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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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영웅의책과일상 270번째 감상문입니다. Yay!**

삶: 그림과 음악, 그리고 글

안드레이 마킨 저, ‘어느 삶의 음악’을 읽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글이 있다. 휘몰아치는 서사 위주의 (흔히 ‘페이지 터너’라 불리는)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 나는 언젠가부터 문장이 갖는 무게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 무게는 주관적인 해석의 산물이다). 문장의 무게는 그 문장이 담아내는 사건이나 상황의 무게에 있지 않고, 그 사건이나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글로 써내는 작가의 시선과 내면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일한 것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기계적인 묘사에 급급한 글을 써내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그 ‘순간’을 담아내는 글을 쓴다. 여기서의 ‘순간’이란 공감각적인 통찰의 반영이며, 그래서 고유하고 정확한 글을 요구한다. 그것은 즉흥적이라기보다는 관찰과 성찰을 거친 진한 열매일 때가 많고, 작가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무엇인가가 마침내 그 상황으로 인해 표출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무게를 가지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는 그 작가만의 색 (사상이나 관점 혹은 세계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을 갖기 마련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는 말은 곧 그 작가의 시선과 내면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어떤 글을 읽고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자극적인 사건이나 충격적인 상황 등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나는 이런 글을 ‘가볍다’고 표현한다) 글과 거리가 아주 먼 작품을 만났다. 가만히 멈추게 하고 가끔 책을 덮고 허공을 응시하게 만드는 이런 작품을 나는 사랑한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짧은 작품. 다 읽고 나면 글이 아닌, 그림과 함께 음악이 남는 작품. 누군가에게는 무미건조하기만 할 텍스트가 독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또 ‘듣게’ 하는, 이 오묘한 작품. 기억이 가지는 특유의 흐릿함에 묻어가며 표현되는 주인공 알렉세이 베르그의 기묘한 삶은 읽는 이에게는 잔잔한 향수의 옷을 입고 있지만, 가히 절망적이고 치열했던 한 개인의 서사다. 

숙청 대상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도망치던 그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피아노 연주가 계획된 이틀 전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잡혀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고 본능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피아니스트로 살 수 없게 된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베르그. 그는 전쟁 중 죽은 어떤 군인의 정체성을 입고 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행복했던 그는 전쟁의 참사로 인해 구부지고 터지고 꺾인 시체들 위를 걷게 된다. 그러한 기구한 나날들을 뒤로하고 어느날 피아노 앞에서 그는 그동안 숨어지내던 자신의 경계를 풀어버리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피아니스트의 정체성이 자유함과 함께 분출한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고, 그 치열하고 허망했던 시절을 이 책의 화자에게 들려준다. 

깊은 겨울날 우랄 지방의 어느 기차역에서 우연히 듣게 된 알렉세이 베르그의 삶. 그의 삶은 그림이었고 또 음악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화자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 그림도 음악도 눈보라에 휩싸인 채 조용히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지난 밤의 꿈처럼 화자의 글을 매개하여 들려온 어느 음악가의 삶. 어느 삶의 음악. 책을 덮고 사뭇 숙연해진 나는 글에 감사하게 된다. 베르그의 그림 같은, 음악 같은 삶을 존재하게 해준 화자의 글에 감사를 표하게 된다. 나도 그런 소중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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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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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충실한 설명, 여백의 부재

이승우 저, ‘생의 이면’을 읽고

너무 늦게 읽은 탓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 책을 이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일까. 몇몇 지인들에게 인생의 책으로 꼽히곤 하는 이승우의 ‘생의 이면’을 마침내 다 읽었지만, 나는 이렇다 할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기대가 컸던 탓일지도 모른다. 실망이 큰 걸 보면 말이다.

