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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 여자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56
까뜨리느 아를레이 지음, 이가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신비와 공포 - 1
- [어두운 거울 속에], 헬런 매클로이 / [지푸라기 여자] 외, 까뜨린느 아를레이, 1949~1960.
'미스터리' 소설을 더 빌려보기 위해 이번에 떠오른 키워드는 '여성' 작가였다.
물론, 중학교 시절 내게 '장편'을 읽을 수 있는 힘을 준 게 애거서 크리스티(1890~1976)였다지만,
내게 그녀는 그냥 '추리소설' 작가였다.
그녀 작품의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와 함께 유명한 등장인물인 미스(Miss) 제인 마플(마플 양)이 사건을 해결하는 소설 속에서도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여성' 작가로서 따로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동서미스터리북스> 책장 앞을 여전히 서성이던 중 내가 아직 '여성' 추리소설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던 거다.
"당신에게 말해 두겠는데요, 기젤라 폰 호헤넴즈 선생님, 만일 당신이 그 정신과 의사 친구(베이질 윌링)에게 포스티나 클레일 선생에 대한 말을 써보냈다면 틀림없이 후회할 거예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2장>, 헬런 매클로이, 1949.
나는 미스터리 또는 추리소설 자체의 신비롭고 비밀스러우며 고요한 상황설정을 좋아한다.
사건의 전개와 그 실마리를 푸는 과정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겠지만, 그 사건의 발생과 상황은 꼭 고요한 신비주의적 설정으로 독자를 이끌어야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어본 미국 여성 '미스터리' 작가 헬런 매클로이(Helen McCloy:1904~1994)의 대표작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1949)의 분위기 또한 상당히 그러하다.
"라이트훗 교장이 도전적으로 베이질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당신이 짐작하시지도 못했던 일이지요?'
'정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알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일이.'
베이질은 사려깊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괴테지요. 괴테의 회상록 제1권. 금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회색 슈트. 에밀리 사제(트)와 토드 래플레이크 이야기. 독일어로는 '도플갱어(살아있는 영혼)', 그리스어로는 '에이돌론', 고대 이집트어의 '카', 영국 민화에 나오는 '페치'. 그러니까 당신이 방에 들어왔을 때, 또는 거리나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 당신 앞쪽에 버젓이 오체를 갖춘 제3차원의 색채가 명확한 사람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움직이기도 하고, 광학의 법칙에 따라 명암과 그림자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6장>, 헬런 매클로이, 1949.
신비주의와 마술적 요소의 미스터리 소설 대가라고 하면 존 딕슨 카(John Dickson Carr : 1906~1977)가 유명하기는 하나, 최근 나는 그의 작품들에서 흥미롭고 재미지기는 해도 다소 억지스런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주 조금 실망하기도 했더랬다.
헬런 매클로이 또한 그런 신비주의적 요소 중 하나인 '도플갱어'를 주제로 하여 하나의 '미스터리' 소설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독후감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그 진행과정이 내게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어느 기숙여학교에서 벌어진 '도플갱어' 사건은 그 자체로도 미스터리다.
18세기 이십대 초반부터 괴테가 우연히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여러 번 봤다고 썼다는 그의 '회상록',
19세기 본인과 똑같은 분신이 자주, 그리고 동시에 등장하면서 학교를 열여덟 번이나 옮겨 다니다가 자취를 감췄다던 프랑스어 교사 에밀리 사제(트) 이야기(1845년, 리보니아의 에밀리 사제 전설, [어두운 거울 속에], <제11장>).
그 이후 독일어로 '동시에 걷는 사람'을 뜻한다는 '도플갱어'는 고대 그리스의 '에이돌론'(Idol의어원)이나 이집트의 '카'처럼 육신과 별도로 동시에 공존하는 '생령' 또는 '영혼'의 의미와 같다는데, 우연히 나타난 '도플갱어'를 만나게 될 경우 불행한 사고를 당하거나 죽게 된다는 불길한 징조로 알려져 왔다.
