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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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시스템에서 생명의 시스템으로

월터 브루그만 저, ‘안식일은 저항이다’를 읽고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불안과 강요와 배타주의와 과중한 일에 대한 저항, 아니 이 모든 것들을 생산해 내는, 아니 생산해 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브루그만은 안식일이 저항인 이유를 ‘안식일이 상품 생산과 소비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끝없는 욕망, 끝없는 생산, 끝없는 노동을 요구하는 물질주의, 즉 맘몬의 방식은 이미 우리 삶에 팽배해 있으며,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파라오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쉼으로 들어가는 것이 절박하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브루그만은 계속해서 말한다. 늘 불안에 떨며 더 많은 벽돌을 찍어 내려고 애쓰는 삶을 잠시라도 멈추면, 우리가 지는 짐은 가벼워지고 우리에게 지워진 멍에는 쉬워진다고. 그리고 예전과 같이 지금도 얼마든지 다른 삶을 즐기며 구가할 수 있다고. 요컨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체제로 돌입한 물질만능주의, 상품지상주의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이는 곧 구약의 안식일 정신을 지금, 여기에서 회복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브루그만은 우리가 저항해야 할 ‘죽음의 시스템’의 모델을 출애굽 이전의 ‘파라오 시스템’에서 찾는다. 이 시스템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나 동포를 천대할 수밖에 없고, 다른 이들이 위협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폭력에 가담할 수밖에 없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성관계를 상대를 학대하는 상품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면 그것을 강탈할 수밖에 없고, 이익을 얻으려고 왜곡과 말 돌려하기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탐욕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파라오 시스템에는 불안과 강요와 배타주의와 과중한 일이 일상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위협과 경쟁자만이 있을 뿐 이웃이 없었다. 그러나 야훼가 내리신 명령에는 파라오의 명령과 달리 사회에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 가운데 이웃이 들어 있고,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유지를 대담하게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이 기이한 요구는 이웃에게 쏟는 사랑으로 불안만을 야기하는 생산성 중심 풍조에 맞서라는 것이었다. 안식일의 핵심은 쉼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쉬셨듯, 우리도 쉴 수 있다. 아니, 쉬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쉴 때에는 우리 주위 이웃들도 쉴 수 있고, 또 쉬어야만 한다. 불안만을 야기하는 파라오 시스템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저항의 시스템은 곧 하나님의 안식일, 즉 쉼의 시스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시스템에 붙잡힐 필요가 없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받고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스스로 그 시스템에 붙잡혀 노예가 되어버렸다.


