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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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을 끌어안을 때까지


미셸 투르니에 저, '뒷모습'을 읽고


아주 가끔 뒷모습까지 보게 되는 사람이 있다. 뒷모습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혹은 미처 드러내지 못한 그 사람의 정직하고 순수한 모습, 그 사람의 여백, 그래서 더욱 은밀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나는 믿는다. 헤어진 이후 그 사람의 뒷모습을 좇는 건 바로 그 진실을 알고 싶어서다. 그 진실의 깊이와 풍성함을 간직하고 싶어서다. 


아래는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의 일부다. 뒷모습에 관한 글이다. 


| 뒷모습까지 도도한 사람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먼저 다시 만나자고 하진 않을 사람이다. 앞모습은 도도했지만 뒷모습은 외로워 보이는 사람도 있다.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다. 혼자 보내기가 괜히 미안해지는 사람이다. 마음에 남아 기도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앞모습은 약해 보여도 뒷모습은 씩씩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만나서 얘기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헤어질 때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은근히 놓이는 사람이 그렇다. 앞모습도 뒷모습도 모두 측은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무너져가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꾸는 앞모습까지도 손을 놓아버린 사람이다.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만날 때면 말은 줄고 마음은 바빠진다. 그럼에도 상대의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에 눈물이 날 것 같다. 결국엔 내 마음도 무너진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끌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볼 때면 나는 그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뒷모습을, 그의 모든 모습을 내 눈에, 내 마음에 정갈하게 담아두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


내가 느끼는 나의 뒷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부끄러운 내 과거의 모습들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 흔적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뒷모습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른 그 사람의 역사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청산은 없고 누적만 존재하는 공간이 뒷모습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현재와 미래의 내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리라. 


에두아르 부바가 찍은 사진에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붙인 글들의 모음집. 흑백사진이어도 좋다. 아니, 흑백사진이어서 더 좋다. 미셸 투르니에가 말하듯, 뒷모습은 참다운 비밀을 드러내고 있기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주체이기에. 생략, 은연중의 말, 빗대어하는 말, 암시의 세계이기에. 


내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좀 더 많이 봐둬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더 넉넉한 마음과 더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들의 뒷모습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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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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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외로움, 그리고 다짐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다시 읽고


이 소설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래서 주인공만이 아닌 나의 죽음도, 우리 모두의 죽음도 될 수 있는, 지극히 흔해빠진 죽음.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일까.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해진다. 완벽한 영점이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는 옳았다. '에브리맨'이 죽음에서 시작하는 건 필연으로 보인다.


이번엔 6년 전 처음 읽을 때보다 더 천천히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씹으면서 읽었다. 이렇다 할 중심 서사가 부재하기에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줄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필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여러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발견하고 작가 노트에 옮길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이게 인생이구나 싶었다. 삶의 끝까지 다녀온 기분이었다.


그는 보석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보다 상대적으로 허약한 체질로 평생을 살았다. 때문에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수술실에서는 나오지 못했다. 한창일 땐 유명 광고 회사의 아트 디렉터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세 번 결혼했고, 세 번 이혼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들은 평생 그를 원망했다. 장례식에 와서도 아무런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분노를 삭이지 못한 듯 마지막 인사를 겨우 건넬 뿐이었다. 두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 낸시는 끝까지 그를 사랑해 준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모든 장례식을 준비한 사람도 낸시였다. 그는 어떻게 낸시 같은 아이가 자기 딸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운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그랬다. 낸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가 그럴 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낸시의 착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가 들어가 있는 관 뚜껑 위로 낸시가 흙을 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이미 죽은 그에게는 소용없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 입을 빌려 자기에게 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성공한 미국인이 그렇듯 바람을 피웠다. 유독 여자의 육체에 약했다. 불륜이 가져온 불행은 그의 인생 전체에 깃들었다. 굳이 이해하려 들자면, 그가 일해서 번 많은 돈을 탓할 수도 있고, 형과는 다른 나름대로의 건강상 열등감이 허세로 잘못 표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의 불행은 그가 자초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몸과 마음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인 노년에 이르러 (내가 보기엔 너무 늦은 듯했지만)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가족을 해체한 장본인도 자기였고, 그 해체 때문에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자기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때 그가 사랑했던 사람도, 한때 그가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던 삶도 이미 모두 그를 등지거나 떠나간 상태였다. "너무 늦었어요!" 이 무시무시한 말은 그의 내적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인해 도미노처럼 하나씩 무너져가는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낸 칠십 대 노인의 최후는 저 한 문장의 외침에 무너질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윤리적인 시선만으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주인공에게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나둘씩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지 않은가. 그것이 불륜이 아니더라도. 그의 불륜을 잘못된 충동으로 확장시켜 이해한다면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늦었어요!"라는 말 앞에서 당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있다. 이제 겨우 오십 대에 들어섰지만 칠십 대에 죽음 앞에 서 있던 그처럼 나도 후회하고 자책하고 원망하는 내 모습들을 기억한다. 어쩌면 이것들이 이 소설에 공감을 일으키는 주동력이 아니었을까. 죽음도 그렇지만, 죽음 앞에 섰을 때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상념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 '만약'을 생각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게 인간이 아닐까. 에브리맨, 모든 인간, 나,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


