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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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자유를 찾는 여정, 지금도 계속되는 싸움


타라 웨스트오버 저, ‘배움의 발견’을 읽고

소설로 보이는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국어판 표지에선 알아채기 힘들다. 한국에서 붙인 제목 ’배움의 발견‘을 봐도, 부제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를 읽어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원서 표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원제 ‘Educated' 오른쪽 아래에 'A MEMOIR'라고 쓰여있다. 그것도 대문자로, 별다른 설명 없이, 덩그러니.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회고록’이라는 뜻의 ‘Memoir'라는 단어가 이 작품에 대한 독법의 시작점이라고.

소설과 회고록의 차이는 허구와 실제의 차이다. 소설 속 화자의 이야기는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회고록 화자의 이야기는 역사성을 띤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에 의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그녀 자신의 이야기다. 저자의 머리만이 아닌 온몸과 온마음을 통과한 인생 이야기인 것이다. 

보도자료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기로 읽어도 무리는 없다. 진부하지만, 한 시골 소녀의 극적인 성공기 (a.k.a. 개천에서 용 났다는 이야기)로 읽어도 된다. 광고 카피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열여섯 살까지 학교에 가본 적 없던 소녀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기까지” 그러나 그렇게 그녀의 사적인 성장 (혹은 성공)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저자의 집필 의도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처사가 되리라는 게 내 지론이다. 내가 제안하는 이 작품에 대한 두 번째 독법은 카피에 현혹되어 단순히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 (혹은 성공) 결과에 집중하는 대신 그녀가 자란 환경, 그중에서도 그녀의 가족, 그중에서도 그녀의 아버지의 영향 아래 진행되었던 타라 웨스트오버의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이야기는 저자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인 우물을 벗어나며 수치를 극복하고 자기 객관화를 이뤄내며 마침내 자유를 찾은 대서사이기에 단순한 외적인 성공이 아닌 내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타라가 케임브리지 박사가 아니더라도 이 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한국어판 부제에 쓰인 ‘자유의 이야기’라는 표현은 옳다. 이 책은 인간이라면 누릴 수 있는, 누리도록 보장된, 그리고 누려야만 하는 내/외적 자유를 막고 통제하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로 대표되는, 경도된 사상과 이념 및 신념에 대한 가슴 아픈 고발이기도 하다. 낯설기만 한 문화 속 이야기에 우리가 이토록 공감할 수 있는 이유 역시 비록 상황과 맥락은 다를지라도 우리 주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비슷함은 일차적으로는 제목에 나와 있듯 교육의 유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도 공유하고 있는 깊숙한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타라 웨스트오버는 아이다호 출신이다. 아이다호는 미국을 이루는 50개 주 중 북쪽으로 캐나다와 국경을 이루면서 북동쪽으로는 몬태나, 남동쪽으로 와이오밍, 북서쪽으로 워싱턴, 남서쪽으로 오레건, 서남쪽으로 네바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유타, 이렇게 총 6개의 주와 접하고 있는, 미국 전체에서 볼 땐 북서쪽에 위치한 주이다. 캘리포니아의 절반 정도 되는 면적을 가졌지만 인구는 캘리포니아 인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부분은 산악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미국에서 11년간 살면서 나는 아이다호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사 먹은 감자는 대부분이 아이다호산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나는 저자의 문체에 강하게 이끌렸는데, 그건 아마도 아이다호만이 가진 천혜의 자연, 특히 인디언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거대한 산맥, 그중에서도 저자의 집이 위치했던 벅스피크 주위의, 황량함이 느껴질 정도로 여백이 풍부한 공간에 대한 묘사와 그로 인해 떠오르는 원시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녀의 가족 모두가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장면이 묘하게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공감각적으로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이다호가 내 머릿속에서 나만의 아이다호로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재해석된 아이다호의 벅스피크는 두 가지 사뭇 상반된 이미지를 띠게 되었다. 하나는 프롤로그에서 느꼈던, 미개척된 원시림의 이미지였다. 그곳은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나 그랜드 캐년 앞에서 느꼈던 자연의 웅장함과 연결되는 동시에 인간의 미약한 존재를 재확인시켜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기회만 된다면 나도 타라처럼 벅스피크가 만들어내는 계곡이나 산기슭에 발을 딛고 눈을 감고 바람과 산과 하늘과 물을 느껴보고 싶다. 