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이트 트레인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7
문지혁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2월
평점 :
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열을 뚫고
문지혁 저, ‘나이트 트레인‘을 읽고
“이게 뭔 호텔팩이고, 야간열차팩이지.”
빈으로 가는 야간열차 안, 일행 중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색안경 형이 내뱉은 이 불평 어린 한 마디가 이 소설의 외형을 잘 설명해 준다. 작품 속 주인공은 격일로 호텔이 아닌 야간열차 안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대학 시절 저렴 버전의 유럽 패키지여행을 회상한다. 소설 대부분은 그 여행 이야기다. 말하자면 액자식 구성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화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기억과 망각의 고리를 통해 회상과 해석의 다리를 수시로 넘나들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은 해석이며, 사실과 해석 사이에 생긴 균열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한다. 특히 주인공의 과거 유럽 여행은 O라는 옛 여자친구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지우기 위해 출발했다는 점에서 첫사랑의 풋풋함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그 균열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외형은 유럽 여행이지만, 본질은 뭐랄까, ‘인생’이라고 나는 읽는다. 작품 속 주인공은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모르도르로 향하는 '반지의 제왕' 프로도처럼, O가 준 은반지를 버리기 위해 그 반지가 구매되었던 오스트리아 빈을 향한다. 마치 그곳에서만 반지가 파괴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곳에 가야만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주인공은 그곳에 위치한 프라터 놀이공원의 대관람차를 반지를 버릴 구체적 장소로 정한다.
주인공을 마지막으로 태운 그날의 마지막 대관람차 안에서 주인공은 잘츠부르크에서 만났던 미국인 일행들의 사진 부탁을 들어주느라 정작 반지를 버리지 못한 채 다시 지상에 내려오고 만다. 유일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패배감으로 대관람차를 막 빠져나온 순간, 예상 밖에도 프라하까지 이동하던 야간열차에서 우연히 만났던 전수진과 재회하게 된다. 전수진은 주인공이 마치 돌고 도는 도르마무의 무한반복 속에서 허탈한 상태로 타자에 의해 강제로 빠져나오게 되었을 때 때마침 나타난 구원의 빛 같은 이미지로 등장한 듯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내심 주인공의 유럽 여행이 O와의 정리를 넘어 전수진과의 새로운 시작이길 잠시 기대했던 것 같다. 거듭된 우연의 신비를 믿고 싶었던 탓이다. 전수진은 맥주를 함께 마시며 주인공의 자초지종을 다 들은 뒤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빠져나오라는 조언을 건네기도 하는데, 내 눈엔 그녀가 일종의 구원자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인공 역시 전수진에게 마음이 있었고, 마지막 여행지인 파리의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서도 주인공 마음을 가득 채운 건 과거의 O가 아닌 현재의 전수진이었다. 그러나 전수진은 끝내 주인공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쓰고 나타나면 안 된다,라고 읽는다. E의 존재 때문이다). 대신 여행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주인공 옆에 있었던, 심지어 전수진을 본 것 같다고 말할 때 얼른 찾으러 가보라고 말했던, E와의 만남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다. 알다시피 E는 현재 시점 주인공의 아내 은혜다.
작품 속 이야기의 심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을 둘러싼 세 여자의 서로 다른 의미가 중요해 보인다. 먼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O는 과거, 전수진은 미래, 그리고 E는 현재다. 그리고 상징의 관점에서 보면, O는 후회와 여러 흔적들, 그래서 지우고 싶은 것들. 전수진은 이상, 그러나 발이 닿지 않는, 말하자면 붙잡을 수 없는 것들. 그리고 E는 일상과 행복, 항상 주위에 있으나 알아채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이다. 상처와 흔적을 지우고 과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나선 여행길에서 주인공은 탈출구 같은 방향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주인공에게 맞지 않는 옷, 이루어질 수 없는 꿈, 잡을 수 없는 구름 같은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주인공은 자신의 여백을 채우고 있던 현재를 택하게 된다. 주인공의 실패한 듯한 유럽 여행이 결국 주인공의 성공적인 내적 성장 여정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O를 버리러 갔다가 E를 얻고 오는 여행으로.
때론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하다.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재를 망가뜨리는 삶은 지옥일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를 구성하고 또 때론 구원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체성 역시 과거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과거의 일부를 도려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과거와의 성공적인 단절은 과거를 망각하는 것에 있지 않고 끌어안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의 이미지 (반지, 대관람차, 유럽 여행 순서, 옛 여자친구 이름 O)는 이러한 연속선상의 우리네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빈의 대관람차에서도, 니스의 해변에서도 결국 버리지 못한 채 가지고 있던 은반지 역시 우리의 현재가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과거를 도려낸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치유의 유일한 방법은 단절이 아닌 화해다. 다시 말해 끌어안는 것이다. 모든 과정을 함께하고 이해해 주는 E의 존재는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구원이 된다. 알파벳 중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게 E라는 점에서 E는 특별히 빛나지 않지만 잔잔한 빛을 머금고 있는 우리의 일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원은 저 빛나고 높은 무대 위가 아닌 상대적으로 어두운 무대 아래에 실재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과거와의 화해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더불어 이 소설은 똑같아 보이는 원도 결코 똑같지 않다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벗어날 수 없는 원일지도 모른다는 것. 한 원을 벗어나면 또 다른 원 안에 속하게 되는, 반복된 원의 탈출기와 정착기가 우리네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것. 원 밖의 인생은 다른 원 안의 인생일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여정 속에 우리가 알아채고 누려야 할 행복이 있다,라고 이 소설은 말해주는 게 아닐까. 비록 초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실패감에 젖게 된다 하더라도, 성실히 그 길 위에 서 있으면 어쨌거나 구원의 서사가 드리워진다는 것. O를 삭제하기 위한 주인공의 실패한 여행이 E와의 행복한 미래를 안착시키는 성공적인 여정으로 재해석되듯,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도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고, 종종 그것은 인생의 주축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예상치 못한 균열로부터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 그 의미는 실재하고 체험할 수 있는 행복의 실체라는 것.
문득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혹은 이미 끝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붙잡혀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정작 내 주위에 있는 소중한 의미들을 허투루 흘려보내거나 무감각한 상태로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내가 유일하게 살아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현재를 붙잡기 위해 나 역시 야간열차를 타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문지혁 읽기
1. 소설 쓰고 앉아 있네: https://rtmodel.tistory.com/2031
2. 고잉 홈: https://rtmodel.tistory.com/2046
3. 당신이 준 것: https://rtmodel.tistory.com/2112
4. 초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4
5. 중급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39
6. 실전 한국어: https://rtmodel.tistory.com/2192
7. 나이트 트레인: https://rtmodel.tistory.com/2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