작가의 기독교 세계관이 녹아든 이 작품이 내게는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니,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한국적인 기독교 문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듯 싶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한국 기독교에 대한 실망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정도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뉘앙스가 반영된 문학이 내겐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만 더 강화시킨 것 같은 기분도 들어 괜히 모래를 씹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 작품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지 못한, 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작가의 문체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속에는 내가 실제로 밑줄을 그은 문장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문장들을 비롯해 다른 문장들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표현들로 이뤄져 있다고 느꼈다. 여백의 미학이랄까, ‘표현하지 않음의 표현함’이랄까 하는 신비가 부족한 것 같았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더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그렇게 세세하고 친절하게 다 설명해주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사람 내면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정신분석학자처럼 통찰해내어 문장으로, 때론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탁월하게 풀어내는 필력은 훌륭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이승우는 ’너무 친절했다.’ 마치 생의 ‘이면’을 ‘표면화’해버린 느낌이다. 비록 작품 속에는 여러 장치를 동원해 작가가 직접 드러나지 않게 해놨지만, 내 눈엔 그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작가로서도 이 작품을 읽었기 때문인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사항 때문에 나는 이 작품 속 줄거리 속으로 온전히 빠져들지 못했으며, 그 결과 실컷 무게만 잡았을 뿐 변죽만 울리는 꼴이 된 듯한 허무함과 아쉬움에 속을 달래야 했다. 이 작품을 ‘인생의 책’이라고 꼽거나, 이승우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감상문이 불편하게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만 이 글이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라는 점을 감안해주길 바랄 뿐이다.  

#문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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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하려던 말들 - 예수의 비유에 관한 성서학적·철학적 사색
김호경 지음 / 뜰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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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가 담고 있는 깊고 풍성한 진리의 말씀 맛보기

김호경 저, ‘예수가 하려던 말들’을 읽고

문장은 짧고 간결하며 거침이 없다. 그래서인지 힘이 느껴진다. 읽고 나면 마음도 시원해진다. 권력 혹은 재력의 눈치를 보느라 어중간한 경계에 서 있는 문장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극단적인 주장을 펴지도 않는다. 단호한 문장들 뒤에 묻어나는 저자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지 않고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호소력이 짙다. 이 책은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진리로 둔갑한 비진리의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급진적인 진리를 말하던 그 누군가를. 예수다. 예수일 것이다. 저자의 글은 어딘지 모르게 예수의 말과 닮았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들은 많은 비유로 이루어졌다. 일상을 소재로 하지만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오묘한 비유다. 전복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지 비유.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 비유. 나는 바로 여기에 예수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아무나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의 말들. 누구에게나 귀가 있지만, 진짜 귀가 있는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 그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말들. 예수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제목 ‘예수가 하려던 말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 김호경은 이 책에서 많은 비유들로 이루어진 예수의 말들이 가진 참 의미를 풀어준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신학 석/박사 학위를 소지한 신약학 교수답게 글을 풀어나가는 기술이 예사롭지 않다. 신학이 가지는 필연적인 딱딱함이 문학적 내공으로 인해 부드러워졌다고나 할까. 여느 신학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가독성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도 쓸 수 있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수준의 묵상이나 성찰의 에세이도 아니다. 열아홉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각 장은 충분히 훌륭한 한 편의 설교로 읽힐 수 있을 정도의 깊이를 가진다. 각 장은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비유를 하나씩 다룬다. 독립적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순서대로 읽길 권하고 싶다. 책 전체에 걸친 논리와 이야기의 전개가 여러 장에 걸쳐 통합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신학만이 아니다. 저자는 각 장에서 다루는 예수의 비유에 적합한 철학적인 개념을 하나씩 소개하며 예수가 하려던 급진적인 말들의 의미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풀어준다. 이를테면, 1장에서 저자는 회개를 설명하면서 후설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중지’를 소개한다. 회개는 여태껏 몸담아온 세상의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회개는 회심의 시작이다. ~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8장에서는 들뢰즈의 ‘리좀’을 설명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중앙집권적 체계가 아닌 ‘천 개의 고원’으로 이루어진, 개별적인 모든 존재의 차별 없는 존엄성이 보장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한편, 13장에서는 아렌트가 발견하고 정리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을 소개하며, 저자는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악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통찰해 낸다. 이외에도 저자는 베이컨, 레비나스, 소크라테스, 니체 등의 철학자가 정립한 핵심 개념들을 쉽게 풀어주면서 예수가 비유로 말한 메시지들의 의미를 해석해 준다. 문학과 신학과 철학의 하모니. 수작이다. 

