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그린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6
S.S. 반 다인 지음, 안동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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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이지 않아도, 머무르고 싶은.
- [그린살인사건]/[비숍살인사건], S.S.반 다인, 1928~1929.


엘러리 퀸의 원형적 모델인 S.S.반 다인의 화제작들을 마저 읽어보고자 마을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 [비숍살인사건](1929)이었다. 

반 다인의 세번째 작품이자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그린살인사건](1928)을 단연 먼저 읽어야 했으나 마을도서관에 없어서 대출을 받을 수 없었고, 알라딘 서점에서도 품절이었기에 중고서적으로 주문했으니, [그린살인사건]에 이은 그 다음 작품이었으나 반 다인 두번째로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라는 [비숍살인사건]을 [벤슨살인사건], [카나리아살인사건], [딱정벌레살인사건]에 이어서 펼쳤다. 

추리소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와 코넌 도일, 엘러리 퀸 등의 '미스터리소설'류는 빨리 읽고 싶어서 책을 펼친 후에 막상 그 책을 다 읽기 아까워서 다시 덮고는 책등만 어루만질 때가 자주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비록 어수선하고 긴박할지 몰라도 관객이자 독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현실과 동떨어져 고요하고 신비로운 인물들과 왠지 이불 속에서 읽을 법하게 고즈넉한 그 설정들 속에 더 남아 있고 싶어서다. 얼른 살인사건의 범인을 확인하고 싶은 한편, 그 추적과정의 밑그림들을 더 보고 싶어 다 읽어버리기를 머뭇거리는 모순된 관객이자 독자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가끔 읽는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그렇지 않고, 유독 엘러리 퀸과 최근 읽게 된 미국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원조 반 다인의 작품들이 그렇다.

"실제로 (지방검사) 매컴이 4년 재직하는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범죄를 대부분 해결한 것은, 거의 모두 번스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인간 본질에 대한 지식', '뛰어난 박식과 교양', '예민한 논리 감각',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표정 뒤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후각과 같은, 이러한 자질은 모두 번스를 범죄 수사, 매컴의 소관인 여러 사건을 번스가 비공식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알맞은 것들이었다."
- [비숍살인사건],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 반 다인, 1929.


엘러리 퀸도 그렇지만, 반 다인 소설의 주인공 탐정 파일로 번스 또한 미국 하버드대를 다닌 수재다. 아니, 머리 좋고 싸움도 잘하고 하다 못해 운전실력까지도 뛰어난, 세상 못하는 것 없는 천재다. 영국 옥스포드대에서도 공부한 적 있고, 하는 일 없는 귀족 청년 같지만 '본업'을 굳이 따진다면, 미술 또는 예술 비평가로 추정된다. 작가인 '반 다인', 본명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가 바로 그렇다. 그의 추리소설 속 화자가 '반 다인'이기는 하나, 실제로 작가의 모습은 아마추어 탐정이자 미술 비평가인 귀족청년 파일로 번스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번스는 뉴욕시 지방검사 매컴, 화자인 반 다인과 하버드대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뉴욕 지방검사 매컴 재임 4년 동안의 굵직한 살인사건(Murder Case)들에 개입하려 번스 특유의 '연역소거법'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화자인 '반 다인'은 '파일로 번스'라는 가명의 탐정이 해결한 사건의 기록들을 [OO살인사건(Murder Case)]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사변적이고 지적인 탐정 파일로 번스는 '법률적'이고 '귀납적'인 과학적 수사과정을 경시한다. 오로지 용의자들을 먼저 설정하고 그에 얽힌 사실들을 큰 그림과 같은 거대한 논리구조로 구성한 후 일관성에 맞지 않은 사실과 논리를 소거해 나가면서 유력 용의자들을 배제시키고는 궁극에 완벽한 논리구조로 남겨진 최후의 용의자를 범인으로 가려내는 '연역소거법'으로 살인사건의 원인을 추적한다.

물론,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사건에 모두 '밀실'이나 '지인' 등 장소나 용의자가 한정된 상황만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고, 작가 반 다인과 주인공 번스 스스로도 인정하듯, 그런 '연역소거' 추리만으로는 죄인을 법정에 세워 배심원과 판사를 설득할만큼 '법적 증거'와 같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러리 퀸과 파일로 번스의 '연역소거법'에서 오로지 확실한 '법적 증거'는 문명적이지 못하게도 범인의 '자백' 뿐이게 된다.

그리하여, 반 다인의 첫 작품 [벤슨살인사건](1926)과 세번째 작품 [그린살인사건](1928)은 범인의 최종 자백이 가능한 상황까지 몰고 가서 매컴 검사와 히스 형사가 수사종결 및 기소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었지만, [카나리아살인사건](1927), [비숍살인사건](1929), [딱정벌레살인사건](1930)의 범인들의 최후는 '자살'이 되고 만다.

이 중 [비숍살인사건]과 [딱정벌레살인사건]은 '법률적 정의'를 믿지 않는 주인공 파일로 번스의 직간접적 개입 하에 범인에게 '자살'이라는 극단적 최후를 선사한다.

