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업 소설가 하루키의 철학


무라카미 하루키 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이 책을 읽기 전이라면 제목이 '소설가라는 직업'이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전자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일반론을 떠올리게 하지만, 후자는 하루키의 철학이 그대로 담긴, 요컨대 ‘전업 소설가’에 대한 하루키의 특수론 내지는 고유론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둘의 차이를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이 책을 집어든 것도 전자의 내용이리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책은 하루키 냄새가 풀풀 나는 책이었다. 하루키라는 사람이 소설가가 되었던 과정(한 마디로 운명이라는 거다. 그 운명 이후 찾아온 운, 그 운 덕분에 생겨난 자기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은 소명의식으로 이어진다), 소설가로 수십 년을 지속하며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이유, 그 비법(이라 할 것도 딱히 없지만)들이 편안하고 친절한 문장으로 쓰여있는 책이었다. 그러므로 막연히 소설가가 어떤 직업인지에 궁금하고 그에 대한 답을 원한다면, 혹은 하루키라는 특정 소설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이 책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말을 달리하면, 이 책은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하루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필독서가 될 수 있고, 어쩌다 한두 번 소설을 써본 자가 아니라 소설 쓰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여기고 그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혹은 걸어갈 이들에게도 필독서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저자인 하루키는 인생 대부분에 대해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유보적이거나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사실 이런 입장은 그의 작품 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물들의 성향을 보면 우유부단하게 보일 정도로 특별히 강한 캐릭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고 거의 확신하는 소설가에 대한 철학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자기만의 길을 찾아내고 누가 뭐라고 해도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한 편으론 자기 계발서에서나 나옴직한 결론과 비슷해서 다소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론 소설가가 되고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도 어떤 특별한 샛길이 있는 게 아니라 소명의식을 가지고 정직하고 성실한 자기 관리를 통해 묵묵히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는 빛바랜 진리를 다시 빛나게 해 주어 소설가를 꿈꾸거나 이미 소설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감동과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이 두 가지를 모두 느꼈다.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었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워낙 필력이 좋아 하루키의 글은 술술 읽히는 마력이 있다. 특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의 어투가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이것은 그의 철학(신중한, 혹은 우유부단한, 혹은 포용적인)을 대변해 주면서도, 한 편으론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하는 결론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나는 읽기 전과 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다. 결국 이 책은 전업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운명과 소명의식, 그리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이뤄진다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기 위해 길게 늘어 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뒤로 갈수록 집중력을 잃어서 대충 읽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했다. 하루키가 저렇게 자기만의 길,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대부분과 다른 길을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며 성공한 사람(한 마디로 비주류로서)이기 때문에 이런 책도 쓸 수 있었겠구나 하는. 그리고 그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결코 출간되지 못했을, 아니 써지지도 않았을 책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또한 이런 생각도 했다. 역시 작가는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타고나야 하는 거구나, 운명이구나 하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영원히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하루키의 독고다이식의 방법은 성공으로 열매를 맺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해도 하루키와 같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전업 작가로 살고 싶다 하더라도 생계유지가 안 되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재능을 가지고, 운명을 느꼈다 하더라도 입에 풀칠을 하지 못하거나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을 가지지 못하면 하릴없이 소설만 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루키가 하루키가 된 것은 재능과 운명과 소명의식과 자기 관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썼지만, 그것은 성공이라는 가시적인 열매 위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메시지를 일반화시킨다거나 맥락 없이 적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무리일 것이다.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 하루키 읽기

1. 노르웨이의 숲: https://rtmodel.tistory.com/655

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https://rtmodel.tistory.com/820

3. 양을 쫓는 모험: https://rtmodel.tistory.com/1211

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https://rtmodel.tistory.com/1913

5. 일인칭 단수: https://rtmodel.tistory.com/1957

6.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2163

7.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https://rtmodel.tistory.com/22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죽음을 위한 좋은 삶