다른 하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그곳에 정착하여 오래도록 대를 이으며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생성되는, 어쩌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타라의 환경은 몰몬교라는 종교다. 물론 이 책은 신학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몰몬교의 신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이 글에선 언급을 피하기로 한다. 대신 몰몬교 신자들이 주로 하는 행위, 사고방식, 생활습관들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 대변되며 타라의 자유를 억압했던 사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원제를 빌려 이 실체를 표현하자면 ‘Uneducated’라고 할 수 있을 그것은 바로 무속적인 신념, 근본주의적인 신앙, 극단적인 세대주의 종말론, 일루미나티 음모론, 정부와 병원 등을 사회주의나 악마적인 존재와 동일시할 정도의 확증편향 (그래서 타라 가족은 아무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죽기 직전에 가도 마찬가지다. 예방 접종은 외계인 혹은 간첩들 혹은 공산당이나 하는 짓거리일 뿐이다) 등이 제멋대로 짜깁기된 그 무엇이다. 타라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조울증과 정신분열증까지 더해진 가부장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평생 자기가 믿어왔던 안전한 우물만이 안전지대라고 믿고 가족들이 그 안에서만 살길 원한다. 평생 언제 닥칠지 모르는 종말을 대비하며 비상식량과 비상무기 등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타라의 성장은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는 여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외적인 아버지와 내적인 아버지는 육과 영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려는 시도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타라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것을 해낸 것처럼 보인다. 내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난 그녀는 외적인 아버지를 재해석한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었던, 그러나 벅스피크처럼 너무도 거대하여 감히 대항할 수조차 없었던 아버지라는 깊은 우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그녀에게 아버지는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동정의 대상이다. 그녀는 고백한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아이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기른 아버지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일곱 남매 중 타라를 비롯하여 집을 탈출한 리처드와 타일러는 대학 및 대학원 교육을 받았고, 나머지 넷은 정도만 다를 뿐 끝까지 아버지의 법 안에서 조금씩 위치를 바꿔갈 뿐 경제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한 상태로 아버지와 함께 제2의 아버지처럼 살아간다. 타라는 그 간격이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타라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녀는 1986년생이고, 현재 서른일곱이며, 이미 관계가 단절된 그녀의 아버지는 물론 가족 모두가 여전히 살아있다. 타라가 용기 내어 시작한 이 뜻밖의 여정이 나는 타라뿐만이 아니라 타라의 가족을 포함한 제2, 제3의 타라의 아버지들에게 부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모두가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제2, 제3의 타라가 되길 바라게 된다. 타라의 아버지가 타라가 되는 여정이 그들 모두에게서 시작되길 기원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대부분 타라의 위치에 나를 대입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흔여섯이 되고 한 아이의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나는 나를 타라의 아버지 위치에 대입하기도 했다. 타라와 타라 아버지 사이의 싸움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지금도 현존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속해 있던 깊고 거대한 우물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찾는 타라이기도 하고, 그런 타라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계속 우물 속에 가둬두려고 하는 타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둘 사이의 싸움은 내 안의 두 자아 간의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본성과 모순 가득한 인간의 심리를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고전문학이 아닌 생판 모르는 아이다호 출신 한 여자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마주하게 된다. 뒤늦게 읽은 감이 있지만, 이 책을 모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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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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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푸시킨