또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노년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들에서도 나는 외통수로 느닷없이 닥쳐오는 외로움과 슬픔을 맛보았다.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라는 문장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해가 갈수록 노쇠해지시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체감하게 되는 노화와 노쇠. 나 역시 건강을 챙기느라 예전보다 많은 시간과 돈을 쓰게 된다. 모험은 줄고 유지 보수에 급급한 삶으로 전환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주인공이 그랬듯 나도 무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아이의 어릴 적 사진들을 괜스레 하나씩 클릭하며 몇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도, 예전에 끄적거렸던 일기 같은 글들을 들춰보는 것도 모두 그런 일련의 과정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필립 로스는, 비록 과도한 표현이지만, 노년은 전투라고, 아니 노년은 대학살이라고까지 말한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번뜩 들다가도 침묵하게 되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노년의 삶이 점점 늘어가는 이 시대와 나에게 닥친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지는 순간이었다. 


저자가 주인공을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죽게 만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불륜을 제외하면 주인공은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불륜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그가 자진해서 해체시켜 버린 가족 관계가 더 문제였다. 그가 마지막에 완벽한 고독 속에서 죽어갔던 이유는 그가 윤리적으로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 아닌 비행과 실수로 점철된 그의 중년의 삶이 그의 외로운 노년을 만든 주범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주인공을 이렇게 만들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충동과 그 충동 이후의 무책임한 행동들로 인해 죄책감에 짓눌리게 되고 외로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 이에 반하여, 다른 하나는 이 주인공을 거울삼아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더욱더 사랑하며 살도록 애쓰라는 것. 하지만 누가 모를까. 이 둘을 다 알면서도, 다시 말해 후자를 염원하면서도 전자에 머물게 되는 게 인간이지 않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노년의 삶이 조금은 더 아름다울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 때 더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여러 욕망들에 휘둘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만이 아니라 해야만 할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모든 사람이 이 다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것이 필립 로스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읽고: https://rtmodel.tistory.com/1148

* 필립 로스 , '에브리맨' 다시 읽고: https://rtmodel.tistory.com/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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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의 시작 - 신화에서 계시로
정우조 지음 / 지우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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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의 본보기


정우조 저, '모든 이야기의 시작, 신화에서 계시로'를 읽고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내가 창세기 관련 서적들을 섭렵했던 주된 이유는 창조기사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창조과학,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성경 해석이 불편했고, 나는 그것의 대안적 해석을 갈망했다. 이제는 창세기 1-2장에 소개되는 창조 순서와 방법이 내가 아는 과학 상식에 어긋나거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고 해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나의 신앙에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은 반지성적인 입장을 취하겠다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초지성적인 선택이다. 지성적으로 충분히 따져보았고, 또 앞으로도 따져볼 의향이 있지만,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전제로 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신앙과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의 언어이며,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지혜로운 분별을 하겠다는 뜻이다). 


