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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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되는 삶, 기꺼이 끌어안는 삶

켄트 하루프 저, ‘축복 (Benediction)’을 읽고

밤 11시. 모두가 잠자리에 든 이 시간. 나는 언제나처럼 조그만 내 책상에 앉아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멀리서 기차 소리와 차 소리가 들리고, 가까이에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늘 우리 주위에 있지만, 귀 기울이지 않으면 좀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다.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소리들. 나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때론 진부하게 느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종종 이 평범함이 다름 아닌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어느새 내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게 되고, 감겼는지도 모르고 있던 내 내면의 눈이 열려 나를 돌아보게 된다. 깨어나는 순간이다. 영점이 재조정되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면 일상을 초월하는 순간도 일상 속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을 감사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그리고 다시 낮 동안 멋대로 규정지어버렸던 많은 것들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살아나는 순간이다. 부활의 순간이다. 일상에 제한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일상을 초월하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를 간직한 채 유한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모순이다. 매임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 유한에서 무한을 맛보는 것. 넘어서는 동시에 그 삶을 비로소 끌어안을 수 있는 것. Embrace. 축복은 지금, 여기, 이 유일한 시공간에 주어져있다.

이 책은 1943년에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간질성 폐질환 진단을 받은 그의 마지막 해 2014년까지, 작가가 된 이레 40년간 6편의 장편소설을 쓴 작가 켄트 하루프의 5번째 작품이자 내가 읽은 2번째 작품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내가 읽은 첫 작품인 ‘밤에 우리 영혼은’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켄트 하루프에게서 존 윌리엄스의 냄새가 난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서 나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의 향기를 맡았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 듯하다. 나는 ‘스토너’를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평범한 삶’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에 비해 ‘축복’은 똑같이 평범한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리고 분열과 고독이 부재하지도 그것을 작가가 무시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지만, 작가는 그것들을 축복의 조각들로 채색해 낸다. ‘스토너’가 조용한 절망을 남겼다면, ’축복‘은 살짝 우수가 깃들긴 하지만 여전히 감사가 머물고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는 소중한 우리들의 일상의 단면에 묵묵히 빛을 비춘다. 그래서 ‘스토너’가 긴 한숨을 쉬게 만들고 우리를 멈추게 한다면, ‘축복’은 눈물을 한번 훔치고 계속 살아내고 싶게 만든다. 차분한 눈으로 삶의 연속성을 바라보게 하고 그 삶을 끌어안게 한다. 요컨대 같은 삶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을 재해석해내는 작가의 눈의 온도가 다른 것이다. 

어쩌면 '축복’은 ‘스토너’보다 충분히 더 우울할 수도 있었다. 소설 초반부터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인물인 대드 루이스는 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채 집에서 소박하게 가족과 마지막을 보내는 77세 노인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보내는 몇 주 걸리지 않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이 작품의 중심 시공간이다. 대드 루이스는 집 안을 겨우 오갈 뿐이고 아내와 딸의 도움으로 침대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인물로 나올 뿐이지만, 그의 가족과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 그리고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응어리진 과거의 이야기들이 조곤조곤 소개되며 독자로 하여금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인생을 성찰하게 한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만이 아니라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의 향기도 맡을 수 있다. 아마 이런 류의 비슷한 소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작품들도 많을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우리네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만화영화 ‘UP'의 인트로 부분을 보며 바보처럼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담담하게 그리는 인생을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하게 만드는 힘. 나는 이 힘이야말로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의 힘이라 믿는다. 물론 중년 정도의 나이가 되어야 좀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켄트 하루프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작정이다.

* 켄트 하루프 읽기
1. 밤에 우리 영혼은: https://rtmodel.tistory.com/1478
2.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1671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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