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숲에서 만나는 하나님 - 서평의 샘에서 길어 올린 복음
방영민 지음 / 플랜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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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요구: 참 목회자, 참 설교자

방영민 저, ‘책의 숲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읽고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나고 캘리포니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즈음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신앙 서적을 시작으로 영성/신학 서적으로 막 진입을 했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뜨거운 마음이 들어 성경과 함께 신학교에서 사용하는 조직신학 책과 성서해석학 책을 조금씩, 나의 미천한 이해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읽어보려고, 비록 진도는 안 나갔지만, 발버둥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간증이나 설교 위주의, 상대적으로 읽기 편하고 감정적 위로/공감/치유 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읽는 책이 아닌, 지적인 부분까지 해소시켜주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며, 성경에만 갇히지 않고 시대와 문화를 관찰하고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의 변하지 않는 정체성과 사명과 삶의 방향성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해줄 수 있는 책을 고르기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갈급했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진정한 구원은 언제나 외부에서 오는 법일까. 그 당시 페이스북에는 기독교 서적에 대한 서평가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여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방영민 목사도 그 중 하나였다. 세월이 지나며 대부분의 서평가들은 시들고 말라 자취를 감추었지만, 방영민 목사는 쇠하지 않고 꾸준히, 그것도 갈수록 깊어져가는 통찰력과 필력으로, 서평을 올리고 있다. 방영민 목사의 서평을 초창기부터 읽어오던 팬으로서, 그리고 책 선정에 있어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수혜자로서, 마침내 그의 서평들이 정갈하게 옷을 입고 종이책이라는 모습으로 내 손에 들려 읽혔다는 사실에 나는 기쁨과 감사를 느낀다.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분야에서 계속해서 읽고 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면, 방영민 목사의 서평을 초창기부터 차례대로 읽어보면 된다. 단순한 기계적인 요약 수준을 넘어, 방영민 목사가 지양하는 인상비평이 아닌, 오랜 관찰과 깊은 성찰을 통과한 통찰이 서서히 견고해져가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사람을 나는 존경한다. 방영민 목사도 그 중 하나다.

프롤로그에 소개된 것처럼 이 책은 방영민 목사가 써왔던 250여 편의 글을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 네 편씩 선별한 서평 모음집이다. 여섯 개 주제는 교회, 제자도, 설교, 하나님 나라, 시대와 사명, 예수의 십자가이다. 각 부를 여는 서론도 읽을 만하다. 거기에는 저자의 생각과 신앙이 잘 담겨있다. 책을 만들며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여섯 개의 주제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내겐 하나로 읽혔다. 저자의 탄식과 소망, 그리고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는 저자의 성실함과 복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져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실린 저자의 바람에 더하여 나의 저자에 대한 바람으로 이 감상문을 마치면 어떨까 한다.

저자 스스로가 강조하는 것처럼, 목회자는 기획하고 행정하고 기술에 능통한 기업가와 같은 자가 아니라, 본래 읽고 쓰고 말하고 기도하는 자일 것이다. 이 시대엔 그런 목회자들이 드문 것 같아 평신도인 나는 안타까운 심정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하다. 길 잃은 양이 될까 봐, 하나님 말씀을 읽지 못하는 눈 먼 자가 될까 봐, 하나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 먹은 자가 될까 봐,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모른 채 기계적으로 숨만 쉬며 이벤트화 되어버린 교회 예배에만 참석하게 될까 봐 두렵다. 나 역시 교회의 회복, 기독교의 회복을 갈망한다. 이 부분에서 목회자의 회복이 시급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방영민 목사처럼 꾸준히 작은 등불로 어두운 곳을 비추는 목회자가 많아졌으면 하는 것. 그가 존경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김남준, 김영봉 목사처럼 훌륭한 설교자가 되길 바라고, 삶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텍스트가 되어 그의 설교에서, 그의 글에서 넘쳐서 흘러나오는,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갖춘 목회자가 되길 바란다.