이러한 결말 또한 이후 엘러리 퀸의 또 다른 필명 바너비 로스가 발표한 [Y의 비극](1932)에서 반복된다.

"지나치게 간단해, 매컴. 지나치게 간단하단 말일세. 아무래도 겉으로만 그럴 듯한 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과연 이론이긴 해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단 말이네. 나로서는 '비숍'이 그 끝없는 장난을 이렇게 '평범한 형태(자살)'로 끝을 맺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네. 뇌를 쏘아 버리다니. 그런 재치 없는 짓을 할 리가 없네. 진부하기 짝이 없어. 전혀 독창성이 없으며, '마더 구스 살인'을 고안한 사람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짓일세."
- [비숍살인사건], <카드로 지은 집>, 반 다인, 1929.


반 다인의 네번째 작품인 [비숍살인사건](1929)은 '마더구스' 동요에서 착안한 모티브로 물리학자와 수학자들, 체스 전문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
'나예요' 하고 참새가 말했다.
'내 활과 화살로
코크 로빈을 죽였어요.'
...
상주(喪主)는 누가 되나,
'나예요' 하고 비둘기가 말했다.
'잃어버린 사랑을 파묻겠어요,
상주는 내가 되지요.'
...
죽는 것을 본 건 누구인가,
'나예요' 하고 파리가 말했다.
'작은 내 눈으로
죽는 걸 보았어요.'"
- [비숍살인사건], <누가 코크 로빈을 죽였는가>~<활터에서>, 반 다인, 1929.

물리학자인 딜러드 교수의 집 활터에서 '로빈'이라는 사람을 '스팔로(참새)'라는 이름의 사람이 죽였다고 '자백'을 하는 사건이 첫번째 살인사건이다.
그리고는 '비숍(Bishp)'이라는 서명으로 '마더구스' 동요가 배달된다,

"조그만 남자가 있었습니다.
조그만 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총알은 납, 납으로 만든 총알로
'조니 스프리그'를 쏘았습니다.
가발 한복판을 쏘았습니다.
가발은 날아갔죠, 날아가는 머리에서."
- [비숍살인사건], <제2막>, 반 다인, 1929.

살인자가 '자백'을 했음에도, '비숍'의 동요가 유포되고, '존 스프리그'라는 수학전공 대학생이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우울한 꼽추는 담 위에 앉아 있었다네.
우울한 꼽추는 높은 담 위에서 떨어졌네.
임금님의 말도 신하들도 모두 야단법석
우울한 꼽추는 그래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네."
- [비숍살인사건], <제3막>, 반 다인, 1929.

딜러드 교수의 이웃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하던 꼽추 드래커 또한 의문 속에서 '마더구스' 동요처럼 죽게 되는데, 드래커는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다.

[그린살인사건](1928)과 [비숍살인사건](1929)은 모두 연쇄살인사건인데, 범인의 치밀한 계획에 천재탐정 번스조차도 내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작들인 [벤슨살인사건](1926)과 [카나리아살인사건](1927)에서 번스는 최초 살인사건 현장에서 이미 범인을 속으로 지목해 놓고는 그에 맞는 사실관계를 논리적으로 구축한 후 나중에 다 밝히면서 엄청 잘난 척을 해대는 밉상을 보이고 있는데, 심지어 1930년에 발표한 다섯번째 작품인 [딱정벌레살인사건]에서조차 이미 점지한 범인을 속이기 위한 반전극을 스스로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1928~29년에 발표한 그린 가문과 비숍의 '마더구스' 연쇄살인사건에서는 번스 조차도 마지막 대반전에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모든 사건의 해결자는 결국 파일로 번스이며, 반전극의 종결자도 번스 자신이지만 말이다.

[비숍살인사건]에서는 범죄자에 대한 최고의 응징으로써 '자살'을 옹호하는 번스 조차도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면서도 용의자의 자살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인다. 결국 그 자살은 자살을 가장한 타살로 증명되지만 아직 당시의 번스는 범인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모든 걸 다 아는 그 잘난 번스답지 않게 엄청 헤매고 있는데, 역시 흥행을 위해서 주인공의 고난과 갈등은 반드시 필요한가 보다.


"마지막 암흑의 시간에 인간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
"그 점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겁니다. 그 어린아이(마패트)의 증언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나의 술책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고요. 아마 당신(아넷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생각에 대해 갑자기 반발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 [비숍살인사건], <막이 내리다>, 반 다인, 1929.


그럼에도 결국 번스는 '주교'와는 상관없는 연쇄살인마 '비숍'의 정체를 파악해내고, 살인마 비숍을 역으로 속이면서 그가 '자살'로 악행을 마감하도록 조치하고 만다.