안식일은 단순한 쉼이나 단순한 멈춤을 넘어선다. 안식일은 강요와 경쟁에서 벗어나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연대성에 비추어 사회의 모든 삶을 재고해 보는 계기가 된다. 즉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혹은 피동적인 멈춤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멈춤이다. 이스라엘이,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안식일에 멈추고 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시스템에서 해방받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은 그것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탐욕의 지옥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지나 훨씬 더 후대의 본문인 이사야 56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논하며 모세의 옛 율법과 어긋나는 조치를 취하며 모세의 율법을 뒤집어엎기 시작한다. 배타주의를 거부하고 포용주의 원리를 강조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표지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결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사람다움을 지키도록 이웃과 더불어 일을 멈추고 쉬는 것만 언급한다. 일을 멈추라는 이 명령은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다. 동성애자, 여자, 남자, 흑인,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히스패닉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안식일을 지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모이는 자리에 모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은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다’는 개념을 부숴 버린다. 배타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브루그만은 여기서 덧붙인다. ‘선한 열매’는 안식일이 안겨 주는 평화를 누리는 것에서 생겨난다고 감히 생각한다고. 나 역시 동의한다. 피 묻은 피라미드 시스템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으려면 안식일이 있어야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이 돌아갔다. 모양은 다르지만, 다시 상품지상주의가 주가 되는 죽음의 시스템으로 복귀했다. 이는 이집트에서 건져내 주신 하나님을 잊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는 뜻이고, 더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을 만들어 내리라는 확신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집트 노예 때와는 달리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표면적으로는 지키면서도 상품을 획득하려는 탐욕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불안을 야기하고 강요와 착취를 일삼는 행위가 그치지 않은 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탐욕스러운 행위에는 불안과 강요과 착취라는 원동력이 있었고, 이것은 안식일 속으로 곧장 침투하여 안식일을 무너뜨려버렸다. 쉼을 누리는 위대한 축제는 말 그대로 쉼을 없애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육 간의 쉼을 누리는 마음과 생각과 실천에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쉼이 없는 안식일은 인간 안에 내재된 탐욕의 패턴을 그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탐욕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것이 그치지 않은 예배는 신실한 예배일 수 없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정의를 행하도록 이끌지 못하는 예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사는 엉터리 안식일일 뿐이었다. 아모스는 모든 이가 쉼을 누리는 안식일을 거부하는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까지 말했다. 이렇게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브루그만은 말한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나눈다는 사람이 내내 시계만 들여다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를 찬송한다는 자가 가난한 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동시다중 작업을 하면서 여기저기에 마음이 팔여 있다는 것은 진정 일을 그치고 쉬지 않는다는 말이요, 성공하려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탐욕에 빠져 무언가를 얻으려고 일하면서 동시에 인간다운 소통을 나누어 보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상품지상주의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진정한 표지다.”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십계명 전체와 연관 지어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아멘을 외치고 말았다. 브루그만은 탐심을 경계하는 열째 계명을 안식일을 지키라는 넷째 계명의 맥락 속에 놓고 탐욕이라는 죽음의 순환 고리를 끊어 버릴 방법을 고려한다.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은 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숭배와 탐심이 동일시되는 이유는 이 둘 모두가 실체를 살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식일은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자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까지 거부하는 것이다. 강력하고 죽음의 시스템에 전복적인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안식일은 탐욕의 힘을 깨뜨릴 실제적 바탕이자 탐욕을 제한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자 하는 공중의 의지를 만들어 낼 실제적 바탕이라고. 안식일은 불안을 물리치는 해독제라고. 안식일은 우리가 소유가 아니라 선물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당이요, 우리가 상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신실한 관계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당이라고. 그리고 그는 안식일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는 우리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며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파라오 시스템이 인간의 쉼 없는 탐욕이 바탕이 된 죽음의 시스템이라면 하나님의 안식일 시스템은 그것으로부터의 저항이자 대안이며 생명의 시스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브루그만은 안식일이 우상숭배와 탐심에 초점을 맞추는 거짓 욕구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본다. 우리의 번지르르한 욕구들이 거짓인지 모르는 이유는 쉼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안식일의 정신을 지키며 삶에서 쉼을 가져보는 것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를 실천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안에 어떤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쉬운 방법이라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도 나는 이를 기반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깊은 감사를 하게 된다. 안식일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도 늘 되새기고 그 정신을 실제 일상에서 살아내자고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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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법 - 엔도 슈사쿠의 행복론
엔도 슈사쿠 지음, 한유희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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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를 넘어서는 인생 에세이

엔도 슈사쿠 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읽고

인생 사는 노하우, 인간관계 잘하는 법 등의 처세술을 적어놓은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은 일찌감치 졸업했다. 진부한 원리를 마치 저자 혼자 알아낸 것처럼 호들갑 떨며 비결을 빙자하여 자기 자랑하는 꼴이 보기 싫었고, 거짓 겸손을 나름 우아하게 사용하며 토해낸 열변도 한낱 시공간에 제한된 특수한 상황 논리에 철저하게 좌우되는 단발적인 이벤트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은 책들도 있겠지만, 그런 걸 찾아내는 데에 나의 시간과 노력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읽을 것들은 언제나 넘쳐나 산을 이루고 있는데도 나는 그 높은 정상도 보지 못하는 저 아래 땅바닥에 붙어 있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읽지 못할 책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자기 계발서는 읽어야 할 목록에서 가장 먼저 제거되었다. 후회는커녕 독서에 막 입문하여 자기 계발서 따위에 시간과 돈을 탕진하고 있는 사람에게 적극 권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종류에 해당된다. 제목을 보라. ‘나를 사랑하는 법’. 그리고 부제도 마찬가지다. ‘엔도 슈사쿠의 행복론’. 책 표지만 보고도 가장 먼저 거르는 책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왜 이 책을, 비록 정독까진 하지 못했지만, 읽게 되었을까? 이유는 딱 하나.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은 총 셋인데, 모두 강렬한 인상과 진한 여운을 남기는 동시에 깊은 감동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침묵’, ‘침묵의 소리’, 그리고 ‘깊은 강’은 재독 리스트에 올라가 있으며, 한국 와서 재구입한 책에 속한다.


고백하자면, 이 책 ‘나를 사랑하는 법’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중고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구입하다가 무료배송을 위한 금액이 조금 모자라 원래 계획에 없던 책들 중 한 권을 더 사고자 충동적으로 여러 책들을 훑어보다가 단지 엔도 슈사쿠라는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엔도 슈사쿠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그냥 줘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뒤에 번역자가 쓴 ‘옮기고 나서’에 내가 이 책을 읽고 받은 인상이 간결하게 적혀 있다. 다음과 같다. 


