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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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실격은 없다


다자이 오사무 저, ‘인간 실격’을 읽고.

세상을 탓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결말을 자살한 개인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폭력이다.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남모르는 마음고생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은 줄 안다. 이성과 논리가 힘을 잃어버리는 영역에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자살 충동의 유경험자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탓하며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대상은 세상이나 남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 혐오는 결국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어쩌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에게 자살은 자기혐오의 끝에 위치한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 누군가가 세상을 탓하며 술 한 잔 기울이고 있다면, 우린 차라리 안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탓하는 대상이 서서히 자기 자신으로 바뀌고, 또 그 방향이 마치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면, 그땐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파멸은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파멸이 자살이라는 가시적인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통한 마음으로 책을 마쳤다. 잠시지만,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도 느꼈고, 그렇게 큰 고뇌 없이 명랑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조금은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에 생사가 묘연해진 주인공 요조의 삶,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책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삶 앞에서 모처럼 나는 살아남은 자의 숙명적인 슬픔을 느낀다. 마치 무덤에 서 있는 기분이다. 입에선 쓴 내가 나는 것 같다.

주인공 요조는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이다. 동일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상상만으로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한 심리 묘사가 곳곳에 등장해서 요조와 다자이 오사무는 겹치는 부분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 자살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저 주워듣고 상상만 해본 사람과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에도 옮겨본 사람 간의 차이랄까.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자살 직전 혹은 이미 자살한 자의 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어 한기마저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책 뒤에 있는 짧은 해설을 읽다가 작가가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인생의 책’이라고 추천하기도 했고, 민음사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품인 데다가, 마침 알라딘 중고책으로 구매가 가능해서 얼마 전 다른 책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했다. 제목에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기 힘들겠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음산함, 자기혐오, 파멸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이렇게 제대로 살려낸 소설은 처음이었다. 자살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나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 스산함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이 묻어 나는 작품이었지만, 섬이 된 한 인간의 심리 묘사에 있어서 나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일본식으로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그 내용이 아무리 처절해도 궁극적으로는 대부분 구원을 빛을 비추는 데 반하여, 이 작품에선 구원과 같은 반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저 세상과 인간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 인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서히 술, 담배, 창녀, 마약의 힘에 눌려 파멸해 가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자살로 마무리를 지을 것 같았는데 저자는 내 예상과는 달리 주인공 요조의 운명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이게 어쩌면 단 한 가지 요조에 대한 저자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요조를 대신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마무리는 저자의 삶 자체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적고 보니 섬뜩하다.

주인공 요조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했던 것 같다. 사람을 생각할 때면 불안과 공포에 짓눌렸다. 이웃과 거의 대화도 못 나누고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고는 스스로 만족한 채 실행에 옮긴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던 그가 인간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익살’이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생각해 보면 섬뜩하기만 한 이율배반성이 긴장 가운데 극도로 표출된 사람이 바로 요조였던 것이다.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흔히 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길들여진다. 술과 담배와 여자, 그리고 나중엔 마약까지 손을 뻗친다. 그런데 요조가 이런 것들을 손댄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안에 속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순된 본능이 요조 안에서도 꿈틀대고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그가 선택한 방법이 하필 타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조의 삶과 그가 토로하는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타락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특히 그가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다는 표현 앞에선 더욱 그랬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비난의 화살을 요조가 아닌 세상으로 어느 정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 요조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들었다. 

요조는 합법적인 일이 아닌 비합법적인 일을 할 때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양지가 아닌 음지의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잠시 빠져 지낸 것도 공산당 사상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비합법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익살’이라는 어설프고 서글프기까지 한 방법으로 세상과 사람과 연결되고자 했던 요조가 점점 더 섬이 되어 가면서 어두운 곳으로 은닉해서 위선과 음산함을 즐기게 되고 그 안에서 나름 편안함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요조는 자살을 떠올리게 된다. 자조와 자기혐오에 이어 결국 파멸의 끝에 다다른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 즉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소설 중간중간에 요조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등장하는데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면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 차리기를 꼬집는 요조, 어느 정도 가식과 위선이 일상이 되어야만 ‘원활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눈치챈 요조, 그것들이 흔히 처세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요조. 어쩌면 요조는 가장 순수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의 파멸은 그가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순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자연스레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눈을 들어 내 주위를 살펴본다. 의도적 익살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음산한 속내를 감추고 명랑함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세상 탓에서 자기 탓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자살 직전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모든 인간이 스스로가 평등한 인간임을 인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처세술이라는 명목으로 가식과 위선으로 도배된 인간관계가 아닌 솔직함과 진정성이 투명하게 드러나서 모든 약자들도 마음 놓고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인간에게 실격이란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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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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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되는 삶, 기꺼이 끌어안는 삶