창조기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나 문자적으로 믿으려는 시도도 모두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든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다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게 된다. 비록 일부 진영에서는 여전히 반지성적인 개인 및 집단이 야기하는 심각한 부작용 (크게는 신앙을 잃어버리기도)이 발생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도 창조에 관한 여러 의문점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다양한 해석들을 낳고 있다.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 남겨질 것 같다. 반지성적인 진영을 의지적으로 택하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소수의 무리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진영에 속하게 되어버린 다수의 신앙인들이 자기들의 해석만이 옳고 다른 해석들은 모두 틀렸다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이런 다양한 해석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를 더욱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창세기 1-11장, 그러니까 12장부터 등장하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본문을 신학에서는 원 역사라고 부른다. 창조기사가 등장하는 창세기 1-2장,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3장,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소개되는 4장,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보여주는 5장,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가 소개되는 6장, 홍수 심판과 노아가 지은 방주 안의 생명이 살아남는 7장, 노아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는 8장, 무지개 언약이 등장하는 9장, 노아의 후손들이 온 세상으로 확산되는 10장, 바벨탑 사건이 소개되는 11장까지, 성경을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이들마저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유명한 이야기들이 바로 이 책이 다루는 주요 본문이다. 


저자인 정우조 목사가 바라보는 성경의 원 역사의 주인공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을 인간이 반복해서 죄에 이끌린 나머지 폭력과 살인을 동원한 반역을 행하며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심판의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혜와 구원의 계획을 이어 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먼저 다시 한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또 감사할 수 있었다. 저자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고 느껴졌다. 


이 책은 어려운 신학책이 아니다. '바람직한 설교의 본보기'라고 할까. 충분히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충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쓰여 있다. 회개라는 이름으로 성도의 죄책감을 자극하지도 않고, 은혜라는 이름으로 감정팔이에 머물지도 않으며,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남발하는, 의외로 많은 한국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준비 안 된 설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신학자들만의 놀이터에서 논의되는 논쟁적인 이야기들까지 가져와 소개하기도 하지만 결코 하나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적절한 선을 유지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을 풀어주는 성경교사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며칠에 걸쳐 설교를 듣듯 천천히 읽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은 저자의 시선으로 다시 숙지할 수 있었고, 잊었거나 처음 듣는 내용들은 읽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여러 곳에 체크 표시를 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해석 하나만 소개하자면 '네피림'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네피림은 창세기 6장에 소개되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지는 존재인데, 4절은 개역개정으로 이렇게 되어 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저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네피림은 고대의 신화적 존재라기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의 괴물 같다고, 지금도 존재하는 '세상의 지배계층'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셋의 후손들을 '신앙인'으로 치환한다면 네피림은 그 둘의 혼합이라고. 또한 이는 단순히 신자와 불신자 간의 결혼 문제에 비추어보는 정도의 주제가 아니라 경건한 신자를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게 될 때 일어나는 비극이라고,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가인의 자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매우 세속적이고 탐욕에 물든 이들이 있다고, 그들이 바로 현실 세계의 네피림이라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더 악하고 폭력적이며 음란한, 위선과 가식으로 자신을 점철한 존재들이라고. 


네피림을 현재로 소환하는 저자의 해석을 읽으며 나는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고, 여러 번 읽으며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창세기 6장에 소개되는 네피림의 역사적 존재 여부를 파헤치거나 그들의 기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정체를 밝히는 식으로의 접근이 아닌, 우리에게 쓰인 건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쓰였다는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의 본보기를 본 것 같아 마음에 감동이 되었다. 


5-6절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 지면에 있는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저자의 네피림에 대한 해석 덕분에 이 구절이 내겐 더 큰 은혜로 다가왔다. 네피림으로 살고 있었을지 모르는 나를 돌아보게 했고,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오늘도 거듭나기를 소망했다. 이런 예기치 못한 경험은 좋은 설교의 힘일 것이다. 


이 책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한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미리 읽어야 할 책은 없다. 성경과 함께 하루에 한두 꼭지씩 묵상하며 또 공부하며 읽어나가길 추천한다. 보다 깊고 풍성한 신앙으로 이끌어 줄 좋은 책이다. 


#지우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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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트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7
문지혁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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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열을 뚫고


문지혁 저, ‘나이트 트레인‘을 읽고


“이게 뭔 호텔팩이고, 야간열차팩이지.” 