알렉산드르 푸시킨 저 ’눈보라‘를 읽고

미천한 상식으로, 학창 시절부터 내게 각인된 푸시킨이라는 이름은 그저 외국 시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비롯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그들의 입을 통해 자주 들려진 푸시킨은 그 이상이었다.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작가라는 위상을 넘어 러시아 문학을 있게 한 근원 같은 느낌이랄까. 러시아 국민은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숱한 러시아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푸시킨.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는 푸시킨으로부터 뻗어 나온 지류의 깊고 풍성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언제 한번 읽어봐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녹색광선 책으로 드디어 푸시킨을 읽게 되었다. 녹색광선 책은 어떤 작가를 처음 접할 때 아주 탁월한 가이드가 된다. 길지 않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소개, 그리고 그 소개글을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해주는 여러 사진과 그림들은 작품을 읽기 전에 입맛을 다시며 메인요리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훌륭한 전채요리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눈보라‘라는 제목의 작품을 표제로 하는 단편집이다. 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이 책은 ’벨킨 이야기‘로 러시아에서 출간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벨킨이라는 작가가 쓴 것처럼, 마치 푸시킨은 그 글을 받아 간행만 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벨킨은 가공의 인물이고 실제 저자는 푸시킨이라 한다. 푸시킨의 첫 소설집이라는 이유, 시대 정황이라는 이유, 등의 여러 가지 이유가 푸시킨에게 벨킨이라는 이름 뒤에 숨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다섯 편을 모두 읽은 지금 하나의 해석을 더하자면, 이 시도조차 푸시킨의 기발한 장난기어린 창의력과 상상력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다. 푸시킨이 썼든 벨킨이 썼든 작품을 즐기기에는 별 상관없지만 말이다. 

추석을 맞아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기차 안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 적당한 작품이었다. 손에 딱 잡히는 판형, 가볍고 튼튼한 양장본으로 한 작품이 기껏해야 20-30 페이지 안팎이라 전혀 부담이 없었다. 다섯 편의 이야기가 모두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식이라, 구두로만 존재하던 어떤 이야기를 처음으로 글로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 너만 알고 있어,라는 말을 먼저 듣고 읽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완성된 작품 속에서 나는 21세기 현대소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장편에 비해 단편이 가지는 특유의 기발함과 재치가, 물론 현대소설에서처럼 세련되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눈보라’에서 여주인공이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기다리던 신랑 대신 나타난 인물이 나중에 결국 사랑에 빠져 청혼을 하게 되는 남자였다는 착상은, 비록 매끄럽진 않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였다는 생각이다. 시공간이 19세기 러시아였을뿐 푸시킨의 기발한 상상력은 시대를 이미 초월한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러시아 문학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공간이 달라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결국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오히려 더 빠져들게 된다. 다름 속에서 같음을 발견하는 과정,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과정, 통찰력은 이렇게 길러지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러시아 문학에 목이 마르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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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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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함과 나약함 사이에서