#플랜터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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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 하나님 자리를 훔치다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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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하나님 자리로

팀 켈러 저, ‘내가 만든 신’을 읽고

이 책의 원제는 ‘Counterfeit gods’이다. 책을 열면 저작권 페이지가 나오기도 전에 영어 단어 counterfeit에 대한 뜻풀이가 등장한다. 다음과 같다.

counterfeit [카운터핏]
1. 위조의, 모조의, 가짜의, 거짓의, 허울뿐인
2. -인 체하는, 가장한

한 장을 더 넘기면 저작권 페이지가 나오고 바로 옆에 제목, 저자, 옮긴이, 출판사가 적힌 페이지가 보인다. 그 페이지 맨 위에 한글로 이렇게 적혀있다. ‘하나님 자리를 훔치다’. 부제인가 싶어 원서 정보를 찾아보니 아닌 듯하다. 한국 번역판에서만 사용되는 문구 같다. 두란노에서 무엇을 강조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요컨대 ‘가짜 신들’이 하나님 자리를 훔치고 있는 실상을 폭로하는 것.

이 책은 우상숭배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알다시피 가짜 신은 우상을 뜻한다. 보통 우상이라고 하면 Idol, 우상숭배라고 하면 Idolatry라고 표현하는데, 이 책의 저자 팀 켈러는 굳이 ‘counterfeit gods’라고 한 걸 보면 팀 켈러의 강조점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우상이라는 말보다 그것이 가짜라는 데에, 가짜 신이라는 데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있다. 한글 번역판 제목이 원제를 직역한 ’가짜 신들‘이 아니라 ’내가 만든 신‘이라는 것. 목차만 봐도 제목을 왜 바꿨는지 알 수 있다. 1장부터 5장까지 제목을 살펴보면 평생 소원, 사랑, 돈, 성취, 권력, 이렇게 다섯 가지를 가짜 신들, 즉 인간이, 우리가, 내가 만든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우상은 가짜 신들이고, 그 가짜 신들은 모두 내가 만든 신이며, 그것들이 하나님 자리를 훔쳤다는 것이다.

우상이란 가시적 형상만을 일컫지 않는다. 가시적 형상 이면에 있는 비가시적 실체, 이를테면 탐욕처럼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들을 아우른다. 십계명도 우상 숭배를 경고하고 금지하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다른 신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들은 신적 속성이 없는 거짓 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은 피조물인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겐 거짓 신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그 무엇 (something)일지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은 아무것도 (nothing) 아니고, 아니어야만 한다.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팀 켈러는 우상숭배를 ‘단지 많은 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인간 심령의 근본 문제’라고 진단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숭배하도록 지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한다. 잘못된 대상은 모두 우상인 것이다. 팀 켈러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올바른 예배 대상을 기반할 때, 우상숭배에서 해방받는 유일한 길은 우상을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대체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상은 가시적 형상이 아닌 그것을 만들어낸 비가시적 실체이기 때문이며, 그것들 자체는 악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돈 자체가 악한 게 아니라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상황을 조장한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악한 것이다. 실제로 좋은 것일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만든 가짜 신들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모시는 것이다.

팀 켈러의 첫 책이었다. 각 장이 내겐 명료한 설교로 들렸다. 그런데 매 장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된다. 그것도 꼭 뒷부분에 가서 말이다. 팀 켈러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는 부분이지 않나 싶다. 특히, 이런 게 요즈음 회자되는 팀 켈러식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인가 싶어, 솔직히 사복음서가 아닌 성경 본문에서 출발한 설교가 조금 억지스럽게 예수님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 부분에서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내가 예전에 한국 여러 교회에서 들었던 억지스러운 설교보다는 이 연결이 자연스럽고 어설프지 않다는 생각이다. 첫 책이라 아직 일반화시키긴 어렵겠지만, 이건 책장에 꽂힌 두 권의 팀 켈러 저서를 읽고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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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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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에 찬 눈으로 높은 산과 깊은 광맥을 마주하는 낮은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저, ‘도스토옙스키를 쓰다’를 읽고

얼마나 많이 읽으면, 아니 어떻게 읽으면 이런 평전을 쓸 수 있을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조금 안다고 여겨왔다.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아는 건 흩어진 여러 조각 중 하나일 뿐이었구나, 표층도 뚫지 못한 주제에 거만하게 내부를 아는 척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흥분으로 가득 찬 채 수치와 감동의 경계를 비틀거리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그가 또 하나의 높은 산이라서 반갑다. 그 산을 감히 내가 오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다. 