빈으로 가는 야간열차 안, 일행 중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색안경 형이 내뱉은 이 불평 어린 한 마디가 이 소설의 외형을 잘 설명해 준다. 작품 속 주인공은 격일로 호텔이 아닌 야간열차 안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대학 시절 저렴 버전의 유럽 패키지여행을 회상한다. 소설 대부분은 그 여행 이야기다. 말하자면 액자식 구성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화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기억과 망각의 고리를 통해 회상과 해석의 다리를 수시로 넘나들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은 해석이며, 사실과 해석 사이에 생긴 균열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한다. 특히 주인공의 과거 유럽 여행은 O라는 옛 여자친구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지우기 위해 출발했다는 점에서 첫사랑의 풋풋함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그 균열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외형은 유럽 여행이지만, 본질은 뭐랄까, ‘인생’이라고 나는 읽는다. 작품 속 주인공은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모르도르로 향하는 '반지의 제왕' 프로도처럼, O가 준 은반지를 버리기 위해 그 반지가 구매되었던 오스트리아 빈을 향한다. 마치 그곳에서만 반지가 파괴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곳에 가야만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주인공은 그곳에 위치한 프라터 놀이공원의 대관람차를 반지를 버릴 구체적 장소로 정한다. 


주인공을 마지막으로 태운 그날의 마지막 대관람차 안에서 주인공은 잘츠부르크에서 만났던 미국인 일행들의 사진 부탁을 들어주느라 정작 반지를 버리지 못한 채 다시 지상에 내려오고 만다. 유일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패배감으로 대관람차를 막 빠져나온 순간, 예상 밖에도 프라하까지 이동하던 야간열차에서 우연히 만났던 전수진과 재회하게 된다. 전수진은 주인공이 마치 돌고 도는 도르마무의 무한반복 속에서 허탈한 상태로 타자에 의해 강제로 빠져나오게 되었을 때 때마침 나타난 구원의 빛 같은 이미지로 등장한 듯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내심 주인공의 유럽 여행이 O와의 정리를 넘어 전수진과의 새로운 시작이길 잠시 기대했던 것 같다. 거듭된 우연의 신비를 믿고 싶었던 탓이다. 전수진은 맥주를 함께 마시며 주인공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뒤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빠져나오라는 조언을 건네기도 하는데, 내 눈엔 그녀가 일종의 구원자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인공 역시 전수진에게 마음이 있었고, 마지막 여행지인 파리의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서도 주인공 마음을 가득 채운 건 과거의 O가 아닌 현재의 전수진이었다. 그러나 전수진은 끝내 주인공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쓰고 나타나면 안 된다,라고 읽는다. E의 존재 때문이다). 대신 여행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주인공 옆에 있었던, 심지어 전수진을 본 것 같다고 말할 때 얼른 찾으러 가보라고 말했던, E와의 만남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다. 알다시피 E는 현재 시점 주인공의 아내 은혜다. 


작품 속 이야기의 심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을 둘러싼 세 여자의 서로 다른 의미가 중요해 보인다. 먼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O는 과거, 전수진은 미래, 그리고 E는 현재다. 그리고 상징의 관점에서 보면, O는 후회와 여러 흔적들, 그래서 지우고 싶은 것들. 전수진은 이상, 그러나 발이 닿지 않는, 말하자면 붙잡을 수 없는 것들. 그리고 E는 일상과 행복, 항상 주위에 있으나 알아채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이다. 상처와 흔적을 지우고 과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나선 여행길에서 주인공은 탈출구 같은 방향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주인공에게 맞지 않는 옷, 이루어질 수 없는 꿈, 잡을 수 없는 구름 같은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주인공은 자신의 여백을 채우고 있던 현재를 택하게 된다. 주인공의 실패한 듯한 유럽 여행이 결국 주인공의 성공적인 내적 성장 여정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O를 버리러 갔다가 E를 얻고 오는 여행으로.