아툴 가완디 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나는 이율배반적이다. 나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을 대하는 입장이 다르다. 모순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나만 이런 건지. 혹시 당신도 그렇지 않은지. 나는 이런 이중성이 나의 한계인지, 인간의 한계인지도 궁금하다.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모든 죽음은 단 한 번밖에 없는데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죽을 뻔한 경험이 아닌, '죽었던' 경험. 이것은 인간의 영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말은 곧 모든 죽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의 한 번뿐인 죽음 앞에서 서툴 수밖에. 그렇다면 타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죽음에 대해 무지했고 나완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경솔하게도 죽음을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낭만화하고 있었다는 점도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이 책 덕분에 죽음이 조금은 더 형체를 갖추게 되었다. 사고로 인한 즉사가 아닌 모든 죽음은 의학적이고 생물학적인 부분, 즉 노화와 노쇠 과정(대부분은 고통을 동반한, 그리고 정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의학적 도움을 받으며)을 겪게 된 이후에 찾아온다는 진실을 더 이상 간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여덟 꼭지의 소제목만 진지하게 읽어 봐도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기분과 함께 그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로 시작해서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으로 끝나는 책이라니. 저자는 의사다. 가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함께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여정에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며 현대 의학이 어떻게 그 여정에 관여하고 있는지와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되짚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로 독자를 공론장으로 초대한다. 동시에, 의사이자 한 사람, 이 두 정체성이 연합해 나가는 과정을 개인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독자는 자연스레 현대 의학을 대표하는 저자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치료, 간호, 보살핌을 받는 환자(대부분은 잠정적 환자)인 동시에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글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나의 이율배반적인 입장도 어찌 보면 이 두 정체성 사이의 괴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책 덕분에 그 선이 조금은 흐려진 듯한 기분이다.  


언제부터 죽음을 의학의 실패 내지는 결함으로 이해하게 되었을까? 현대 의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얘기도 아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60세 남짓이었다. 지금은 80세를 넘겼다. 90세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늘어난 건 유년이나 청년시절이 아니라 노년이다. 게다가 노화는 예전보다 더 이른 나이에 시작되고 있다. 잘 먹고 잘 살게 되면서 생겨난, 지극히 아이러니한 부작용이다. 덕분에 죽음은 늦춰졌지만 죽어가는 기간은 늘어났다. 문제는 이렇게 늘어난 기간의 주인공으로 급부상하게 된 존재가 현대 의학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라는 참인 명제를 마치 거짓으로 뒤집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마치 어떻게 손만 잘 쓰면 죽는 시기를 원하는 만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것처럼 현대 의학은 죽음을 실험대 위에 올렸고 인간다움이라는 가치를 거세시켜 버렸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가족을 포함한 지인의 죽음을 단 몇 시간만이라도 연장시키려고 애쓰게 되었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인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거나 온전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누명 아닌 누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20세기말부터 시작되어, 특히 선진국에서는, 상식이 될 정도로 편만해진 기류다. 


지금은 이런 기류를 비판적으로 보는 부류가 급속하게 많아졌다. 돈과 현대 의학의 결탁이 만들어낸 괴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조력사, 안락사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법제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 분위기의 일환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간성이 소거된 의사의 관점이 아닌 인간다움을 간직한 인간의 관점을 되살리는 시도를 통해 좋은 죽음과 그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여정을 좋은 삶으로 마무리하는 것의 중요성을 짚어낸다. 


저자는 단순한 생명 연장이 생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밝힌다. 인간은 스스로가 혼자 설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지는 노년의 시기에도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이 보장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의학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건강 상의 안전이 결코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도 충실하게 입증해 낸다. 인간은 단지 숨을 쉬고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노쇠의 시기에 도둑처럼 찾아오는 무료함과 외로움과 무력감을 극복하는 해결책은 현대 의학이 풀 수 없는 영역임을 반박할 수 없게 밝혀낸다. 인간은 몸만 가진 게 아니라 마음과 영혼도 함께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은 후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의학적인 의사 결정은 크게 실패를 했고 죽음이라는 주제를 피하느라 환자들에게 오히려 해를 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허를 찌르는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하기 어려운 질문에 봉착하고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쓴다.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고치려 애써야 할 때는 언제이고, 그러지 말아야 할 때는 언제일까?"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어떤 전율을 느꼈다. 현대 의학을 대표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하기 힘든 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책의 투명성과 객관성, 그리고 진정성을 반증하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의료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도 꼭 읽어야 하는 책임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며 느낀 소회와 함께 앞에서 다뤘던 주제들을 몸소 체감한다. 나는 이 대목을 이 책의 꽃이라고 보는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의사라는 정체성과 한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서로 연합을 이루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이론과 실제의 연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차가운 메스가 떠오르는 기계 같은 의술이 아닌 따뜻한 인간다움이 묻어나는, 그래서 사람 살리는 본래 목적에 충실한 의술의 중요성을 소리 없이 강하게 외치는 완벽한 마무리로 보였다. 그렇다. 저자가 쓴 대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현대 의학의 공급자와 수혜자(잠정적 수혜자 포함) 할 것 없이 이 책의 중심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강하게 울려 퍼질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사고로 인한 즉사가 아닌 한 누구나 노화와 노쇠를 겪으며 고통을 감내하며 몸과 마음이 체계적으로 하나둘씩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 책 뒤표지에 쓰인 문장이다. 수십 번 읽어도 여운이 남는다.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다.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인 그믐을 통해 (특히 교모세포종 재발로 인해 두 번째 수술을 막 마치고 회복 중인 김새섬님과 남편인 장맥주님이 이끄시는 '웰다잉 오디세이 2026'을 통해) 알게 되고, 함께 읽게 되고, 함께 나누게 되어 더욱 기억에 남을 책이었다. 좋은 책은 나눠야 하는 법. 나는 어떻게든 이 책을 널리 알릴 생각이다. 나의 이 짧은 글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부키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뒷모습을 끌어안을 때까지