누군가의 평전을 읽는다는 건 그 누군가에 대한 어지간한 관심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그 누군가가 작가라면 그 작가의 작품을 많이 섭렵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뒤따른다. 사람은 말이 아닌 삶으로 증명되기 마련이고, 작가에겐 작품이 그 삶이니 작가는 작품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평전들이 존재한다. 내가 읽은 평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나마 전집 읽기라는 높은 산을 오르고 있는 (아직 읽지 못한 여러 작품들이 책장에서 날 기다린다. 남은 작품 대부분이 단편이기에 내가 오르는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대한 산에 오르는 여정에서 나는 현재 삼 분의 이 정도에 와 있는 것 같다) 작가 중 나의 최애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이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함께 읽고 서로 다른 감상과 해석을 나누는 일은 보람되다. 지금도 나는 이 과업을 사랑하고 적극 장려하는 입장이다. 혼자만 읽는 것보단 함께 읽고 나눌 때 더욱 깊고 풍성한 작품의 세계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의 나눔도 이럴진대, 작품 수가 두 권, 세 권 늘어나면 나눔의 깊이와 풍성함은 그에 따라 배가 된다. 그렇다면 전집 읽기를 함께 한 나눔은 어떨까. 내가 이 평전을 손에 든 이유는 바로 이런 호기심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평전은 누군가가 쓴 평전이기도 하기에, 나는 도스토옙스키만이 아닌 슈테판 츠바이크와도 나눔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높은 산이나 깊은 광맥을 따라 걷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갈래의 길은 서로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교차점을 가지기도 한다. 한 작품이 아닌 여러 작품을 읽고 나누는 길은 확률적으로도 교차점을 많이 가질 것이다. 실로 그랬다. 츠바이크가 예로 드는 작품들의 장면들이나 인물들을 언급하는 이유 혹은 배경에서 나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부분을 언급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정도로 츠바이크가 쌓은 산은 높았고, 그가 판 광맥은 깊었다. 평전을 읽으며 이렇게 압도되는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다. 원래 평전이란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건 다른 평전들을 차차 읽어나가면 될 일이다.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츠바이크 읽기도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두 거대한 산을 내가 알다니, 맛을 보고 있다니, 어디쯤인지 몰라도 그 산을 오르고 있다니, 한 명의 순례자로서 나는 뜨거운 마음을 담아 깊이 감사할 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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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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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이 아닌 트리스탄: 죽지 않고 끝내 살아남는 정신성과 예술성

토마스 만 저, ‘트리스탄’을 읽고

이 작품의 제목 ‘트리스탄’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훗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 된, 사랑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는 중세 유럽 전설 (혹은 신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자신을 치료해준 적국의 공주 이졸데에게 반한 트리스탄 왕자는 외삼촌 마크 왕과 이졸데가 정략결혼을 올리기 전, 이졸데와 함께 사랑의 묘약을 마시게 되고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사랑에 빠진다. 하루 만나지 못하면 병이 들고, 사흘 못 보면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한 두 사람. 그들의 관계는 결국 발각되고, 트리스탄은 쫓겨난다. 이후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고, 트리스탄은 죽고, 슬픔에 빠진 이졸데도 잇따라 죽는다. 트리스탄은 묘약을 먹기 전부터 이졸데에게 이끌렸다. 이졸데는 묘약을 먹은 이후에야 트리스탄과 사랑에 빠진다. 트리스탄은 마크 왕과의 결혼 이전에 자기와 결혼할 상대를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 작품의 감상문을 쓸 수도 있었다. 이 작품만의 스토리가 있고,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확실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의미도 충분히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감상문을 쓴다면 반쪽 짜리 감상문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감상문을 쓰기 위해 꼭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의 제목을 트리스탄이라고 지었을까?” 

언뜻 보면 이 작품 역시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사랑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는 이야기라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이다. 그 이유를 밝히는 과정이 이 작품의 감상문이 될 것이다.

작품의 주요 인물은 ‘가브리엘레 클뢰터얀’이라는 부인과 ‘데틀레프 슈피넬’이라는 작가다. 각각 이졸데와 트리스탄을 대변한다. 트리스탄이 이졸데에게 먼저 반하듯 슈피넬도 가브리엘레를 먼저 마음에 둔다. 이졸데에게 남편이 있었듯 가브리엘레 역시 남편이 있다.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둘의 사랑은 금지된 것이었다. 이렇게 사랑이 처음 싹트는 장면만 본다면 두 작품은 닮았다. ‘트리스탄’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사랑의 모티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트리스탄이 먼저 죽고 이졸데가 나중에 죽는 신화의 순서와 달리, 슈피넬은 죽지 않고 가브리엘레만 죽는다. 그녀는 기관지에 문제가 생겨 이미 슈피넬이 충치 때문에 머물고 있는 요양원에 뒤늦게 들어왔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토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결코 간단한 기관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가브리엘레는 폐에도 문제가 생긴데다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모티프에서 본다면 두 작품은 엄연히 다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왜 작가 토마스 만은 슈피넬을 트리스탄에 비유하고 작품의 제목으로까지 선정했던 것일까? 바로 여기에 나는 저자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슈피넬은 과연 죽지 않았는가?”  

