 설정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국 남편 자일스 리드와 함께 그 우연한 상황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 18년 전 벌어진 새어머니 '헬렌'의 피살사건을 들추게 되고 이 '회상 속의 살인' 또는 '잠자는 살인'을 들쑤시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마플 양의 충고를 듣지 않고 조사를 계속하던 중 당시의 목격자였던 한 여인의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 내용이다. 마플 양은 또 다른 새로운 살인을 불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이 '잠자는 살인'을 묻어두라고 했지만 그들 리드 부부를 도와 종국에는 범인을 찾아낸다. 18년 전 살인사건은 아마도 소멸시효가 지났을 수도 있어 묻어둘 수 있겠지만 '잠자는 살인'이 새삼 깨어나면서 초래한 현재의 살인사건은 오래전 범인을 단죄할 계기가 되고 만다.
​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은 '회상'과 우연 속에서 유령과 환상처럼 떠오르는 상념들을 하나의 미스터리 이야기로 흥미롭게 엮어간다.
​
그녀의 마지막 작품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이다.


"'당신(미스 마플)이 '복수의 여신(Nemesis)'이란 말이오?'
래필 씨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그렇게 되길 바라요, 당신(래필 씨)의 도움을 빌려서.'
'대체 이런 한밤중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얘기 좀 해주시겠소?'
'급박하게 행동을 취해야 해요. 시간이 없으니까. 난 너무나 어리석었어요.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처음부터 일의 진상을 명백히 깨달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간단한 것을...'"
- [카리브해의 비밀], <제24장. 복수의 여신>, 애거서 크리스티, 1964.
​
​
사실, [잠자는 살인]이 그녀의 마지막 발표작이기는 하지만 극 중 시점은 '미스 마플 연작 3부작'에 앞서거나 그 중간에 일어난 이야기다. 미스 마플의 실질적인 '마지막' 활약은 1971년에 발표된 [복수의 여신(Nemesis)](1971)이기 때문이다.
​
애거서 크리스티는 1964년 [카리브해의 비밀(Caribbean Mystery)] 이야기에 이어 한참 후 연작 형식으로 [복수의 여신(Nemesis)](1971)을 썼다고 한다. 이후 [여인의 왕국(Woman's Realm)]까지 3부작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어가지 못했으므로, 실제로는 [복수의 여신]이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 그녀들의 마지막 작품이 된 것이다.
​
래필 씨에게 우연히 '복수의 여신'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엮이게 된 미스 마플이 그와 함께 카리브해 호텔의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할머니 미스 마플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던 래필 씨의 죽음과 유언을 통해 다시 연결되는 이 이야기에서는 전작에서 언급된 '복수의 여신'이 일종의 '암호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은 래필 씨 차례였다. 그는 그녀(미스 마플)의 손을 감싸쥐었다.
'Ave Caesar, nos morituri te salutamus(황제 폐하, 죽음을 목전에 둔 우리가 삼가 폐하께 경의를 표합니다-죽음을 앞둔 검투사들이 검술시합 전에 하는 말).'
'유감스럽지만 라틴어는 잘 모른답니다.' 마플 양이 말했다.
'하지만 이 말뜻은 알지 않소?'
'예.' 그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려는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을 알게 되어 무척 기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활주로를 가로질러 걸어가서 비행기에 올랐다."
- [카리브해의 비밀], <에필로그>, 애거서 크리스티, 1964.
​
​
카리브해의 어떤 섬으로 휴양간, 이제는 명탐정이 된 마플 양과 대부호 래필 씨는 이렇게 짧은 인연으로 살인사건을 공조하여 해결했고 서로에 대한 깊은 경의를 남긴 채 헤어졌다.
​
그리고는 래필 씨의 죽음과 마플 양의 인연은 '복수의 여신'이라는 코드명으로 다시금 이어진다.