미셸 투르니에 저, '뒷모습'을 읽고


아주 가끔 뒷모습까지 보게 되는 사람이 있다. 뒷모습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혹은 미처 드러내지 못한 그 사람의 정직하고 순수한 모습, 그 사람의 여백, 그래서 더욱 은밀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나는 믿는다. 헤어진 이후 그 사람의 뒷모습을 좇는 건 바로 그 진실을 알고 싶어서다. 그 진실의 깊이와 풍성함을 간직하고 싶어서다. 


아래는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의 일부다. 뒷모습에 관한 글이다. 


| 뒷모습까지 도도한 사람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먼저 다시 만나자고 하진 않을 사람이다. 앞모습은 도도했지만 뒷모습은 외로워 보이는 사람도 있다.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다. 혼자 보내기가 괜히 미안해지는 사람이다. 마음에 남아 기도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앞모습은 약해 보여도 뒷모습은 씩씩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만나서 얘기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헤어질 때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은근히 놓이는 사람이 그렇다. 앞모습도 뒷모습도 모두 측은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무너져가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꾸는 앞모습까지도 손을 놓아버린 사람이다.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만날 때면 말은 줄고 마음은 바빠진다. 그럼에도 상대의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에 눈물이 날 것 같다. 결국엔 내 마음도 무너진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끌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볼 때면 나는 그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뒷모습을, 그의 모든 모습을 내 눈에, 내 마음에 정갈하게 담아두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


내가 느끼는 나의 뒷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부끄러운 내 과거의 모습들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 흔적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뒷모습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른 그 사람의 역사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청산은 없고 누적만 존재하는 공간이 뒷모습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현재와 미래의 내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리라. 


에두아르 부바가 찍은 사진에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붙인 글들의 모음집. 흑백사진이어도 좋다. 아니, 흑백사진이어서 더 좋다. 미셸 투르니에가 말하듯, 뒷모습은 참다운 비밀을 드러내고 있기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주체이기에. 생략, 은연중의 말, 빗대어하는 말, 암시의 세계이기에. 


내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좀 더 많이 봐둬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더 넉넉한 마음과 더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들의 뒷모습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후회, 외로움, 그리고 다짐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다시 읽고


이 소설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래서 주인공만이 아닌 나의 죽음도, 우리 모두의 죽음도 될 수 있는, 지극히 흔해빠진 죽음.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일까.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해진다. 완벽한 영점이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는 옳았다. '에브리맨'이 죽음에서 시작하는 건 필연으로 보인다.


이번엔 6년 전 처음 읽을 때보다 더 천천히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씹으면서 읽었다. 이렇다 할 중심 서사가 부재하기에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줄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필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여러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발견하고 작가 노트에 옮길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이게 인생이구나 싶었다. 삶의 끝까지 다녀온 기분이었다.