때론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하다.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재를 망가뜨리는 삶은 지옥일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를 구성하고 또 때론 구원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체성 역시 과거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과거의 일부를 도려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과거와의 성공적인 단절은 과거를 망각하는 것에 있지 않고 끌어안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의 이미지 (반지, 대관람차, 유럽 여행 순서, 옛 여자친구 이름 O)는 이러한 연속선상의 우리네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빈의 대관람차에서도, 니스의 해변에서도 결국 버리지 못한 채 가지고 있던 은반지 역시 우리의 현재가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과거를 도려낸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치유의 유일한 방법은 단절이 아닌 화해다. 다시 말해 끌어안는 것이다. 모든 과정을 함께하고 이해해 주는 E의 존재는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원이 된다. 알파벳 중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게 E라는 점에서 E는 특별히 빛나지 않지만 잔잔한 빛을 머금고 있는 우리의 일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원은 저 빛나고 높은 무대 위가 아닌 상대적으로 어두운 무대 아래에 실재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과거와의 화해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더불어 이 소설은 똑같아 보이는 원도 결코 똑같지 않다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벗어날 수 없는 원일지도 모른다는 것. 한 원을 벗어나면 또 다른 원 안에 속하게 되는, 반복된 원의 탈출기와 정착기가 우리네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것. 원 밖의 인생은 다른 원 안의 인생일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여정 속에 우리가 알아채고 누려야 할 행복이 있다,라고 이 소설은 말해주는 게 아닐까. 비록 초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실패감에 젖게 된다 하더라도, 성실히 그 길 위에 서 있으면 어쨌거나 구원의 서사가 드리워진다는 것. O를 삭제하기 위한 주인공의 실패한 여행이 E와의 행복한 미래를 안착시키는 성공적인 여정으로 재해석되듯,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도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고, 종종 그것은 인생의 주축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예상치 못한 균열로부터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 그 의미는 실재하고 체험할 수 있는 행복의 실체라는 것. 


문득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혹은 이미 끝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붙잡혀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정작 내 주위에 있는 소중한 의미들을 허투루 흘려보내거나 무감각한 상태로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내가 유일하게 살아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현재를 붙잡기 위해 나 역시 야간열차를 타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문지혁 읽기

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

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

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

5. 중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9

6. 실전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92

7. 나이트 트레인: https://rtmodel.tistory.com/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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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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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의 깊은 뜻을 헤아리다


엔도 슈샤쿠 저, ‘깊은 강‘을 다시 읽고


(0) 들어가며


재독의 유익 중 하나는 줄거리 파악에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세부사항은 기억이 안 나도 대략적인 흐름과 메시지를 이미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십분 활용하여 ‘깊은 강‘을 4년 만에 다시 읽었다. 덕분에 작품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더불어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잇닿아 있는 오쓰의 신앙, 즉 작가 엔도의 신앙관을 이해하고 변증 하려는 무언의 강박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초독 때와 달리 이번엔 좀 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이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다섯이다. 모두 저마다의 과거가 있다. 서로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그들은 지구상 유일한 장소, 인도 바라나시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제각기 나름의 답을 얻게 된다. 설령 그것이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일종의 매듭 같은 걸 지을 수 있었다. 단순히 먼 이방 땅을 밟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상징하는 어떤 성스럽고 초월적인 의미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각 인물들의 서사와 그들이 얻은 답, 그리고 그 답을 선사한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 대해 조금 끄적거려 볼까 한다. 


(1) 이소베의 경우


첫 꼭지로 이소베를 위치시킨 건 엔도의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소베는 일본 남성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깊은 강'이 출간되기 전 엔도의 마지막 작품을 기다렸던 독자는 적지 않았을 테고, 그들 중 많은 일본 남성들은 이소베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 본다. 말하자면 엔도는 일본 남성 원형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책을 시작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보편성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이 보편성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소베의 아내가 병동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남긴 말에 대한 이소베의 반응과 그 이후의 여정에 공감을 얻기 위한 엔도의 수 읽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만약 이소베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면, 아무리 유언이라도 환생할 테니 꼭 자기를 찾아달라는 아내의 말 한마디 때문에 모든 걸 제쳐두고 확실치도 않은 편지 한 통에 의지하여 인도까지 가게 되는 한 남자의 무게를 독자들은 쉽게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소베가 일본 남성의 원형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의 기이한 행동까지도 독자들이 기대감을 가지면서 끝까지 읽게 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시대와 장소가 다른 독자인 나조차도 이소베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고, 심지어 바라나시의 허름한 골목에서 환생한 아내를 만나기를 내심 기대했던 걸 보면, 이소베가 상징하는 보편성은 비단 일본 남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아내와 일상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회하고 싶어 하는 한 노년 남자의 애절한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엔도는 이소베에게 환생한 아내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이 이소베의 경우를 읽으며 물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엔도가 그리고자 했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의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모든 인간, 즉 한 나라의 수상부터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수드라'에도 속하지 않는 카스트 밖의 존재들(아웃카스트)인 불가촉천민(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까지 모두 묵묵히 품는 장소로 그려진다. 또한 그곳은 죽은 자가 살아난다거나 환생한 사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가 지극히 기적적인 상징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소베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죽은 아내가 환생했을지도 모를 한 소녀를 끝내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미쓰코와의 대화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이소베는 아내가 이미 자기 안에 환생해 있다는 결론에 묵묵히 다다르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망각의 강에 떠내려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다는 건 곧 아내의 환생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 곧 환생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이소베에게 준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것은 갠지스 강이 존재하지도 않을 어떤 관념적인 이상이나 신비로운 환상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오감이 살아 움직이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은유이지 않나 싶다. 엔도가 바라보고 그리고 싶어 했던 '깊은 강'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2) 기구치의 경우