슈피넬은 작품 끝까지 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오직 육체만을 고려했을 때의 얘기다. 여기서 우린 가브리엘레가 죽는 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보다 한두 단계 이전의 사건도 살펴봐야 한다. 

가브리엘레를 처음 본 순간 반해버린 슈피넬은 평상시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는 법이 없었다. 가브리엘레에게만은 달랐다. 서슴없이 대화도 나누고 식사도 같이 했다. 그는 그녀가 알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무엇인가를 본 것이었다. 

요양원 사람들이 대부분 야외 소풍을 나간 날, 슈피넬은 가브리엘레로부터 그녀가 클뢰터얀 씨와 결혼하기 전에는 피아노도 치곤 하는, 즉 기계적인 삶에 때묻지 않은 채 정신성과 예술성이 충만한 사람이었음을 듣게 된다. 그 수줍은 고백은 슈피넬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다. 그는 가브리엘레를 처음 본 순간 그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자기 안에도 충만한 정신성과 예술성을 말이다. 

슈피넬은 가브리엘레가 남편과 결혼하는 순간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정신성과 예술성을 등지게 되고 영혼 없는 생계를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 그녀의 삶에서 결혼은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겨가는 지점이라고 믿게 된다. 요양원에 온 이유도 단순히 기관지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이 이미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녀에게 다시 정신성과 예술성을 되살려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요양원 사람들이 야외 소풍을 나가고 텅 빈 요양원에서 가브리엘레에게 피아노를 쳐보지 않겠냐고 끈질기게 부탁한다. 마지못해 수락한 가브리엘레는 쇼팽의 야상곡을 시작으로, 마침 슈피넬이 우연찮게 찾아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까지 연주하게 된다. 가브리엘레는 이날을 기점으로 하여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아내의 병세가 짙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가브리엘레의 남편 클뢰터얀 씨는 부랴부랴 요양원을 찾는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슈피넬과 정반대의 인물로 그려진다. 슈피넬이 정신과 예술을 상징한다면, 클뢰터얀 씨는 육체와 생계적 삶을 상징한다.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대비시켰던 양극이 여기에서는 합일을 이루거나, 혹은 그러려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마치 영원히 분리된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클뢰터얀 씨가 돌아가자마자 슈피넬은 혐오감에 차서 그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당신이 아내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투로 구구절절 평소에 생각해오던 말들을, 언뜻 보면 관념적일 뿐인 말들을 편지지에 써댄 뒤 망설이지 않고 보내버린다. 편지를 받자마자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온 클뢰터얀 씨. 그는 곧장 슈피넬의 방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세상의 논리로 슈피넬을 꾸짖으며 슈피넬을 한낱 몽상가로 만들어 버린다. 슈피넬에게는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가브리엘레가 많은 양의 피를 토하고 응급 상황에 처하게 되는 순간은! 

나는 앞에서 슈피넬은 과연 죽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클뢰터얀 씨 앞에 비굴하게 서서 별 대꾸도 못하고 있는 슈피넬이 그 순간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석해 본다. 아무런 힘 없이 슈피넬의 정신은 그 순간 세상의 논리에 의해, 돈과 효율의 힘에 의해 짓눌리고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클뢰터얀 씨는 아내에게 그랬듯 슈피넬에게도 정신성을 말살하는 파괴자로 묘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파괴자의 힘은 결국 아내의 육체까지 소멸시켰다. 그러나 슈피넬의 육체는 그 가운데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정신이 죽은 슈피넬은 ‘트리스탄’과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육체가 여전히 살아남아 정신의 부활을 꿈꿀 수 있는 슈피넬은 ’트리스탄‘과 다른 트리스탄인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토마스 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토니오 크뢰거의 한도 다시 느껴지는 듯하다. 세속적인 삶에 길들여지지 않는, 아니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아니 절대 그러면 안 되는, 정신성과 예술성을 향한 그의 열정과 사랑이, 꺾일 것 같고 무너질 것 같아도 끝내 살아남아 다시 그것의 부활을 시도하는 그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트리스탄이 아닌 트리스탄. 예술성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 토마스 만 읽기
1. 마의 산: https://rtmodel.tistory.com/1375
2. 토니오 크뢰거: https://rtmodel.tistory.com/1403
3.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4
4. 트리스탄: https://rtmodel.tistory.com/1618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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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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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슈테판 츠바이크 저, ‘환상의 밤’을 읽고