엔도 슈사쿠 저, ‘바다와 독약’을 읽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던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의 초대형 폭격기 B-29 한 대가 오이타현과 구마모토현 경계 근처에 추락하여 탑승원 12명이 모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중 8명은 서부 사령부로부터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데, 때마침 생체실험용으로 제공해 달라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제안이 승인되는 바람에 이들은 모두 끔찍한 실험동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만행은 실화다.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해 5월 17일부터 6월 2일에 걸쳐 실제로 벌어진 이 처참한 인권유린 사건을 역사는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이라고 기록한다.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은 이 작품 ‘바다와 독약’의 중심 소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의미 있다고 판단되는 이유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1923년생인 엔도 슈사쿠가 자국의 수치이자 자국 역사의 오점 중 하나일 이 사건을 사건 발생 후 12년이 지난 1957년에 한 잡지에 연재하고 그다음 해에 단행본 소설로 출간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이 1966년에 출간되고, 폐렴으로 사망하기 3년 전인 1993년에 그의 마지막 작품 ‘깊은 강’이 출간되었으니, ‘바다와 독약’은 그의 초기작이라 할 만하다. 그가 첫 소설을 발표한 지 4년 만의, 그러니까 그가 35세가 되던 해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엔도 슈사쿠의 평생 숙제였던 신의 존재와 부재에 따른 인간의 죄악과 나약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비록 ‘침묵’와 ‘깊은 강’에서처럼 기독교 색채를 정면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으로써 현재 시점의 화자의 눈을 통해 바라본 ‘스구로’라는 한 의사를 매개로 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시공간은 생체실험이 자행되던 1948년 규슈대학 의학부에 맞춰진다. 비록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바른 독법은 사건 위주가 아닌 인물 위주여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 만행이었는지를 밝히거나 재조명하는 데엔 그리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미 그걸 사실이라고 전제한 상태에서 그 실험에 가담한 인물들의 내면을 조명하는 것이 이 작품의 중심 의도일 것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한다. 스구로 의사 (사건 당시 의대생) 뿐만이 아니라 여러 등장인물들 (간호사 우에다, 스구로의 동료 의사 토다, 집도의, 조교, 장교들 등)이 이 실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로 선택하는 순간들, 실험이 자행되는 상황 가운데 이들의 심리 상태, 양심에 거리낄 뿐 아니라 인권을 유린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진행되는 실험에 참여하는 장면들, 그리고 실험이 끝나고 미군 포로가 처참하게 살인을 당한 채 고깃덩어리가 되어 (장교들은 포로의 생간을 꺼내어 안주로 먹기도 했다는… 아, 이건 좀…) 쓰레기처럼 치워진 이후 스스로 내면의 괴리감을 처리해 나가는 장면들.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유대인이었고, 그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는 피해자 입장에서 바라본 인권유린 현장에 대한 하나의 보고서였다. 이에 반해 ‘바다와 독약’은 가해자 국가의 국민 엔도 슈사쿠가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전쟁 중 황폐한 인간의 참혹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보여주고, 그 인간들의 심리가 시공간이 다른 곳에서 이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심리일 수도 있다는 점을 넌지시 짚어주기에는 더 적절할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연민이 아닌 반성과 참회의 뉘앙스가 묻어 있는 바탕이 인간이 인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줄 수 있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을 잃고 길을 잃은 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의 모습이라는 해석은 이 작품을 넘어 저자 엔도 슈사쿠를 읽는 바른 독법이리라 생각한다. 이 독법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때,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 길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그대로 머무는 스구로의 모습은 ‘침묵’에서의 기치지로 냄새를 풍긴다. 나약한 인간, 인간의 나약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참혹한 현장 가운데 신은 어디에 존재했는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셨는가, 등의, 하고 또 하고 심지어는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넘어서도 또 하게 되는 질문을 말이다. 아, ‘침묵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무겁고도 잘 잡히지 않는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할 때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창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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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위로 - 흐린 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장일 지음, 남수현 그림 / 넥서스CROSS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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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을 머금은 평범하고 충만한 삶

장일 저, ‘결핍의 위로’를 읽고

장일은 목사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다. 그리고 희귀 질환인 크론병 환자다. 그렇다면 이 책은 목사의 이야기일까, 남편이자 아빠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크론병 환자의 이야기일까. 버스를 오가면서 읽다가 마지막 책장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을 내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이 책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구나. 

직업이 목사일 뿐 이 책은 목회 관련 에피소드도 설교집도 아니다. 저자는 남편이자 아빠이지만 이 책은 부부관계나 육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리고 저자는 크론병 환자이지만 어떤 아픔을 가진 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두 가지 유형에 빠지지 않는다. 즉, 그 아픔에 구속되지도 않고 그것을 훈장처럼 여기지도 않는다. 장일 목사는 그저 묵묵히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목사도 아니고 크론병도 앓지 않지만, 이 책에 공감이 갔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평범함이다. 

희귀 질환인 크론병 환자의 책을 평범함이라는 단어로 압축해 버리는 게 무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저자의 삶을 크론병 환자의 삶으로 일축하고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으로만 이 책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오독하는 가장 쉬운 길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3인칭 관찰자의 시선이 아닌 1인칭 관찰자 혹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이야말로 저자의 글과 삶에 대한 예우이자 바른 독법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굳이 평범함이란 단어를 택한 이유는 저자의 글과 글에 비친 삶 속에서 일상의 진부함이나 나태함이 아닌 인내와 소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내와 소망은 우리네 일상을 이루는 거대한 두 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비록 결핍이라 부를 수 있는 점을 안고 있지만 저자의 일상은 ‘평범하다’. 그래서 감사하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라 더욱 감사하다. 결핍의 위로는 평범한 일상을 목사이자 남편이자 아빠이자 환자로서 꿋꿋하게 살아내는 그의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돌아보면 나도 당신도 비록 콘텍스트는 다르지만 모두 무언가에 결핍을 가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공감과 위로이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이 충만해지는 순간은 결핍이 부재한 삶이 아니라 결핍을 머금은 삶에서 온다. 