켄트 하루프 저, ‘축복 (Benediction)’을 읽고

밤 11시. 모두가 잠자리에 든 이 시간. 나는 언제나처럼 조그만 내 책상에 앉아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멀리서 기차 소리와 차 소리가 들리고, 가까이에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늘 우리 주위에 있지만, 귀 기울이지 않으면 좀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다.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소리들. 나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때론 진부하게 느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종종 이 평범함이 다름 아닌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어느새 내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게 되고, 감겼는지도 모르고 있던 내 내면의 눈이 열려 나를 돌아보게 된다. 깨어나는 순간이다. 영점이 재조정되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면 일상을 초월하는 순간도 일상 속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을 감사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그리고 다시 낮 동안 멋대로 규정지어버렸던 많은 것들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살아나는 순간이다. 부활의 순간이다. 일상에 제한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일상을 초월하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를 간직한 채 유한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모순이다. 매임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 유한에서 무한을 맛보는 것. 넘어서는 동시에 그 삶을 비로소 끌어안을 수 있는 것. Embrace. 축복은 지금, 여기, 이 유일한 시공간에 주어져있다.

이 책은 1943년에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간질성 폐질환 진단을 받은 그의 마지막 해 2014년까지, 작가가 된 이레 40년간 6편의 장편소설을 쓴 작가 켄트 하루프의 5번째 작품이자 내가 읽은 2번째 작품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내가 읽은 첫 작품인 ‘밤에 우리 영혼은’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켄트 하루프에게서 존 윌리엄스의 냄새가 난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서 나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의 향기를 맡았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 듯하다. 나는 ‘스토너’를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평범한 삶’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에 비해 ‘축복’은 똑같이 평범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리고 분열과 고독이 부재하지도 그것을 작가가 무시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지만, 작가는 그것들을 축복의 조각들로 채색해 낸다. ‘스토너’가 조용한 절망을 남겼다면, ’축복‘은 살짝 우수가 깃들긴 하지만 여전히 감사가 머물고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는 소중한 우리들의 일상의 단면에 묵묵히 빛을 비춘다. 그래서 ‘스토너’가 긴 한숨을 쉬게 만들고 우리를 멈추게 한다면, ‘축복’은 눈물을 한번 훔치고 계속 살아내고 싶게 만든다. 차분한 눈으로 삶의 연속성을 바라보게 하고 그 삶을 끌어안게 한다. 요컨대 같은 삶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을 재해석해내는 작가의 눈의 온도가 다른 것이다. 

어쩌면 '축복’은 ‘스토너’보다 충분히 더 우울할 수도 있었다. 소설 초반부터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인물인 대드 루이스는 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채 집에서 소박하게 가족과 마지막을 보내는 77세 노인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보내는 몇 주 걸리지 않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이 작품의 중심 시공간이다. 대드 루이스는 집 안을 겨우 오갈 뿐이고 아내와 딸의 도움으로 침대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인물로 나올 뿐이지만, 그의 가족과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 그리고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응어리진 과거의 이야기들이 조곤조곤 소개되며 독자로 하여금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인생을 성찰하게 한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만이 아니라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의 향기도 맡을 수 있다. 아마 이런 류의 비슷한 소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작품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우리네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만화영화 ‘UP'의 인트로 부분을 보며 바보처럼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담담하게 그리는 인생을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하게 만드는 힘. 나는 이 힘이야말로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의 힘이라 믿는다. 물론 중년 정도의 나이가 되어야 좀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켄트 하루프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작정이다.

