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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3 : 창시자 ㅣ 이중톈 중국사 3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3월
평점 :
'시간이 시작(時間開始)'되던 때
- [창시자], 이중톈, 2013.
"주(周)나라는 중국문명의 '창시자(奠基者;전기자)'였다.
... '상(商)나라의 예(禮)는 의식이고 주나라의 예는 제도'였던 것이나, '(권력의) 신수(神授)는 종교적인 것이고 천수(天授)는 윤리적인 것' 등은 이미 구구히 따질 필요조차 없었다. 어쨌든 중국문명의 초석은 놓였고 '시간도 시작(時間開始)'되었다."
- [창시자], <저자 후기 ; 시간이 시작되다>, 이중톈, 2013.
중국 역사학자 이중톈의 글쓰기 작풍이 좋아 그의 중국 통사 시리즈를 두서 없이 주문해서 순서 없이 내키는 대로 읽었지만, 사실 그의 중국사 시리즈 3권인 [창시자](2013)는 일단 사두기는 했으되 당장 읽을 마음은 없었다.
2022년 역시 중국의 역사학자 리숴(李碩)가 발표한 [상나라 정벌(翦商/전상)]을 읽고는 은(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개국 과정의 전모를 다 알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던 거다.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제'로 대표되는 은상의 야만적 문명을 혁파한 '인본주의'적 주나라의 문명 혁신의 배경에는 오래 전 은(상)나라의 제사에 쓸 인간제물을 공급하기 위해 주변의 강족 등 이민족을 사냥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던 주족의 어두웠던 실체가 있었고, 혁명으로 주나라를 세운 후 주공과 그 무리들이 '변화의 경전'인 [주역]을 기반으로 한 '세상 만물은 변한다'는 논리와 '인신공양제' 대신 인간 우선의 '인본주의' 사상을 내건 이유는 실은 주족의 이런 흑역사를 은폐하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을 리숴의 [상나라 정벌]을 통해 읽었기 때문이었다.
주나라 건국 5백년 후 그의 후예를 자처하던 공자가 주나라의 문명과 제도의 초석을 다졌던 주공 단을 동경하고 [주역]을 열심히 해석했던 이유가 그 합리화 의도였다는 것이 [전상]의 저자 리숴의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제 드디어 예전에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둔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3권 [창시자](2013)를 읽지 않을 수가 없겠다고 생각한 건, 이중톈의 [선진제자백가쟁명](2006)을 읽고 난 후였다. 이중톈이 말한 '인문학'의 시작이 공자의 '인의(仁義)'에 기반한 '덕치(德治)'인데, 그 유래가 바로 주공 단의 '인본주의'적 '제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비교해 본다면, 주나라의 '인본주의'는 고대 그리스 문명이었고, 공자의 '인문학'은 서양의 기원후 14세기 '르네상스'가 이미 기원전 6세기에 동양에서 먼저 주장된 것이었다.
이중톈은 그의 중국 통사 시리즈 3권인 [창시자]의 <저자 후기>에서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 혁명 후 <인민일보> 기사 중 "시간이 시작되었다(時間開始)"는 표현을 빌려 기원전 11세기의 주나라 건국 혁명과 주공 단의 문화제도 혁신을 규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기존 2천 년 이상의 중국 문명을 혁파하고 새로운 '현대의 시간'을 연 것처럼, 주나라와 주공 단이 중국 문화의 초석을 다진 사건은 은상을 비롯한 이전 문명을 거의 '선사시대'급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고대의 시간'을 개시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칼 마르크스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는 인류 문화사에서 '정상적인 아이'였고 주나라는 '조숙한 아이'였다고 이중톈은 말하는데, 둘 다 아이의 단계였으되 제도적 문화의 초석을 다졌던 주나라 문명은 '조숙'했단다.
"신수는 종교적이고 천수는 윤리적이다.
사실 주나라의 '하늘'은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자연과 세속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었다. 또한 이집트의 호루스나 상나라의 제곡 같은 인격신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계'이면서 '위대한 인간', '인간의 부모'이기도 했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사람 혹은 전인류의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인류사회에 대해 '인문적 관심'을 표현하곤 했다."
- [창시자], <2-1>, 이중톈, 2013.
세상 모든 혁명이나 쿠데타를 비롯한 정권교체는 '정당성'을 앞세운 정권 합리화 작업으로 시작한다.
오래전 은나라를 무너뜨린 주나라 또한 '천명'을 내세웠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 '하늘'에는 '인본주의' 사상이 동반되었다.
하-은-주나라로 이어지던 고대 중국의 왕조교체 역사에서, 하나라는 토템 또는 신을 조상으로 만들었고 은나라는 조상을 신격화했던 반면 은상 문명의 '인신공양제'를 혁파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자 했던 주나라는 '하늘'을 말하기는 했지만 그 하늘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단다.
[주역]의 원리대로 언젠가 자신들을 버릴지도 모르는 '천명'을 기독교의 '하느님' 같은 신으로 보기 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의지 또는 '민심' 같은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중톈의 설명이다.
중국 문명의 '창시자'였던 주나라인들은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은나라 권력에 의해 인질로 잡혀 '인신공양제'에 쓸 인간 제물들을 사냥하고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본인들까지 제물로 바치는 신세였지만, 주족은 약탈민족이 아닌 농경민족으로서 '생산'적 문명을 '제도'로 만들 줄 알던 족속들이었다.
은나라 시기 갑골문과 금문에 나타난 주나라 '주(周)'는 애초 '밭 전(田)'이었다고 한다. 이는 주족이 농경민족이었다는 문자적 증거다.