#넥서스CROSS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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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시는 하나님 - 성경 속 7인을 통해 듣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
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전의우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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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읽고

이 책의 부제는 ‘성경 속 7인을 통해 듣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성경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상상력을 통해 눈물과 탄식 가운데 있었던 7명의 성경 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셨던 말씀을, 성경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가운데 쓰인 예레미야애가를 우리에게 주셨던 이유의 연장선에서, 들어보자고 요청한다. 코로나로 흉흉했던 시대를 함께 지내온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이 글은 저자가 선택한 7명의 인물과 그에 따른 소주제에 따른 나의 짧은 감상들로 대신한다. 

1. 아브라함, 시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걷기 (창세기 22:1-19)                     
복음의 시작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도전을 주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중에서도 진미는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이 등장하는 장면일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문학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수많은 해석을 낳았던 이 본문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항상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방식은 물론 이삭의 입장에서 같은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방식까지 내가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하고 여러 해석들을 접할 때마다 이르는 결론은 동일하다. 즉, 믿음과 순종이다. 이는 히브리서 저자나 야고보서 저자가 이른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실천하는 순종이 없는 믿음은 약하거나 미숙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것일 뿐입니다. 전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바울은 아주 단호했습니다. 그의 선교 목적은 단지 청중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의 절정이 단지 이삭 대신 어린 양이 죽었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보인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리라는 약속을 실제로 지키시리라는 것이라며 우리도 거기까지 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믿음과 순종에 따른 축복은 그렇게 실행에 옮긴 자에 국한되지 않고 만민을 향한다는 것. 크리스토퍼 라이트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언제나 울림을 주고 나를 다잡게 만든다.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시금 나의 영적인 방향을 재조정하게 만든다.

2. 나오미와 룻, 비번영의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룻기 1장)
룻기의 복음을 ‘비번영의 복음’이라고 해석하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시선이 신선하면서도 전적으로 수긍이 간다. 번영 복음은 믿음과 순종이 건강과 부와 성공 같은 가시적인 복을 가져오는 보증수표일 뿐 아니라 질병과 가난과 실패 같은 가시적인 화를 피해 가는 부적인 것처럼 말한다. 이에 반해 룻기의 복음은 믿는데도 불구하고 고난 받는 이야기, 고난 받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이야기라고 저자는 통찰해 낸다. 번영 복음과 정반대의 복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플롯의 성경 속 내러티브를 여럿 알고 있으며 그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은 물론 순종하는 삶으로 반응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내 삶도 비번영의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의 예제라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복음을 통할 때에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살아내며 소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룻과 같은 이방인에게 전적인 헌신과 믿음의 순종을 허락하시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번영 복음의 화려한 가면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3. 엘리야, 우울증과 두려움의 치유 (열왕기상 19장)
갈멜산 대결에서 완승을 거둔 엘리야에게 곧바로 찾아온 건 죽고 싶을 만큼의 절망과 두려움이었다. 이세벨 왕후가 자기 목숨을 노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빠진 엘리야의 병을 진단한다. 이른바 우울증이다.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셔서 더 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위로자이시다. 죽여달라는 엘리야에게 잠과 떡과 물을 주시고 달래시는 장면이나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세미한 가운데 말씀으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게 하시는 장면은 읽을 때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종종 엘리야에게 나를 대입하기도 하고 엘리야가 받았던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번에 읽을 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과 엘리사를 남겨 두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엘리야의 심정이, 그 울컥하며 자기 객관화를 이루고 다시금 하나님의 사명을 다잡는 그 뜨거운 마음이 좀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신뢰한다.  

