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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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이 아닌 트리스탄: 죽지 않고 끝내 살아남는 정신성과 예술성

토마스 만 저, ‘트리스탄’을 읽고

이 작품의 제목 ‘트리스탄’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훗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 된, 사랑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는 중세 유럽 전설 (혹은 신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자신을 치료해준 적국의 공주 이졸데에게 반한 트리스탄 왕자는 외삼촌 마크 왕과 이졸데가 정략결혼을 올리기 전, 이졸데와 함께 사랑의 묘약을 마시게 되고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사랑에 빠진다. 하루 만나지 못하면 병이 들고, 사흘 못 보면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한 두 사람. 그들의 관계는 결국 발각되고, 트리스탄은 쫓겨난다. 이후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고, 트리스탄은 죽고, 슬픔에 빠진 이졸데도 잇따라 죽는다. 트리스탄은 묘약을 먹기 전부터 이졸데에게 이끌렸다. 이졸데는 묘약을 먹은 이후에야 트리스탄과 사랑에 빠진다. 트리스탄은 마크 왕과의 결혼 이전에 자기와 결혼할 상대를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 작품의 감상문을 쓸 수도 있었다. 이 작품만의 스토리가 있고,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확실하게 그려져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의미도 충분히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감상문을 쓴다면 반쪽 짜리 감상문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감상문을 쓰기 위해 꼭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의 제목을 트리스탄이라고 지었을까?” 

언뜻 보면 이 작품 역시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사랑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는 이야기라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이다. 그 이유를 밝히는 과정이 이 작품의 감상문이 될 것이다.

작품의 주요 인물은 ‘가브리엘레 클뢰터얀’이라는 부인과 ‘데틀레프 슈피넬’이라는 작가다. 각각 이졸데와 트리스탄을 대변한다. 트리스탄이 이졸데에게 먼저 반하듯 슈피넬도 가브리엘레를 먼저 마음에 둔다. 이졸데에게 남편이 있었듯 가브리엘레 역시 남편이 있다.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둘의 사랑은 금지된 것이었다. 이렇게 사랑이 처음 싹트는 장면만 본다면 두 작품은 닮았다. ‘트리스탄’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사랑의 모티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트리스탄이 먼저 죽고 이졸데가 나중에 죽는 신화의 순서와 달리, 슈피넬은 죽지 않고 가브리엘레만 죽는다. 그녀는 기관지에 문제가 생겨 이미 슈피넬이 충치 때문에 머물고 있는 요양원에 뒤늦게 들어왔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토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결코 간단한 기관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가브리엘레는 폐에도 문제가 생긴데다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모티프에서 본다면 두 작품은 엄연히 다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왜 작가 토마스 만은 슈피넬을 트리스탄에 비유하고 작품의 제목으로까지 선정했던 것일까? 바로 여기에 나는 저자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슈피넬은 과연 죽지 않았는가?”  

슈피넬은 작품 끝까지 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오직 육체만을 고려했을 때의 얘기다. 여기서 우린 가브리엘레가 죽는 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보다 한두 단계 이전의 사건도 살펴봐야 한다. 

가브리엘레를 처음 본 순간 반해버린 슈피넬은 평상시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는 법이 없었다. 가브리엘레에게만은 달랐다. 서슴없이 대화도 나누고 식사도 같이 했다. 그는 그녀가 알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무엇인가를 본 것이었다. 

요양원 사람들이 대부분 야외 소풍을 나간 날, 슈피넬은 가브리엘레로부터 그녀가 클뢰터얀 씨와 결혼하기 전에는 피아노도 치곤 하는, 즉 기계적인 삶에 때묻지 않은 채 정신성과 예술성이 충만한 사람이었음을 듣게 된다. 그 수줍은 고백은 슈피넬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다. 그는 가브리엘레를 처음 본 순간 그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자기 안에도 충만한 정신성과 예술성을 말이다. 

슈피넬은 가브리엘레가 남편과 결혼하는 순간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정신성과 예술성을 등지게 되고 영혼 없는 생계를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 그녀의 삶에서 결혼은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겨가는 지점이라고 믿게 된다. 요양원에 온 이유도 단순히 기관지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이 이미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녀에게 다시 정신성과 예술성을 되살려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요양원 사람들이 야외 소풍을 나가고 텅 빈 요양원에서 가브리엘레에게 피아노를 쳐보지 않겠냐고 끈질기게 부탁한다. 마지못해 수락한 가브리엘레는 쇼팽의 야상곡을 시작으로, 마침 슈피넬이 우연찮게 찾아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까지 연주하게 된다. 가브리엘레는 이날을 기점으로 하여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아내의 병세가 짙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가브리엘레의 남편 클뢰터얀 씨는 부랴부랴 요양원을 찾는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슈피넬과 정반대의 인물로 그려진다. 슈피넬이 정신과 예술을 상징한다면, 클뢰터얀 씨는 육체와 생계적 삶을 상징한다.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대비시켰던 양극이 여기에서는 합일을 이루거나, 혹은 그러려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마치 영원히 분리된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클뢰터얀 씨가 돌아가자마자 슈피넬은 혐오감에 차서 그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당신이 아내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투로 구구절절 평소에 생각해오던 말들을, 언뜻 보면 관념적일 뿐인 말들을 편지지에 써댄 뒤 망설이지 않고 보내버린다. 편지를 받자마자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온 클뢰터얀 씨. 그는 곧장 슈피넬의 방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세상의 논리로 슈피넬을 꾸짖으며 슈피넬을 한낱 몽상가로 만들어 버린다. 슈피넬에게는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가브리엘레가 많은 양의 피를 토하고 응급 상황에 처하게 되는 순간은! 

나는 앞에서 슈피넬은 과연 죽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클뢰터얀 씨 앞에 비굴하게 서서 별 대꾸도 못하고 있는 슈피넬이 그 순간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석해 본다. 아무런 힘 없이 슈피넬의 정신은 그 순간 세상의 논리에 의해, 돈과 효율의 힘에 의해 짓눌리고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클뢰터얀 씨는 아내에게 그랬듯 슈피넬에게도 정신성을 말살하는 파괴자로 묘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파괴자의 힘은 결국 아내의 육체까지 소멸시켰다. 그러나 슈피넬의 육체는 그 가운데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정신이 죽은 슈피넬은 ‘트리스탄’과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육체가 여전히 살아남아 정신의 부활을 꿈꿀 수 있는 슈피넬은 ’트리스탄‘과 다른 트리스탄인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토마스 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토니오 크뢰거의 한도 다시 느껴지는 듯하다. 세속적인 삶에 길들여지지 않는, 아니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아니 절대 그러면 안 되는, 정신성과 예술성을 향한 그의 열정과 사랑이, 꺾일 것 같고 무너질 것 같아도 끝내 살아남아 다시 그것의 부활을 시도하는 그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트리스탄이 아닌 트리스탄. 예술성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 토마스 만 읽기
1. 마의 산: https://rtmodel.tistory.com/1375
2. 토니오 크뢰거: https://rtmodel.tistory.com/1403
3.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4
4. 트리스탄: https://rtmodel.tistory.com/1618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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