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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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인간, 코미디 같은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80페이지 채 되지 않는 이 얇은 책은 세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에세이로 구성된다. 그중 가장 짧은 작품이 표제로 쓰인 ‘깊이에의 강요’이다. 수년 전에 이 책을 구입했을 때에도 나는 이 작품밖에 읽지 않았다. 다 읽는 데 십 분 채 걸리지 않는 이 소설은 의외로 여운이 강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주관적이고 무분별한 평가가 한 예술가를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깊이가 없다는 한 문장 때문에 저명한 예술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쫓노라면 씁쓸함이라는 자갈을 씹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씁쓸함의 정점은 자살 후 남겨진 예술작품을 같은 비평가가 깊이에의 강요가 느껴진다고 평가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우린 묻지 않을 수 없다. 깊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 만큼 무거운 것인가. 그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쉽게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질 만큼 가벼운 것인가. 깊이의 유무를 손바닥 뒤집듯 판단하는 비평가나, 그 비평가의 말을 퍼 나르는 사람들이나, 그 말들을 듣고 자멸에 이르는 예술가나, 이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도 존재하며 우리 내면에도 존재하는 실체다. ‘쉬운 판단’ 혹은 ‘무책임한 평가’ 등의 단어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조금만 더 생각을 확장해 보면, 어디 ‘깊이’라는 단어뿐이겠는가! 

두 번째 작품 ‘승부’는 길거리에서 체스 한 판을 두는 두 사람과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을 묘사한다. 한 사람은 이미 체스 고수로 알려진 정공법의 노장이다. 그에 대항하는 다른 한 사람은 예상 밖의 수를 두며 상대편은 물론 구경꾼에게도 뭔가 대단한 작전이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청년이다. 실제로 그는 아무런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그가 한 짓이라곤 단지 침묵을 지키며 타자의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는 듯한 자세로 초지일관 체스에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너무도 단조롭게 패배하고 만다. 패배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파격적인 수는 무계획 혹은 모자란 계획일 뿐이었고, 그가 말이 없었던 건 타자의 심리를 파악하고 영웅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 혹은 무시일 뿐이었다. 알고 보면 코미디였던 것이다.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비춰지는 순간을 생각해 본다. 의외로 많은 경우 실상이 아닌 뭇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기반으로 한 허상이 실상으로 둔갑하는 순간들임을 확인한다. 이 작품이 내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해석은 욕망의 투영이기 쉽다는 것, 그것이 말없는 다수에 의해 이뤄질 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심리가 개인일 때와 다수일 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나는 과연 허상이 실상을 덮지 않도록 저 체스 게임 앞에서 군중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충분히 이성적일 수 있을까.

이어지는 소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나에겐 난해한 작품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세상은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데 그 기작이 ‘조개화 (조개로 점차 변하는 과정)’라고 믿는 화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을 박식한 사람이라거나 들으면 아는 유명인들이 인정해줄 만큼 스스로가 위대한 사람 중 하나라고 자화자찬하며 작품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부터 결국 나중에 몸이 굳어버린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까지, 그리고 그가 후세에 전해야 할 숙명으로 여길 정도로 진지하게 뱉어내는 비밀스러운 깨달음이 결국 ‘세상의 조개화’라는 사실 앞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친구라고 소개된 저 유명한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소개된, 이 작품의 제사처럼 쓰인 짧은 글을 보면 화자 뮈사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루소는 이렇게 쓴다. “뮈사르는 끊임없이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자 열심이었으며, 이러한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다. …… 아주 기이하고 참혹한 병의 모습으로 죽음이 찾아와 그를 앗아 가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들은 결국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체계로, 즉 엉뚱한 것으로 압축되었을 것이다.” 나는 ‘특이한’이라는 단어와 ‘사로잡혀’라는 단어, 그리고 ‘엉뚱한’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뮈사르는 아무래도 정신분열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본인이 서두에 밝히듯 그에게도 친구가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나’라는 우물에서 빠져 나오도록 돕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거나, 적반하장으로 친구들이 자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파악했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술 취한 사람은 취했다고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세 단편소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인생과 인간이다. 씁쓸하기도 하고, 웃을 수만도 없고, 미쳤다며 손을 뗄 수만도 없는, 코미디 같은 장면들. 지금 나의 삶도 한 편의 코미디로 비치지 않을까. 

‘문학의 건망증’이라는 에세이는 책과 더불어 읽기와 쓰기에 대한 효용가치를 묻는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책 한 권으로 인생이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적어도 한두 번은 마주쳤을 것이다. 과연 그런 혁신을 불러 일으키는 한 권의 책이 존재할까. 혹시 그는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책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이 변화의 중추 아니었을까. 읽고 쓰는 반복된 행위가 과연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가. 실제로 한 달 전에 읽은 책의 줄거리도 등장인물의 이름도 우린 당연하다는 듯 잊어버리지 않는가. 어차피 잊어버릴 것들을 왜 우린 읽어야 하는가. 

자조적이고 시니컬한 뉘앙스가 지배적인 이 짧은 에세이 역시 인간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책과 읽기와 쓰기, 즉 문학이라 통칭되는 이 행위는 이미 문학을 넘어선다. 반복되는 일상과 가끔, 아주 가끔 찾아오는 영화 같은 순간들의 하모니.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꿀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 한 권이 깃든 일상은 그렇지 않은 일상과 다를 것이라 믿는다. 극적인 변화가 아닌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아주 느리고 느린 작은 변화를 나는 문학하는 행위에서 경험하고 있으며 문학이 없는 삶으로 회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어쩌면 변화를 기대하고 문학의 효용을 묻는 질문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것들’에 진리가 담긴다고 믿는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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