젊었을 적 미얀마에 파병되어 태평양 전쟁을 치렀던 기구치. 한 전우의 헌신 덕에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게 전쟁은 총칼의 위협이 아닌 치열한 생존의 위협으로 기억된다. 미얀마의 기후와 풍토병, 그리고 먹을 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우의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고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기구치에게 인육을 건네며 죽어가는 그를 살렸던 쓰카다는 일상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이 일부를 먹었던 전우의 가족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잖아도 전쟁 후 트라우마에 빠져 지내던 쓰카다를 붕괴시킨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된다. 


기구치는 생명의 은인인 쓰카다에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청년 가스통을 만나게 되고 그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헌신적으로 쓰카다를 포함한 여러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쓰카다는 죽기 전 가스통에게만은 말을 터놓았다. 자신이 전쟁 중 인육을 먹었다는 고백을 하자 가스통은 기겁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은 채 안데스 산맥에서 발생했던 비행기 추락 사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던 한 사람이 자진해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그래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며 희생했던 이야기였다. 덕분에 살아남아 구조된 이들이나 자신의 몸을 희생해 다른 사람들을 살렸던 자의 가족이나 모두 서로를 이해하며 인육을 먹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승화시킬 수 있었다. 쓰카다는 가스통의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에서 해방받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가스통이 상징하는 건 지극히 낮고 추한 곳에 위치한 죄인에게까지 찾아오신 예수와 꼭 닮아 있다. 도스토옙스키 식으로 표현한다면 가스통은 유로지비일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위로하지 못했고 술조차 몸을 상하게 할 뿐 도움이 되지 못했던 쓰카다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가스통이었다. 가스통에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마치 고해성사하듯이, 솔직히 고백한 이후에 쓰카다는 구원을 얻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구치는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목도했다. 그리고 인도 여행 중 가스통이 쓰카다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꿈을 꾼다. 기구치는 갠지스 강에서 비로소 가스통이 쓰카다에게 했던 행동의 의미를 다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이들을 품어 안는 갠지스 강은 가장 더러운 죄인마저 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친다. 


(3) 누마다의 경우


죽을 수도 있었을 폐 질환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동화 작가 누마다. 그는 투병 중일 때 아내가 사준 구관조에게 유일하게 모든 솔직한 말을 털어놓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가 실패할 확률이 큰 수술에서도 살아남았을 때 그 구관조가 갑자기 죽었다. 누마다는 구관조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누마다가 인도를 찾은 것도 야생에서만 구할 수 있는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자연으로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누마다의 이야기는 갠지스 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누마다가 해방을 맛본 곳은 갠지스 강이 아닌 인도의 정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를 놓고 생각해 보면, 삶과 죽음의 양극을 모두 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주고 정결하게 해 주는 갠지스 강의 상징적인 의미와 맞닿아 있다. 비록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던 구관조와 같지는 아니지만 누마다는 자신이 구입한 새를 방생함으로써 은혜로 입었던 삶을 돌려준다. 말하자면 은혜를 흘려보낸 것이다. 'Pay it back'이 아닌 'Pay it forward'를 실천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와 중첩된다. 죽음에서 삶으로, 그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전달되는 은혜의 선순환. 갠지스 강이 갖는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


나름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자처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던 미쓰코. 동시에 그녀는 스스로를 깨어 있다고 여기며 미쓰코와 함께 무리를 짓던 이들을 절대 동지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쓰코는 그 어느 영역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고, 분열되어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늘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쓰코의 내면은 공허했고 그녀의 눈은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공부만 하는 학생들,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학생들을 고리타분한 바보라 여기던 그녀는 어느 날 무리들의 소개로 오쓰를 유혹하기에 이른다. 