사복음서를 지금까지 수십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말씀들이 있다는 건 언제나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나의 부주의함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개별적이고 상황적인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가 말한 비유들이 가지는, 신비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고유한 힘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금은 더 정리된 기분이다. 물론 저자의 해석 역시 진리가 아닌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해석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된다. 다음에 사복음서를 읽을 때 다시 들춰보며 내 부족한 신학적 지식과 좁은 생각 때문에 해석에서 제자리 걸음하거나 방황할 때 길잡이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뜰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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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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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고 낯설지만 매력적인 작품

윌리엄 포크너 저, ‘곰’을 읽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미국 현대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나는 이 작품 ‘곰’으로 처음 만났다. 포크너보다 5년 뒤에 태어난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나 ‘생쥐와 인간‘에서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기를 다뤘다면, 포크너는 이 작품에서 그보다 수십 년 앞선 19세기말, 노예제도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 현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시대상을 담아낸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은 영원성을 갖게 마련이고, 문학사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두 작가는 모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포크너는 1949년, 스타인벡은 1962년에 상을 받았다. 참고로, 또 다른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 역시 노예제도로 얼룩진 흑인들의 아픔에 역사성을 부여하여 ‘빌러비드’라는 작품을 남겼고 199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읽은 미국 현대소설 대부분이 미국의 어두운 역사와 그것이 남긴 아픈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문학이 가지는 공적인 위치와 그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 역사, 허구성이 깃들은 역사가 실제 역사와 공명하여 이야기가 되고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이 메커니즘을 나는 신비라 부른다. 특히, 내 나라도 아닐뿐더러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시대와도 무관한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현실에 대해서 나라는 사람은 이 책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역사에 대해서 바늘 만한 정보조차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몰랐을 것이다. 문학이 가지는 강력한 힘을 나는 사랑한다.

처음 만난 포크너의 문체는 친절하지 않았다. 짬 시간에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다루는 주제의 무게 때문인지, 작가의 목소리 무게 때문인지 나는 이 길지 않은 작품을 읽으며 꽤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5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4장에서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길을 잃기도 했다. 시대와 문화라는 콘텍스트가 나와는 너무나도 상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이야기 전개만이 아니라 포크너의 문장은 맺고 끝냄에 있어서 명확한 구두점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읽어내는 데에 더 어려웠던 것 같다. 

4장을 빼면 나머지는 한 소년의 성장기로 읽을 수 있다. 제목 ‘곰’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실제 곰이다.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늙고 거대했던 올드벤이라는 이름을 가진 곰 한 마리. 소년을 포함한 일행은 매년 늦가을 사냥을 하러 숲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목적은 사냥이지만, 실제 목적은 올드벤을 잡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는 일은 마치 사냥의 들러리라도 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해를 거듭하며 사냥을 해도 올드벤은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전설이 되었으며, 이는 다음해에도 사냥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들은 올드벤을 잡고 싶어하는 동시에 잡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들이 매년 사냥을 나선 까닭은 어쩌면 올드벤이 여전히 잘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주인공 소년이 여전히 십 대일 때 올드벤은 결국 사냥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소년의 성장기 혹은 사냥 성공기로 읽는다면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리라 생각한다. 난해하기만 했던, 그리고 여전히 다 이해할 수 없는 4장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4장에 대한 나의 얇은 이해에 기반할 때, 그것의 해석이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지 않나 싶다. 곰 올드벤이 죽으면서 사냥 모임은 해체되고, 숲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되기 시작하고, 소년은 성인이 된다. 4장에서는 땅의 소유와 숲의 개발과 파괴에 이어 노예제도와 흑인에 대한 차별 이야기도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데,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곰 올드벤의 죽음이 있다. 나는 이 점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키라고 생각한다. 이 키 이벤트의 철학적 혹은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변화로 인해 작가 포크너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다. 