* 켄트 하루프 읽기
1. 밤에 우리 영혼은: https://rtmodel.tistory.com/1478
2.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1671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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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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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인간, 코미디 같은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80페이지 채 되지 않는 이 얇은 책은 세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에세이로 구성된다. 그중 가장 짧은 작품이 표제로 쓰인 ‘깊이에의 강요’이다. 수년 전에 이 책을 구입했을 때에도 나는 이 작품밖에 읽지 않았다. 다 읽는 데 십 분 채 걸리지 않는 이 소설은 의외로 여운이 강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주관적이고 무분별한 평가가 한 예술가를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깊이가 없다는 한 문장 때문에 저명한 예술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쫓노라면 씁쓸함이라는 자갈을 씹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씁쓸함의 정점은 자살 후 남겨진 예술작품을 같은 비평가가 깊이에의 강요가 느껴진다고 평가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우린 묻지 않을 수 없다. 깊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 만큼 무거운 것인가. 그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쉽게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질 만큼 가벼운 것인가. 깊이의 유무를 손바닥 뒤집듯 판단하는 비평가나, 그 비평가의 말을 퍼 나르는 사람들이나, 그 말들을 듣고 자멸에 이르는 예술가나, 이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도 존재하며 우리 내면에도 존재하는 실체다. ‘쉬운 판단’ 혹은 ‘무책임한 평가’ 등의 단어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조금만 더 생각을 확장해 보면, 어디 ‘깊이’라는 단어뿐이겠는가! 

두 번째 작품 ‘승부’는 길거리에서 체스 한 판을 두는 두 사람과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을 묘사한다. 한 사람은 이미 체스 고수로 알려진 정공법의 노장이다. 그에 대항하는 다른 한 사람은 예상 밖의 수를 두며 상대편은 물론 구경꾼에게도 뭔가 대단한 작전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청년이다. 실제로 그는 아무런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그가 한 짓이라곤 단지 침묵을 지키며 타자의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는 듯한 자세로 초지일관 체스에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너무도 단조롭게 패배하고 만다. 패배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파격적인 수는 무계획 혹은 모자란 계획일 뿐이었고, 그가 말이 없었던 건 타자의 심리를 파악하고 영웅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 혹은 무시일 뿐이었다. 알고 보면 코미디였던 것이다.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비춰지는 순간을 생각해 본다. 의외로 많은 경우 실상이 아닌 뭇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기반으로 한 허상이 실상으로 둔갑하는 순간들임을 확인한다. 이 작품이 내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해석은 욕망의 투영이기 쉽다는 것, 그것이 말없는 다수에 의해 이뤄질 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심리가 개인일 때와 다수일 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나는 과연 허상이 실상을 덮지 않도록 저 체스 게임 앞에서 군중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충분히 이성적일 수 있을까.

이어지는 소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나에겐 난해한 작품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상은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데 그 기작이 ‘조개화 (조개로 점차 변하는 과정)’라고 믿는 화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을 박식한 사람이라거나 들으면 아는 유명인들이 인정해줄 만큼 스스로가 위대한 사람 중 하나라고 자화자찬하며 작품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부터 결국 나중에 몸이 굳어버린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까지, 그리고 그가 후세에 전해야 할 숙명으로 여길 정도로 진지하게 뱉어내는 비밀스러운 깨달음이 결국 ‘세상의 조개화’라는 사실 앞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친구라고 소개된 저 유명한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소개된, 이 작품의 제사처럼 쓰인 짧은 글을 보면 화자 뮈사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루소는 이렇게 쓴다. “뮈사르는 끊임없이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자 열심이었으며, 이러한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다. …… 아주 기이하고 참혹한 병의 모습으로 죽음이 찾아와 그를 앗아 가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들은 결국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체계로, 즉 엉뚱한 것으로 압축되었을 것이다.” 나는 ‘특이한’이라는 단어와 ‘사로잡혀’라는 단어, 그리고 ‘엉뚱한’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뮈사르는 아무래도 정신분열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본인이 서두에 밝히듯 그에게도 친구가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나’라는 우물에서 빠져 나오도록 돕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거나, 적반하장으로 친구들이 자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파악했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술 취한 사람은 취했다고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세 단편소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인생과 인간이다. 씁쓸하기도 하고, 웃을 수만도 없고, 미쳤다며 손을 뗄 수만도 없는, 코미디 같은 장면들. 지금 나의 삶도 한 편의 코미디로 비치지 않을까. 

‘문학의 건망증’이라는 에세이는 책과 더불어 읽기와 쓰기에 대한 효용가치를 묻는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책 한 권으로 인생이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적어도 한두 번은 마주쳤을 것이다. 과연 그런 혁신을 불러 일으키는 한 권의 책이 존재할까. 혹시 그는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책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이 변화의 중추 아니었을까. 읽고 쓰는 반복된 행위가 과연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가. 실제로 한 달 전에 읽은 책의 줄거리도 등장인물의 이름도 우린 당연하다는 듯 잊어버리지 않는가. 어차피 잊어버릴 것들을 왜 우린 읽어야 하는가. 