오쓰는 스스로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집안의 내력을 따른 가톨릭 신자였고, 내세울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착한 심성을 가졌으나 나약한 사람이었다. 미쓰코의 육체적 유혹에 넘어갔고, 얼마 후 미쓰코로부터 버림받은 후 그는 신부가 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다 (오쓰와 미쓰코가 다니던 대학은 오쓰가 가게 된 프랑스의 수도원 관할이었다).


다른 남자와는 달리 오쓰는 미쓰코의 마음에 어떤 묘한 인상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고, 잘 나가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한 이후 신혼여행을 프랑스로 가서도 미쓰코는 홀로 그곳에서 신부가 되기 위한 여정을 밟고 있는 오쓰를 만나러 간다. 오쓰는 여전했다. 여전히 숙맥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에서도 여전히 어떤 경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 경계는 신앙의 유무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다.  지극히 서양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류'의 신앙관, 그리고 그것에 대립되는 범신론(이라 쓰고 범재신론이라 읽는다)적인 자신의 신앙관 사이에 난 경계였다. 오쓰는 둘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고뇌하고 있었다.  


허무와 냉소로 가득했던 미쓰코에게 오쓰는 자신의 삶이 껍데기만 남은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미쓰코의 삶이 껍데기의 삶이었다면, 오쓰의 삶은 정반대의 알맹이만 남은 삶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쓰코와 오쓰는 마치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둘은 서로가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부재한 모습이라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알지 않았을까 싶다. 


프랑스에서 신부가 되지 못한 채 오쓰는 인도의 바라나시로 떠밀려 왔고, 그곳에서도 가톨릭 성당이 아닌 힌두교 소속의 공동체와 생활하며 불가촉천민들이 갠지스 강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었으며,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고, 심지어 오쓰가 꿈꾸던 일도 아니었다. 오쓰는 자신을 받아주는 유일한 공동체에서 머물렀을 뿐이고, 그 시간 그 공간(지금, 여기)에서 예수가 했음직한 행동들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의 짐을 지고 함께 먹고 마시며 고통을 공유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숭고한 삶을 살고 있는 오쓰의 모습으로부터 미쓰코는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다 가진 것 같았으나 공허와 냉소만이 남아 있는 미쓰코, 다 잃은 것 같으나 어떤 충만함 속에 살고 있는 듯한 오쓰. 소설이라는 극단적 설정이 가미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쓰코는 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내밀한 충만함을 오쓰의 삶으로부터 처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오쓰의 삶은 말하자면 사랑의 실천이었다. 한 사람에 대한 연민, 희생, 헌신. 그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이었다. 그리고 오쓰의 삶은 스스로 자신은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미쓰코의 삶의 정확한 여집합이었다. 미쓰코는 자신에게 부재했던 유일한 알맹이, 즉 '실천적인 사랑'을 인도의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에 와서야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5) 마무리하며


엔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낸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은;

(1) 이소베의 경우를 통해, 이상과 환상의 공간이 아닌 오감이 살아 있는 지극히 역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장소였다. 

(2) 기구치의 경우를 통해, 모든 사람을 품어 안으며 가장 더럽고 추한 죄인마저 끌어안는 자비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3) 누마다의 경우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흘려보내며 생명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거룩한 장소였다. 

(4) 미쓰코와 오쓰의 경우를 통해,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와 그들을 섬기는 실천적인 사랑을 행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이 작품을 두 번 읽은 나는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이 인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거하는 모든 현장으로 스며들고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엔도의 '깊은 강'에 대한 깊은 뜻을 이제야 조금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엔도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

7. 내가 버린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2064


* 엔도 슈사쿠 다시 읽기

1. 깊은 : https://rtmodel.tistory.com/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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