'독체위문(獨體爲文), 합체위자(合體爲字)'라는 말로 '문자(文字)'로서의 한자의 기원을 정리했던 허신의 [설문해자]는 갑골문과 금문 등 초기 한자들의 상형 또는 조합 과정들을 추적하며 각종 문명의 기원들을 추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아무튼, 그렇게 주나라의 기초를 다진 주공 단과 그 조력자들은 신생 정권 초기의 걱정과 우환을 떨치기 위해 '인본주의' 사상을 토대로 한 '덕치'를 핵심으로 삼았고, 그 실천 방식으로서 '예악' 제도를 엄격하게 갖추면서 안정적 '질서'를 잡았다.
그래서, '인문주의자' 공자가 동경한 주공 단은 중국 문명의 '창시자'가 된다.
"우환이 출발점이고 즐거움이 종점이며 집단의식은 일관된 문화적 핵심이었다.
요컨대, 주나라인의 유산이자 그들의 문화 혁신과 제도 혁신의 산물은 하나의 핵심(집단의식), 한 쌍의 날개(우환의 심리와 낙관적 태도), 3대 정신(인본주의 정신, 현실주의 정신, 예술정신), 4가지 제도(정전, 봉건, 종법, 예악)였다. 실로 웅대하면서도 치밀하기 그지없다."
- [창시자], <6-6>, 이중톈, 2013.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 제3권인 [창시자]의 원제는 [奠基者;전기자]다.
중국 문명의 '기반(基)'을 '다진(奠)' 사람(者)이라는 의미 같은데, 우리말로는 어색하니 국문 번역본의 제목으로는 얼추 비슷한 뜻의 [창시자]로 지은 듯 하다.
이중톈은 오래전 써서 발표한 책들의 내용을 부분부분 발췌하고 요약하여 중국사 각 시기에 맞는 '중국 통사 시리즈'를 써 내려간다.
역사 이야기지만 소설보다 더 빠르게 전개되는 이중톈의 중국사 이야기는 그 중 3권인 [창시자](2013)가 압권이다.
주나라 이후 20세기 초 중화민국의 신해혁명 이전까지 수 많은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2천 년 이상 유지되어 온,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에 주공 단과 그의 조력자들이 '기초를 정한(奠基/전기)' 바로 그 '중국 문명'을 이 책의 마지막 6장 6절에서 그야말로 일목요연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동서양의 '인문주의' 속 '사람'은 차이가 있다.
서양은 '개인'이고 동양은 '집단'이며 동양의 이 '집단주의' 속 '사람(人)'은 역시 갑골문이나 금문에서 보면 '하늘(天)' 속에서 머리 위에 동그라미나 작대기 같은 것을 하나 얹고 있다. '천인합일' 또는 '천즉인' 사상의 상형문자적 유래이기도 하다. 이런 사상은 우리의 동학에서도 계승한 핵심사상이다.
동양의 이 '집단주의'적 인간이 '하늘'을, 또는 '천명'을 맹신하지 않고 집단과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 믿었다는 게 이중톈이 말하는 동양(중국)에 서양과 같은 '종교'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단다.
불안정한 정권의 안정을 위해 이러한 '천명' 사상을 정립한 주나라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문명의 '제도'를 확립했다.
이것이 바로 '정전제'와 '봉건제', 그리고 '종법제'와 '예악'이었다. 이중톈의 [창시자]에서는 '정전'은 경제제도였고 '봉건'은 정치제도, '종법'은 사회제도였으며 '예악'은 문화제도였다고 분류한다.
사회구성체로 보면 토대인 경제제도로서 '정전'의 '정(井)'은 가운데의 '공'과 주변의 '사'를 구분하는데, 이러한 체계는 가운데 주나라 천자와 주변의 제후로 나누는 정치제도로서의 '봉건' 또한 상징하고, 가운데 정통 적장자와 주변의 차자 및 서자들의 '질서'를 정하는 '종법제'의 기본상징이기도 했다.
이런 '질서'는 주나라 '천하'를 거대한 '가정'과 같이 빈틈없고 촘촘하게 구성했다. 질서가 '정연(井然)'하다고 할 때 '정(井)'은 질서의 상징 '정전제'의 '정(井)'이었던 거다.
중국 고대 문명의 '창시자(奠基者;전기자)' 주공 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기자(奠基者)'답게 형식적 '제도'로서 이 질서의 틀을 마무리 짓는다. 그것이 바로 고정된 각종 형식으로서 '예'와 '악', 즉 '예악(禮樂)' 제도였다. 주공 단의 '창시' 후 수 세대가 지나면서 '천하의 중심'으로서 주나라가 힘을 잃고 열국으로 분열된 춘추시대 '제자백가쟁명'의 시작점인 유가의 창시자 공자는 이런 '예악' 질서를 다시 복원함으로써 '인애'를 기반으로 한 '덕치'를 재확립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주요한 결론 중 하나인,
[논어], <안연>편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었다.
진정한 '시간이 시작(時間開始)'되던 때는,
비로소 '인문학(人文學)'적 문명이 열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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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시자(奠基者;전기자) - 이중톈 중국사 3](2013),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4.
2. [상나라 정벌(翦商/전상/Conquest of the Shang Dynasty)](2022), 리숴(李碩), 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2024.
3.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先秦諸子百家爭鳴)](2006), 이중톈(易中天), 이지연 옮김, <보아스>, 2015.
4. [허신과 설문해자(許愼與說文解字)](1980년대), 요효수, 하영삼 옮김, <도서출판3>, 2014.
5. [논어(論語)](기원전 5세기~), 김영 평역, <청아출판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