물론, 괴테는 본인을 꼭 닮은 도플갱어'와 몇 번 마주쳤음에도 불행하게 죽지는 않았다지만.
헬런 매클로이의 대표작 [어두운 거울 속에](1949)의 줄거리를 보면, 이와 같은 '도플갱어' 현상으로 기숙여학교에서 두 번째 쫓겨나는 미술교사 포스티나 클레일 선생이 자신과는 악연과 같은 관계로 엮인 동료 여교사 앨리스 에이티슨의 살인사건에 먼 거리를 두고 나타난 '도플갱어' 현상으로 인해 이상하게 연루되고, 종국에는 모종의 계략에 의해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 비치도록 설계된 자신의 '도플갱어' 생령 현상의 환상을 보고는 심장마비로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는 내용이다.
기숙여학교 동료교사인 독일어 선생 기젤라 폰 호헤넴즈의 연인인 정신과 의사 베이질 윌링은 기젤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고 일련의 '도플갱어' 사건을 파헤치던 중, 상속으로 얽힌 '도플갱어' 조작 사건을 들춰내지만 용의자는 마지막까지 혐의를 부인한다.
즉, 정신과 의사 탐정 베이질 윌링은 독자에게 사건의 전모를 '범인'에게 설명하면서 풀어내는 한편, '범인'은 그러한 상황증거로만은 본인을 법정에서 기소당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 항변한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도록 미스터리 가득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미국인 베이질 윌링)은 그런(초자연적 도플갱어 생령) 현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래도 승복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나(기젤라 폰 호헤넴즈)는 유럽에서 자랐기 때문에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우리의 고대문명은 모든 신앙에 회의적이에요. 미국사람이 거의 종교에 가깝도록 숭배하는 현대과학에 대해서까지도. 우리의 문명은 수많은 지적인 혁명을 거쳐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어떤 세대의 '과학'이 다음 세대에는 '신화'가 되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몇 번이나 보아왔어요. 전기의 역사는 이제 겨우 2백 년 밖에 안 돼요. 겨우 10년 전만 해도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원자의 핵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지요. 오래된 격언 가운데 가장 슬픈 구절이 있잖아요? '이것도 또한 지나가리(Hoc quoque transibit).'
과거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바로 가까이에 있어요. 책 속에뿐만 아니라 풍습이며 가정에도, 낡은 성이나 성채는 역사책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대부분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곳에 있어요..."
- [어두운 거울 속에], <제12장>, 헬런 매클로이, 1949.
결국, '도플갱어'와 같은 '초자연적' 생령 현상은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소설의 결말일 수는 있겠지만, 유럽의 오랜 지적 전통에 따르면 과학과 합리주의로 점철된 이 모든 문명은 어쩌면 인간 지성으로는 알 수 없는 회의주의로 회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도플갱어'가 범인의 계략이라는 주인공인 미국인 베이질 윌링 박사의 '합리주의'와, 이에 반해 그 일련의 살인사건이 실제 '생령 현상' 때문일 수 있다는 용의자 레이먼드 배이닝의 '초자연주의'가 마치 이야기 속 '도플갱어'처럼 미스터리하게 공존한다.
[어두운 거울 속에](1949)는 여성 작가 헬런 매클로이의 묘사와 설정이 끝까지 신비롭게 전개되는 소설이다.
한편, 매클로이의 소설을 마을 도서관에 반납하고는 그냥 돌아서지 못하고 계획에도 없게 다시 대출한 책도 또 다른 '여성' 작가의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바로 프랑스 작가 까뜨린느 아를레이(Catherine Arley : 1935~?)의 [지푸라기 여자](1957)와 [눈에는 눈](1960)이다.