4. 코헬렛, 어처구니없는 세상과 하나님의 주권 (전도서 9-12장)
코헬렛은 우리가 전도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다. 코헬렛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 전통에 서 있다. 전도서는 코헬렛의 조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조언은 주로 지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과 영적 영역을 아우르는 지혜의 근본적 이중성, 즉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 의로운지 악한지, 경건한지 불경건한지에 대한 대립을 펼쳐 놓고 선택을 촉구하는 식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마치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 가지 영역은 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는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해석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을 아우르는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나 역시 아멘으로 화답한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우리 삶이 지혜롭고 의로우며 경건할 수 있고, 어리석고 악하며 불경건한 길을 피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존재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을 나는 비록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아멘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저자의 요구대로, 그리고 코헬렛의 요구대로, 우리 삶이 비록 어처구니없을 만큼 악과 혼란이 넘쳐 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도래할지라도, 우리의 창조자요 궁극적 심판자요 우리의 유일한 소망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둔 채 기뻐하고 기억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5. 예레미야, 환멸과 원망과 자기연민의 치유 (예레미야 15:10, 15-21)
태어나면서부터 예정된 다툼과 싸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모두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상황. 예레미야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여기서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성경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모든 말이 그 자체로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부정적이고 환멸에 찬 예레미야의 생각과 말이 정직하게 기록된 것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꾸짖으시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한다. 환멸과 원망 (적대감)과 자기연민이라는 파괴의 삼단콤보에 신음하던 예레미야가 토해내던 말들보다 그렇게 토해내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가는 과정 자체가 메시지라는 것. 예레미야를 통한 일보다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기회를 제공한다.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객관적 상황 앞에서,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런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시간표를 신뢰하고 기다리며 지금, 여기에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 그 과정 중에 우리 안에 있던 불신앙과 반역의 욕망이 발견되고 치유되는 것. 이런 과정을 신앙생활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눈엔 목적이라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은 여기에서도 진실이다. 

6. 바룩, 야망이 좌절되는 아픔 (예레미야 45장)
바룩이라는 낯선 이름을 만난다. 꽤 높은 관료직임에도 불구하고 보장된 자리을 택하지 않고 왕 대신 왕과 성전과 왕궁으로부터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던 예레미야를 택하고 섬겼으며, 예레미야를 도와 두루마리를 작성해 하나님의 말씀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성전에 가서 그 두루마리를 낭독했다고 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건 평안한 가운데 쓰고 낭독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대재앙 중에 죽을 수도 있는 입장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레미야를 섬기고 그의 곁을 지켰다. 비록 성경에는 많은 독자들에게 낯선 이름으로 다가올 정도로 아주 미미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바룩이 없었다면 예레미야의 활동은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여기서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바룩이 되어도 괜찮겠느냐?”라고 말이다. 바룩은 시련이 다가와도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충직한 많은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듯하다. 바울에게는 아나니아가 있었다. 아니니아가 없었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는 일은 적시에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뭇사람들로부터 주목받는 역할과 그렇지 않고 그 주인공의 그림자에 묻혀 이름도 빛도 없이 일하고 사라지는 역할. 나는 여전히 전자를 후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진 않을까. 하나님의 눈보다 사람의 눈을 더 많이 의식한 채 하나님 앞에서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진 않을까. 나는 과연 시편 84:10의 고백처럼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 하나님, 제 안의 허영을 거세시켜 주소서.


7. 베드로, 실패와 죄책감의 치유 (마태복음 26:69-75)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장면과 더불어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수 앞에서 맹세까지 할 정도로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실패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 베드로의 부인 장면이 성경에 실린 이유, 특히 사복음서에 공히 실린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실패자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패는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의 수제자라고 해도 말이다. 또한 그 실패는 예견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실패를 정확하게 예견하셨다. 저자의 해석대로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의 예견대로 예수를 부인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참 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실패가 사실이고 예견될 뿐 아니라 용서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놀라지도 않으시고 실망하시도 않으시며 그것을 통해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다리신다. 우리들의 자발적인 회개에 언제나 용서하시면서 말이다.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과정에 불과하고 그 아픈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나약한 본모습을 사실대로 직시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더 성숙해지고, 우리 안의 불신앙은 치유되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다. 실패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는 실패자가 아니라 용서받고 치유함을 입은 자가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서유니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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