그는 보석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보다 상대적으로 허약한 체질로 평생을 살았다. 때문에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수술실에서는 나오지 못했다. 한창일 땐 유명 광고 회사의 아트 디렉터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세 번 결혼했고, 세 번 이혼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들은 평생 그를 원망했다. 장례식에 와서도 아무런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분노를 삭이지 못한 듯 마지막 인사를 겨우 건넬 뿐이었다. 두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 낸시는 끝까지 그를 사랑해 준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모든 장례식을 준비한 사람도 낸시였다. 그는 어떻게 낸시 같은 아이가 자기 딸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운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그랬다. 낸시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가 그럴 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낸시의 착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가 들어가 있는 관 뚜껑 위로 낸시가 흙을 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이미 죽은 그에게는 소용없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 입을 빌려 자기에게 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성공한 미국인이 그렇듯 바람을 피웠다. 유독 여자의 육체에 약했다. 불륜이 가져온 불행은 그의 인생 전체에 깃들었다. 굳이 이해하려 들자면, 그가 일해서 번 많은 돈을 탓할 수도 있고, 형과는 다른 나름대로의 건강상 열등감이 허세로 잘못 표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의 불행은 그가 자초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몸과 마음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인 노년에 이르러 (내가 보기엔 너무 늦은 듯했지만)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가족을 해체한 장본인도 자기였고, 그 해체 때문에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자기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때 그가 사랑했던 사람도, 한때 그가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던 삶도 이미 모두 그를 등지거나 떠나간 상태였다. "너무 늦었어요!" 이 무시무시한 말은 그의 내적 상태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인해 도미노처럼 하나씩 무너져가는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낸 칠십 대 노인의 최후는 저 한 문장의 외침에 무너질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윤리적인 시선만으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주인공에게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나둘씩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지 않은가. 그것이 불륜이 아니더라도. 그의 불륜을 잘못된 충동으로 확장시켜 이해한다면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늦었어요!"라는 말 앞에서 당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있다. 이제 겨우 오십 대에 들어섰지만 칠십 대에 죽음 앞에 서 있던 그처럼 나도 후회하고 자책하고 원망하는 내 모습들을 기억한다. 어쩌면 이것들이 이 소설에 공감을 일으키는 주동력이 아니었을까. 죽음도 그렇지만, 죽음 앞에 섰을 때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상념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 '만약'을 생각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게 인간이 아닐까. 에브리맨, 모든 인간, 나,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


또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노년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들에서도 나는 외통수로 느닷없이 닥쳐오는 외로움과 슬픔을 맛보았다.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라는 문장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해가 갈수록 노쇠해지시는 부모님을 뵐 때마다 체감하게 되는 노화와 노쇠. 나 역시 건강을 챙기느라 예전보다 많은 시간과 돈을 쓰게 된다. 모험은 줄고 유지 보수에 급급한 삶으로 전환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주인공이 그랬듯 나도 무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다. 아이의 어릴 적 사진들을 괜스레 하나씩 클릭하며 몇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도, 예전에 끄적거렸던 일기 같은 글들을 들춰보는 것도 모두 그런 일련의 과정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필립 로스는, 비록 과도한 표현이지만, 노년은 전투라고, 아니 노년은 대학살이라고까지 말한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번뜩 들다가도 침묵하게 되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노년의 삶이 점점 늘어가는 이 시대와 나에게 닥친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지는 순간이었다. 


저자가 주인공을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죽게 만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불륜을 제외하면 주인공은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불륜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그가 자진해서 해체시켜 버린 가족 관계가 더 문제였다. 그가 마지막에 완벽한 고독 속에서 죽어갔던 이유는 그가 윤리적으로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 아닌 비행과 실수로 점철된 그의 중년의 삶이 그의 외로운 노년을 만든 주범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주인공을 이렇게 만들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충동과 그 충동 이후의 무책임한 행동들로 인해 죄책감에 짓눌리게 되고 외로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 이에 반하여, 다른 하나는 이 주인공을 거울삼아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을 더욱더 사랑하며 살도록 애쓰라는 것. 하지만 누가 모를까. 이 둘을 다 알면서도, 다시 말해 후자를 염원하면서도 전자에 머물게 되는 게 인간이지 않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노년의 삶이 조금은 더 아름다울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 때 더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여러 욕망들에 휘둘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만이 아니라 해야만 할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모든 사람이 이 다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것이 필립 로스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읽고: https://rtmodel.tistory.com/1148

*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다시 읽고: https://rtmodel.tistory.com/22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모든 이야기의 시작 - 신화에서 계시로
정우조 지음 / 지우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설교의 본보기


정우조 저, '모든 이야기의 시작, 신화에서 계시로'를 읽고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내가 창세기 관련 서적들을 섭렵했던 주된 이유는 창조기사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창조과학,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성경 해석이 불편했고, 나는 그것의 대안적 해석을 갈망했다. 이제는 창세기 1-2장에 소개되는 창조 순서와 방법이 내가 아는 과학 상식에 어긋나거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고 해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나의 신앙에는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은 반지성적인 입장을 취하겠다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초지성적인 선택이다. 지성적으로 충분히 따져보았고, 또 앞으로도 따져볼 의향이 있지만,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전제로 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신앙과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의 언어이며,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지혜로운 분별을 하겠다는 뜻이다). 