'꼭두각시'라는 의미인 [지푸라기 여자(The Woman of Straw / La Femme de Paille)]는 거대 부호와 결혼하여 인생역전을 꿈꾸는, 제2차 대전 전후 독일의 폐허 함부르크의 가난한 미혼여성 히르데갈데 마에나의 이야기인데, 종국에는 비극의 원인이 거부인 칼 리치몬드의 충실한 비서 안톤 콜프의 계략으로 밝혀지는 이야기다.
소설 전반부 내내 '팜므 파탈' 연기를 훌륭하게 수행하며 목적을 달성한 듯한 여주인공이 결국 안톤 콜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반전을 남긴다.
이 '지푸라기 여자' 히르데갈데는 악인에게 복수하는 또 한번의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하고는,
종국에 상속을 위해 부자 남편을 독살한 누명을 쓰게 되고 그 누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체념한 채 스스로 목를 맨다.
소설 초반에 비서 안톤 콜프와 짜고 늙은 부자를 꼬셔내는 다분히 연극적 상황부터 결혼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 대한 소설 전반부의 묘사가 상당히 섬세하고 흥미진진하다.
마치 연속극처럼 다음 상황이 궁금하여 펼친 책을 덮지 못하게 한다.
베일에 싸여 신상을 별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프랑스 '여성' 소설가 까뜨린느 아를레이의 소설은 '추리' 또는 '미스터리' 보다는 일종의 '서스펜스'에 가깝기도 하고, 여주인공의 세속적 욕망을 소재로 한 섬세한 심리 묘사가 압권인데 얼핏 읽다보면 현대극 막장 드라마의 본류 같다는 느낌도 든다.
1960년에 까뜨린느 아를레이가 발표한 또 다른 소설 [눈에는 눈(Le Talion)]은 모세 율법에서 '탈리오'라 불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을'이라는 원시적 법률 정신이 모티브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 아가트는 [지푸라기 여자]의 히르데갈데 마에나와는 비할 수도 없이 '악녀'다. 아니, 정확하게는 '악마'라기 보다는 타고난 이기적 탐욕주의자인 여자의 본성이 '악인'에 가깝다는 소설적 메시지가 깔려 있다.
이런 경우 생래적 '악인'인 본인은 자신이 악당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타인이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면서 애써 외면한다.
이 지점이 바로,
원시적인 고대 율법 '눈에는 눈'(Le Talion)이 작동되어야 하는 곳이다.
부자 사업가 남편 쟝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된 아가트가 살인 계획을 짜서 남편을 죽게 만들고 다른 부자 남자한테 환승결혼하는 과정은 하나의 '완전범죄'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눈에는 눈'의 율법 관념에 따라 주변 사람 모두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죽어나가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는 본격 막장 드라마의 감흥을 남긴다.
까뜨린느 아를레이 두 소설은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풍부한 묘사를 곁들인 막장극의 내용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랜시스 아일즈와 프리먼 크로프츠, 리처드 헐로 대표되는 '도서(倒敍;inverted)' 추리소설의 형식을 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범인이 애초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완전범죄'를 실현하고 이에 자만에 빠지지만, 결국 스스로의 헛점을 모르다가 그로 인해 파멸한다는 '사필귀정'의 비극적 서사다.
물론 비극의 주인공 또한 '여성'이다.
'여성' 소설가 핼런 매클로이와 까뜨린느 아를레이의 미스터리 서스펜스 소설들에서는 여타 추리소설에서보다 좀더 신비주의와 공포의 색채가 짙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내 추리소설 여정의 원류와도 같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여사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여성'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작품이자, 여주인공'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부터 시작한다.
'여성' 추리소설 작가가 그려내는 소설 속 '신비'와 '공포'를 새삼 상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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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두운 거울 속에(Through a Glass, Darkly)](1949), Helen McCloy, 강성희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2. [지푸라기 여자(La Femme de Paille)](1957) / [눈에는 눈(Le Talion)](1960), Catherine Arley, 이가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잠자는 살인(Sleeping Murder)](1976), Agatha Christie, 김윤정 옮김, <황금가지>,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