"한심한 상류 가정이로군...
... 깊은 유서를 자랑하는 옛 가문도 안일과 나태를 탐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니 한 발 한 발 조락의 길을 더듬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인과응보의 불가사의여! 서(西)에 위텔스바하(비텔스바흐) 집안이 있고 동(東)에 로마노프 집안이 있으며, 저 로마의 줄리앙 클로디안 집안 또한 그렇잖나. 사라센의 압시드 왕조 역시 그렇지. 이 모두가 종족 붕괴의 표본이야... 사치와 궤도가 없는 방종이야말로 부패의 요인일세. 저 무장을 황제로 추대한 로마는 어떠했는가. 권세가 하늘에 닿은 앗시리아의 '사르다나파로스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이것은 모두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 [그린살인사건], <번스, 사건을 분석하다>, 반 다인, 1928.


반 다인 최고의 베스트셀러 [그린살인사건](1928)은 뉴욕의 명문가 '그린' 집안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는 또 하나의 연쇄살인사건이자 일종의 대저택 '밀실살인' 사건의 형태로 전개된다.

첫 장면은 흡사 미스터리소설의 원조인 애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1839)와도 같다. 오래된 근대적 명문가가 현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치와 부패, 방종으로 무너지는 상황 자체가 소설의 기괴한 배경이 된다.  

파일로 번스의 세번째 '살인사건(Murder Case)이 되는 그린 집안의 연쇄살인사건에서 번스는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만큼 사건의 전개가 기괴하고 피해자의 규모도 크며 범인의 계획 또한 매우 치밀하고 용의주도하여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연역소거 추리법에 맞는 사건 또한 현실적일 수 없다는 필연의 결론 아니겠는가.


"나는 마침내 그 문서의 각 항목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고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확고하게 지목할 수 있게 되었네. 일단 기초 도안이 세워진 뒤에는 각 세부가 전체 조형에 완전히 들어맞아 왔다네. 그런데도 범죄의 기법만은 여전히 애매모호하였지... 우리에게 그녀의 모략을 쳐부술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해서 굳이 우리들의 우매성을 탓하지는 못할 걸세. 왜냐하면 우리를 기만하고 있었던 것, 그것은 그녀 하나가 아니었던 걸세. 그녀 이전의 모든 범죄자 계보, 몇 백을 헤아리는 간교한 범죄자가 한 경험의 축적에다 세계 최대의 범죄학자인 한스 그롯스 박사의 분석 과학의 성과가 덧붙여졌으니 말일세."
- [그린살인사건], <놀라운 진상>, 반 다인, 1929.


결국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또한 현실의 '법적 증거'가 아닌, 그린 저택의 밀폐된 서재에 있던 범죄학자의 고전서적에서 발견한 정황이다. 장서가 앨러리 퀸도 그렇지만 그의 원조 파일로 번스 탐정 또한 서지학과 문헌학의 대가답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천재답게 수천 쪽의 책, 그것도 독일어로 된 책들을 뒤져서 근거를 기어이 찾아낸다.

[그린살인사건](1928)을 통해 번스는 자신의 '연역소거법'의 아웃라인을 밝히는데, 역시 미술 비평가답고 또 그런 만큼 지극히 추상적이며 현학적이다. 


"매컴, 우리가 그린 집안 사건의 온갖 상황을 더듬어 온 수사 방법이 바로 사진처럼 대상의 통일이 없고 서로 관련점이 없었다는 말일세. 우리들은 하나하나의 사실을 그것이 떠올라 온 형태 그대로 음미했을 뿐, 이미 알려진 다른 사실과 관련시켜 분석해 보는 방법을 게을리했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이 사건 전체가 하나하나의 독립된 정수의 배열 또는 배합된 것처럼 다루는 착오를 범하고 말았네. 따라서 각 정수 자체의 의미는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어.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건 하나하나가 부분이 되어 이루고 있는 전체에 대해서 기초 도안(회화의 통일성/디자인)을 밝혀내는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네. 여기까지는 알아듣겠나?"
- [그린살인사건], <빠뜨린 사실>, 반 다인, 1928.


즉,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사진'과 달리 '회화'가 논리적이든 상황적인 주제와 연결되는 '디자인(통일성)'으로 예술적 가치가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의 '연쇄살인사건' 또한 백가지 사실들을 일관된 통일성으로 '다자인'해서 배치해 보아야 진실을 추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술사가 '열전'을 지은 조르조 바사리가 말한 미술가의 '디세뇨(디자인/design)'가 범죄학에 본격 적용되는 현장이다.

과연,
'범죄 미학론'의 결정체다.

S.S.반 다인의 12편 중 국내 번역된 다섯 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내가 중고로나마 구입한 [그린살인사건]을 우리 마을도서관에 기증함으로써, 마을 도서관이 반 다인의 고전적인 다섯 작픔을 모두 소장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그래도,
아쉽다.

비현실적인 사건전개는 그렇다 치고,
천재탐정 파일로 번스가 활약하는 이 미스터리 추리상황극을 더 읽어보고 싶은데,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도,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관객으로 그냥 계속 머무르고 싶은데,

아쉽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제대로된 현대 미국 뉴욕의 영어를 구사했다는 반 다인의 다른 작품을 영어로 읽어봐야 하나...

***

1. [그린살인사건(The Green Murder Case)](1928), S.S.Van Dine, 안동민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7.
2. [비숍살인사건(The Bishop Murder Case)](1929), S.S.Van Dine, 김성종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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