여기 우물에 갇힌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상류계층에 속한 예비역 장교이자 사교계에서 존경받는 신사다. 동시에 그는 현재 권태에 빠진 불감증 환자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는 그가 사는 공간이 진공 상태라는 진실을 보게 된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상태로 부유하는 자신의 일상이 가면 무도회장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현실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환상의 밤, 예기치 못하게 훅 들어온 낯선 세상. 그러나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던 세상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봉인된 채 숨겨지고 잊힌 세상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른 나이에 받은 넘치는 유산으로 인한 부유함이 그의 내면 자아를 허영과 가식으로 병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얻은 건 부와 명예, 그리고 나른한 안락함이었지만, 잃은 건 인간적인 자아, 참된 자신이었다. 회고록 형식을 따르는 이 작품 속 현재 화자는 그날, 그 환상의 밤을 잊지 못하고 그에게 각인된 기억에 의지하여 글을 써내려 간다. 환상의 밤은 그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작품에서 소개된 환상의 밤은 다분히 이성에서 감정으로 치닫는 전환의 순간으로 그려진다. 그 밤은 이성이 아니라, 운명이라 부를 수도 있는 즉흥과 우연이 지배하는 시간으로 채색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는 그날 벌어진 사건 가운데 열병에 취한 듯 분노와 탐욕과 쾌감을 느끼며, 생명의 잠재력과 뜨거운 열정을 넘어 삶의 기쁨을 되찾고, 너무나 인간적이고 참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분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 체면이라는 허울 아래 묻혔던 자신의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 그 허세와 허영은 나름대로의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삶을 조장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할 것만 같은, 소위 우물 안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우아하지만 맹목적으로 휩쓸려 사는 삶을 영혼 없는 삶으로, 죽은 삶으로 그리고 있다. 환상의 밤은 화자의 죽은 영혼이 봉인을 해제하며 소생하는 시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말하는 환상의 밤이 철저하게 우연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이 가져온 도박 같은 모험을 선택하는 화자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읽는 동안 마치 내 마음인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성을 거뜬히 넘어서서 삶을 압도하는 그 순간, 그 혼란의 순간, 마음 한 펀에는 위험에 뛰어드는 무모함을 인지하는 이성적인 자아가 있고, 또 다른 한 편에는 전신을 마비시키며 생명까지 거는 도박 같은 모험을 감행하고 싶어 하는, 우연과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리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작품 속 화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 결과 그동안 참된 자신으로부터 도피해온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되고, 수치와 죄책을 느끼게 되며, 정직성과 진실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환상의 밤,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전환이 일어났던 것이다.

작품 속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전혀 맛보지 못했던 황홀경이 내게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이는 우연성이 고분고분 내 도전에 복종한다는 몰아적인 기쁨과 환희를 의미했다.’ 아, 그 기분! 그 위험천만한 순간! 악마의 유혹 같기도 하고 신의 계시인 것 같기도 한 그 느낌! 살면서 우린 이런 순간을 적어도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 수도 있다. 환상의 밤은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들의 모든 삶에 침투하고 있는 실재인 것이다.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부디 작품 속 화자처럼 평소 불가능했던 도약을 감행하여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온전한 나로 남은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대할 따름이다. 

감정에 천착한 듯해 보이는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이성에 매몰된 인간들의 의식세계에 감정이라는 폭탄을 던진 것처럼 보인다. 이미 기울어진 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으로 치우쳐야 하는 법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감정에 천착한 이유 역시 나는 여기서 찾는다. 감정이 이성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도 인간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영역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온전하고 건강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고. 이는 인간의 본성을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른 각도로 공략하여 후벼 파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계속해서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m/1615

#세창미디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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