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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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고 낯설지만 매력적인 작품

윌리엄 포크너 저, ‘곰’을 읽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으며 미국 현대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나는 이 작품 ‘곰’으로 처음 만났다. 포크너보다 5년 뒤에 태어난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나 ‘생쥐와 인간‘에서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기를 다뤘다면, 포크너는 이 작품에서 그보다 수십 년 앞선 19세기말, 노예제도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 현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시대상을 담아낸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은 영원성을 갖게 마련이고, 문학사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두 작가는 모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포크너는 1949년, 스타인벡은 1962년에 상을 받았다. 참고로, 또 다른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 역시 노예제도로 얼룩진 흑인들의 아픔에 역사성을 부여하여 ‘빌러비드’라는 작품을 남겼고 199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읽은 미국 현대소설 대부분이 미국의 어두운 역사와 그것이 남긴 아픈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문학이 가지는 공적인 위치와 그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 역사, 허구성이 깃들은 역사가 실제 역사와 공명하여 이야기가 되고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이 메커니즘을 나는 신비라 부른다. 특히, 내 나라도 아닐뿐더러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시대와도 무관한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현실에 대해서 나라는 사람은 이 책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역사에 대해서 바늘 만한 정보조차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몰랐을 것이다. 문학이 가지는 강력한 힘을 나는 사랑한다.

처음 만난 포크너의 문체는 친절하지 않았다. 짬 시간에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다루는 주제의 무게 때문인지, 작가의 목소리 무게 때문인지 나는 이 길지 않은 작품을 읽으며 꽤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5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4장에서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길을 잃기도 했다. 시대와 문화라는 콘텍스트가 나와는 너무나도 상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이야기 전개만이 아니라 포크너의 문장은 맺고 끝냄에 있어서 명확한 구두점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읽어내는 데에 더 어려웠던 것 같다. 

4장을 빼면 나머지는 한 소년의 성장기로 읽을 수 있다. 제목 ‘곰’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실제 곰이다.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늙고 거대했던 올드벤이라는 이름을 가진 곰 한 마리. 소년을 포함한 일행은 매년 늦가을 사냥을 하러 숲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목적은 사냥이지만, 실제 목적은 올드벤을 잡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는 일은 마치 사냥의 들러리라도 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해를 거듭하며 사냥을 해도 올드벤은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전설이 되었으며, 이는 다음해에도 사냥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들은 올드벤을 잡고 싶어하는 동시에 잡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들이 매년 사냥을 나선 까닭은 어쩌면 올드벤이 여전히 잘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주인공 소년이 여전히 십 대일 때 올드벤은 결국 사냥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소년의 성장기 혹은 사냥 성공기로 읽는다면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리라 생각한다. 난해하기만 했던, 그리고 여전히 다 이해할 수 없는 4장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4장에 대한 나의 얇은 이해에 기반할 때, 그것의 해석이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지 않나 싶다. 곰 올드벤이 죽으면서 사냥 모임은 해체되고, 숲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되기 시작하고, 소년은 성인이 된다. 4장에서는 땅의 소유와 숲의 개발과 파괴에 이어 노예제도와 흑인에 대한 차별 이야기도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데,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곰 올드벤의 죽음이 있다. 나는 이 점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키라고 생각한다. 이 키 이벤트의 철학적 혹은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아직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변화로 인해 작가 포크너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는 점만은 확실한 것 같다. 

처음 읽은 포크너의 난해함이 낯설지만,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책장에 꽂힌 ‘고함과 분노’라는 작품도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포크너를 계속 읽어야 할지는 그때 가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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