"'그리고 마플 양과 라피엘(래필) 씨께서 그 사건을 해결하셨고요?'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어요. 라피엘 씨는 그 성격 덕에, 그리고 나는 한두 가지 명확한 증거를 발견한 덕에 코앞에 닥친 두 번째(세 번째?) 살인을 성공적으로 예방할 수 있었어요. 나 혼자서는 몸이 너무 허약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라피엘 씨 또한 다리가 불편하셔서 혼자서는 해낼 수 없으셨을 거고요. 우리는 한 팀이 되어서 행동했죠.'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마플 양, 혹시 '네메시스'란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네메시스.'
마플 양이 되뇌었다. 그건 질문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아주 서서히, 예기치 못하게 미소가 번졌다.
'예, 들어본 적이 있어요. 나도 그렇고 라피엘 씨도요. 내가 스스로를 '네메시스(복수의 여신)'라고 묘사한 말에 라피엘 씨가 아주 즐거워하셨죠.'"
- [복수의 여신], <암호명 '네메시스'>, 애거서 크리스티, 1971.
​
​
[카리브해의 비밀](1964)에서 마플 양과 함께 연쇄살인범을 잡은 대부호 금융업자 래필(라피엘) 씨가 유언을 남긴다.
​
애인을 잔인하게 살인했다는 혐의로 10여 년간 복역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의 누명을 풀어줄 '복수의 여신'으로 미스 마플을 지목한 것이다. 1년 내 그 살인사건의 진범을 밝히면 2만 달러의 유산을 남긴다는 조건과 함께. 
오래 전 서인도 제도 카리브해에서 미스 마플에게 우연히 명명된 별명인 '복수의 여신(네메시스)'을 암호명으로 해서 말이다.
​
[카리브해의 비밀](1964)에서 재력과 고집 말고는 별 활약이 없던 라피엘(래필) 씨가 후속작 [복수의 여신](1971)에서는 매우 치밀한 장치를 곳곳에 배치하고는 '복수의 여신' 미스 마플이 사악한 살인자를 잡아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재력을 통해 여러 조력자들을 곳곳에 심어놓고 마플 양이 '정의'의 길을 열어가도록 돕는다.


"'왜 이곳에 머물려 하십니까? 단순히 지치고 피곤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이유죠. 난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아요. 물론 내 나이 또래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변명거리지만요.'
'정말이지 제가 이곳에 남아 마플 양을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예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교수님께서는 다른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어떤 것들 말씀이십니까? 혹시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시거나, 뭐 아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는 마플 양을 바라보았다.
'뭔가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걸 입증해야 해요. 그리고 내가 직접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어요. 교수님께서는 연줄이 있으시니 그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 [복수의 여신], <작별인사를 나누다>, 애거서 크리스티, 1971.
​
​
처음에는 도무지 갈피를 못 잡던 마플 양은 할머니 특유의 수다스런 잠행과 능청맞은 연기를 통해 소설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오래전 사건의 갈피를 잡아낸다. 그리고는 정의로운 '복수의 여신'답게 과감한 모험을 감행하면서 진범을 잡아낸다. 결국 진짜 살인자는 미스 마플까지 제거하기 위해 본인이 탄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게 되고 누명을 쓴 라피엘(래필) 씨의 아들 마이클은 자유의 몸이 된다.

[복수의 여신](1971)은 [잠자는 살인](1976)보다 먼저 출간되었지만, 실제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진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여성' 탐정 미스 마플도, 자살로 막을 내린 '여성' 살인자 모두 어쩐지 '신비'에 싸인 느낌이다. 그녀들이 전개한 조용하지만 긴박한 상황의 수다와 심리전 또한 고요한 '공포'의 분위기를 한껏 남긴다.
​
'여성' 추리소설 작가 특유의 '신비'와 '공포'의 눈으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
[복수의 여신]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타고난 '사악함'의 존재를 암시한다. 미스 마플은 이 '사악함'을 끈질기게 탐지해 내고 결국 단죄하도록 길을 여는 말 그대로 '복수의 여신(Nemesis)'가 이 된다.
​
이제,
내 장편 추리소설의 원천인 애거서 크리스티와 미스 마플의 마지막 활약까지 읽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
내친 김에 오래 전 중학교 시절에 읽던 <해문출판사> 판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또 다른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의 '마지막' 활약을 읽어봐야겠다.

마을도서관 <동서미스터리북스>의 '여성' 추리소설가 탐색을 잠시 접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코끼리는 기억한다(Elephants Can Remember)](1972)를 먼저 펼쳐 든다.
​
***
​
1.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 Agatha Christie, 김윤정 옮김, <황금가지>, 2013.
2. [복수의 여신(Nemesis)](1971), Agatha Christie, 원은주 옮김, <황금가지>, 2013.
3. [카리브해의 비밀(Caribbean Mystery)](1964), Agatha Christie, 정성희 옮김, <해문출판사>, 1989~19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