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슈테판 츠바이크 저, ‘환상의 밤’을 읽고

여기 우물에 갇힌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상류계층에 속한 예비역 장교이자 사교계에서 존경받는 신사다. 동시에 그는 현재 권태에 빠진 불감증 환자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는 그가 사는 공간이 진공 상태라는 진실을 보게 된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상태로 부유하는 자신의 일상이 가면 무도회장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현실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환상의 밤, 예기치 못하게 훅 들어온 낯선 세상. 그러나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던 세상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봉인된 채 숨겨지고 잊힌 세상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른 나이에 받은 넘치는 유산으로 인한 부유함이 그의 내면 자아를 허영과 가식으로 병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얻은 건 부와 명예, 그리고 나른한 안락함이었지만, 잃은 건 인간적인 자아, 참된 자신이었다. 회고록 형식을 따르는 이 작품 속 현재 화자는 그날, 그 환상의 밤을 잊지 못하고 그에게 각인된 기억에 의지하여 글을 써내려 간다. 환상의 밤은 그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작품에서 소개된 환상의 밤은 다분히 이성에서 감정으로 치닫는 전환의 순간으로 그려진다. 그 밤은 이성이 아니라, 운명이라 부를 수도 있는 즉흥과 우연이 지배하는 시간으로 채색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 화자는 그날 벌어진 사건 가운데 열병에 취한 듯 분노와 탐욕과 쾌감을 느끼며, 생명의 잠재력과 뜨거운 열정을 넘어 삶의 기쁨을 되찾고, 너무나 인간적이고 참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분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 체면이라는 허울 아래 묻혔던 자신의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 그 허세와 허영은 나름대로의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삶을 조장하는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할 것만 같은, 소위 우물 안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우아하지만 맹목적으로 휩쓸려 사는 삶을 영혼 없는 삶으로, 죽은 삶으로 그리고 있다. 환상의 밤은 화자의 죽은 영혼이 봉인을 해제하며 소생하는 시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말하는 환상의 밤이 철저하게 우연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이 가져온 도박 같은 모험을 선택하는 화자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읽는 동안 마치 내 마음인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성을 거뜬히 넘어서서 삶을 압도하는 그 순간, 그 혼란의 순간, 마음 한 펀에는 위험에 뛰어드는 무모함을 인지하는 이성적인 자아가 있고, 또 다른 한 편에는 전신을 마비시키며 생명까지 거는 도박 같은 모험을 감행하고 싶어 하는, 우연과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리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작품 속 화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 결과 그동안 참된 자신으로부터 도피해온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되고, 수치와 죄책을 느끼게 되며, 정직성과 진실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환상의 밤,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전환이 일어났던 것이다.

작품 속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전혀 맛보지 못했던 황홀경이 내게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이는 우연성이 고분고분 내 도전에 복종한다는 몰아적인 기쁨과 환희를 의미했다.’ 아, 그 기분! 그 위험천만한 순간! 악마의 유혹 같기도 하고 신의 계시인 것 같기도 한 그 느낌! 살면서 우린 이런 순간을 적어도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 수도 있다. 환상의 밤은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들의 모든 삶에 침투하고 있는 실재인 것이다.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부디 작품 속 화자처럼 평소 불가능했던 도약을 감행하여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고 온전한 나로 남은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대할 따름이다. 

감정에 천착한 듯해 보이는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이성에 매몰된 인간들의 의식세계에 감정이라는 폭탄을 던진 것처럼 보인다. 이미 기울어진 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대쪽으로 치우쳐야 하는 법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감정에 천착한 이유 역시 나는 여기서 찾는다. 감정이 이성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도 인간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영역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온전하고 건강한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고. 이는 인간의 본성을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른 각도로 공략하여 후벼 파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계속해서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m/1615

#세창미디어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