자조적이고 시니컬한 뉘앙스가 지배적인 이 짧은 에세이 역시 인간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책과 읽기와 쓰기, 즉 문학이라 통칭되는 이 행위는 이미 문학을 넘어선다. 반복되는 일상과 가끔, 아주 가끔 찾아오는 영화 같은 순간들의 하모니.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꿀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 한 권이 깃든 일상은 그렇지 않은 일상과 다를 것이라 믿는다. 극적인 변화가 아닌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아주 느리고 느린 작은 변화를 나는 문학하는 행위에서 경험하고 있으며 문학이 없는 삶으로 회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어쩌면 변화를 기대하고 문학의 효용을 묻는 질문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것들’에 진리가 담긴다고 믿는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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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 소설은 한 사람을 알게 하는데 그게 나일 수 있다
이정일 지음 / 샘솟는기쁨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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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이정일 저,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을 읽고

두 전작 ‘문학은 어떻게 더 신앙을 깊게 만드는가‘,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와 함께 이 책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동일하다. 제목에서 문학이 소설로 바뀌었을 뿐 저자의 메시지는 반복된다. 문학이 기독교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스도인이자 아마추어 문학도, 그리고 본업인 과학 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이런 반복된 메시지가 여전히, 항상 반갑다. 저자와 같은 이유로 나 역시 진지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성경 읽기와 더불어 문학 (그중에서도 고전문학) 읽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작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 모임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저자의 첫 저서를 손에 들고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그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저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만 해도 전율과 희열을 느낄 수 있는데, 저자는 나와는 달리 문학박사에다가 목사이기에 문학과 신학에서 아마추어에 불과한 나는 저자의 깊고 풍성한, 그리고 간결하고 정리된 목소리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저서인 이 책에서도 나는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학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통찰, 그리고 먼저 맛본 자의 혜안이 그의 신앙과 함께 여과 없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자의 첫 저서를 첫사랑처럼 사랑하는 나에게는 두 번째 저서와 세 번째 저서가 부록으로 여겨지지만, 그 어느 책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문학이 기독교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시작점으로 이 책을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궁극적인 바람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저자의 메시지에만 귀 기울이는 게 아니라 실제 삶에서 문학을 읽어나가면서 신앙의 깊이와 풍성함을 직접 맛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정일 읽기
1.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https://rtmodel.tistory.com/1167
2.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https://rtmodel.tistory.com/1444
3.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https://rtmodel.tistory.com/1754

#샘솟는기쁨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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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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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에 맞지 않은 새로운 음식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일독 및 재독 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용기 내어 한두 권 읽어보는 것도 절대 게을리하지 말라고 나는 문학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전자는 깊이를, 후자는 풍성함을 배가시키는 훌륭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깊이와 풍성함, 이 두 가지는 문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으며, 문학이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문학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까지도 포괄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라는 칠레 작가를 처음 만났다.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이 작품을 들었고, 작품 제목에 나온 '네루다'라는 이름이 내 입에 착 감기기도 했으며, 내가 알고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칠레 시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와 동인인물인지 궁금했던 차에 마침 중고책을 구할 기회가 주어졌었다. 부담 없는 분량은 물론 첫 몇 페이지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문체가 매력적이어서 두 시간 정도에 다 읽어버렸다. 


감명 깊었다는 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비록 실존 인물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와 실제 칠레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무게를 더하긴 하지만, 깊은 공감을 할 수는 없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네루다와 칠레를 이름으로만 듣고 교과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나의 좁은 지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거꾸로 읽으면 이 작품을 좀 더 깊이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네루다와 칠레에 대한 정보를 미리 공부를 하고 이 책을 시작한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공감의 한도가 높을 거라 생각한다. 네루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시를 썼는지, 20세기 중반 칠레의 정치, 문화, 사회적인 변화 등을 시간 내어 살펴본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배경 지식을 차치하고 이 책을 문학작품만으로 한정하고 볼 때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작가 스카르메타의 문체였다. 어찌 보면 조금은 품위가 떨어지는 듯하고, 또 어찌 보면 서민들의 말투와 생각을 박제라고 한 듯 사실적으로 옮겨놓은 것 같은 문장들이 내겐 낯설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다. 특히 성적인 부분에 관련된 묘사들 앞에서 나는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작가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그저 내가 가진 이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줄거리에 대해서는 딱히 나의 버튼을 누른 장면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엔 적지 않도록 한다. 이야기 진행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내겐 진부하기만 했다. 영화로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두 시간 정도 새로운 음식을 먹은 것 같은 기분이다. 그저 내 입맛에 맞지 않았을 뿐.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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