창조기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나 문자적으로 믿으려는 시도도 모두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든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다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게 된다. 비록 일부 진영에서는 여전히 반지성적인 개인 및 집단이 야기하는 심각한 부작용 (크게는 신앙을 잃어버리기도)이 발생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도 창조에 관한 여러 의문점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다양한 해석들을 낳고 있다.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 남겨질 것 같다. 반지성적인 진영을 의지적으로 택하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소수의 무리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진영에 속하게 되어버린 다수의 신앙인들이 자기들의 해석만이 옳고 다른 해석들은 모두 틀렸다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이런 다양한 해석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를 더욱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창세기 1-11장, 그러니까 12장부터 등장하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본문을 신학에서는 원 역사라고 부른다. 창조기사가 등장하는 창세기 1-2장,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3장,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소개되는 4장,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보여주는 5장,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가 소개되는 6장, 홍수 심판과 노아가 지은 방주 안의 생명이 살아남는 7장, 노아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는 8장, 무지개 언약이 등장하는 9장, 노아의 후손들이 온 세상으로 확산되는 10장, 바벨탑 사건이 소개되는 11장까지, 성경을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이들마저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유명한 이야기들이 바로 이 책이 다루는 주요 본문이다. 


저자인 정우조 목사가 바라보는 성경의 원 역사의 주인공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을 인간이 반복해서 죄에 이끌린 나머지 폭력과 살인을 동원한 반역을 행하며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심판의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혜와 구원의 계획을 이어 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먼저 다시 한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또 감사할 수 있었다. 저자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고 느껴졌다. 


이 책은 어려운 신학책이 아니다. '바람직한 설교의 본보기'라고 할까. 충분히 신학적 함의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충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쓰여 있다. 회개라는 이름으로 성도의 죄책감을 자극하지도 않고, 은혜라는 이름으로 감정팔이에 머물지도 않으며,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남발하는, 의외로 많은 한국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준비 안 된 설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신학자들만의 놀이터에서 논의되는 논쟁적인 이야기들까지 가져와 소개하기도 하지만 결코 하나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적절한 선을 유지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을 풀어주는 성경교사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며칠에 걸쳐 설교를 듣듯 천천히 읽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은 저자의 시선으로 다시 숙지할 수 있었고, 잊었거나 처음 듣는 내용들은 읽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여러 곳에 체크 표시를 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해석 하나만 소개하자면 '네피림'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네피림은 창세기 6장에 소개되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지는 존재인데, 4절은 개역개정으로 이렇게 되어 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저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네피림은 고대의 신화적 존재라기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의 괴물 같다고, 지금도 존재하는 '세상의 지배계층'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셋의 후손들을 '신앙인'으로 치환한다면 네피림은 그 둘의 혼합이라고. 또한 이는 단순히 신자와 불신자 간의 결혼 문제에 비추어보는 정도의 주제가 아니라 경건한 신자를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게 될 때 일어나는 비극이라고,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가인의 자손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매우 세속적이고 탐욕에 물든 이들이 있다고, 그들이 바로 현실 세계의 네피림이라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더 악하고 폭력적이며 음란한, 위선과 가식으로 자신을 점철한 존재들이라고. 


네피림을 현재로 소환하는 저자의 해석을 읽으며 나는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고, 여러 번 읽으며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창세기 6장에 소개되는 네피림의 역사적 존재 여부를 파헤치거나 그들의 기원에 관련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정체를 밝히는 식으로의 접근이 아닌, 우리에게 쓰인 건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쓰였다는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의 본보기를 본 것 같아 마음에 감동이 되었다. 


5-6절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 지면에 있는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저자의 네피림에 대한 해석 덕분에 이 구절이 내겐 더 큰 은혜로 다가왔다. 네피림으로 살고 있었을지 모르는 나를 돌아보게 했고,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오늘도 거듭나기를 소망했다. 이런 예기치 못한 경험은 좋은 설교의 힘일 것이다. 


이 책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한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미리 읽어야 할 책은 없다. 성경과 함께 하루에 한두 꼭지씩 묵상하며 또 공부하며 읽어나가길 추천한다. 보다 깊고 풍성한 신앙으로 이끌어 줄 좋은 책이다. 


#지우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