처음 읽은 포크너의 난해함이 낯설지만,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책장에 꽂힌 ‘고함과 분노’라는 작품도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포크너를 계속 읽어야 할지는 그때 가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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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기대는 시간 - 삶을 견디고 나를 마주하는 고전 읽기
정지우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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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외로움, 고독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내면의 성장

정지우 저,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읽고

페이스북을 통해 정지우 작가를 알게 된 지 5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그의 저서를 손에 들었다. 왜 이렇게 늦어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그가 페이스북 친구 중 가장 성실하게, 그것도 시선을 끌 만한 사진이나 단 몇 문장만으로 끝나는 글이 아닌, 몇 단락으로 이루어진, 완성도가 높은 데다 진정성까지 깃든 글을 포스팅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점에서 답을 찾는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이미 페이스북 포스팅을 통해 그의 글을 충분히 읽고 있다고 판단했었나 보다. 지난 5년간 그는 책을 여러 권 펴냈다. 그러는 동안 변호사라는 직업도 가졌다. 갓난아기였던 그의 아이도 제법 자랐을 것이다.

그의 저서 중 무엇을 읽어볼까 하다가 바로 이 책 ’고전에 기대는 시간‘을 고르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역시 서양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언젠가 그의 포스팅에서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라고 썼던 게 불현듯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난 나흘 간 나는 저녁 시간에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동태눈으로 세월아 네월아 숫자가 올라가는 계기판을 쳐다보지 않고 즐겁게 정신을 팔 수 있었다. 

이 책은 열두 편의 서양 고전 문학 작품을 읽고 독자로서 그가 남긴 흔적, 그리고 불안하기만 했던, 그래서 외롭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했던, 예비 작가 정지우의 이십 대 시절이 남긴 잔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 잔상이라 함은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이 쓰인 시점은 그가 서른을 넘긴 이후다.

열두 편의 작품 중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은 세 편밖에 없었다. 그가 읽은 양에 비해 내가 읽은 건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을 터인데, 전체의 사 분의 삼이나 읽은 작품이 겹치는 까닭은 아마도 그가 고른 작품이 상대적으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시 헤세를 읽었고, 그르니에를 읽었으며, 카뮈를 읽었다. 릴케와 지브란에 빠지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섭렵하기도 했다. 그가 책들과 보낸 이십대 시절은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이런 멋진 책을 써냄으로써 그는 뭇사람들이 거치는 과정에 ‘의미’라는 옷을 입혀 기념하고 기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을 펴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정서는 불안, 외로움, 고독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조그만 그의 자취방. 세상과 단절된 듯한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의 깊은 만남을 가졌던 듯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점은 외톨이로도 충분히 보일 수 있을 만한 상황의 표면이 아닌 그 이면에 초점을 맞춰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등진 듯한 모습으로 외롭고 불안했지만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는 깊은 심지를 영혼에 견고히 내렸으며 그러면서 내면의 성장, 성숙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을 통해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읽고 쓰는 삶’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시작과 젊은 날의 정신적 방황, 그리고 그런 것들을 꿋꿋이 견디며 주관과 객관에 균형을 이루어나가는 현실적인 모습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을 읽어나가며 그가 얻었던 위로와 평안과 만족을 느낄 수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미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나에겐 서른을 넘기며 이런 내면의 성장을 이뤄낸 정지우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마흔을 넘기면서 느끼고 깨달았던 많은 것들을 그는 서른을 넘기면서 모두 체험한 듯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포스팅에서 느꼈던 그의 내공은 뿌리가 깊었던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도 살펴볼까 한다. 

#을유문화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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