‘…인생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중에 소개되고 있는 이와 비슷한 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엔도 슈사쿠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이 책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작가적 역량을 뒷받침해 주는 그만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단지 처세술이랍시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싸구려 자기 계발서가 아니다. 오히려 굴곡 많고 사연 많은 엔도 슈사쿠의 인생 여정을 절제된 톤으로 볼 수 있는 에세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어낸 사람, 전쟁 후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간 사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의 강권으로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 그러나 그것이 몸에 맞지 않은 양복임을 깨닫고 저항했던 사람, 그 저항의 방법이 옷을 벗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행히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본옷으로 재단하여 만들고자 시도했던 사람, 그렇게 하여 ‘침묵’이나 ‘깊은 강’과 같은 대작을 쓰게 되었던 사람, 엔도 슈사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 책에 쓰인 것과 비슷한 말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나는 엔도 슈사쿠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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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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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을 넘어 인간에 이르기까지


신형철 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는 믿음직한 나침반처럼 나는 독서와 독서 사이에 신형철의 글을 조금씩 꺼내 읽는다. 한꺼번에 다 읽기 아깝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랬다가는 나의 소화 능력을 초과하여 오줌만 노랗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것은 아끼고 싶은 법. 몇 꼭지씩 나눠 책과 책 사이에 읽자는 게 신형철의 글을 아끼는 나만의 방법이자 그의 글을 읽는 나만의 독법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완독하는 데에도 세 달 정도 걸렸다. 그 사이에 읽은 책도 족히 열 권은 넘을 것이다. 

소화 불량일 때 찾아 먹는 신뢰할 만한 소화제처럼 나는 쓰기 대비 읽기에 치우칠 때마다 신형철의 글을 찾아 읽는다. 능수능란하고 처세에 능한 수많은 어른들의 다양한 페르소나에 진이 빠질 때 때마침 눈에 들어온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것처럼 나는 읽기에 함몰되어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모를 때마다 신형철의 글을 읽는다. 그러면 막혔던 관이 뚫리고 정상적인 흐름을 되찾는 것처럼 나의 읽기의 영점도 재조정되곤 한다. 이것저것 열 권이 넘는 책을 허겁지겁 읽을 땐 몰랐다. 흐트러지고 복잡해진 나의 방향을.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읽기를 넘어 쓰기에 대한 방향도 선명해진다.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 그러나 이 책을 설명하기엔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신형철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 다음과 같이 써야 한다.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영화 평론.‘ 나는 영화 평론을 읽기 위해 이 책을 고른 게 아니다. 영화를 자주 보지도 않을뿐더러 영화에 대한 평론은 여태껏 한 번도 일부러 찾아 읽어본 적이 없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신형철의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영화 평론이 아닌 신형철의 글로써 이 책을 읽어서인지 나에게 이 책은 내가 읽은 신형철의 세 번째 책일 뿐이다. 참 아쉽게도 그의 저서는 몇 권 안 된다. 내가 읽지 않은 그의 두 저서 ‘몰락의 에티카’와 ‘느낌의 공동체’는 지금도 아주 느리게 아끼면서 읽어나가고 있다.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 덕분에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과 영화의 닮은 점이 좀 더 명료하게 보이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야기다. 내러티브, 혹은 스토리텔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참고로, 2014년 10월에 초판 1쇄를 찍고 2015년 3월에 7쇄를 찍은 이 책은 2012년 여름부터 2014년 봄까지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신형철의 스토리-텔링’이라는 타이틀로 매달 연재한 글들을 주로 모아 엮은 것이다. 총 네 주제로 구성되어 있고, 각 주제는 다섯 꼭지의 영화 평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에도 나와 있지만, 네 주제는 다음과 같다. 사랑, 욕망, 윤리, 그리고 성장. 이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 네 주제는 영화의 고유한 주제가 아니라 문학을 포함하는 인간들이 만드는 모든 이야기의 고유한 주제라는 사실을. 인간은 사랑하고, 욕망하고, 윤리를 어기거나 지키거나 혹은 그러려고 혹은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고, 갖은 어려움을 경험하며 내적인 성장을 이뤄낸다. 문학이나 영화는 모두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것으로써 존재한다. 위의 네 가지 키워드는 인간사를 요약한 네 단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것이 이 책, 그러니까 ‘영화평론가가 아닌 문학평론가가 쓴 영화 평론’의 고유한 장점이라 생각한다. 거기에다가 신형철이라는 독보적인 존재가 쓴 글이라는 점은 이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것 같다. 영화를 넘어 문학을 넘어 인간에 이르는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나 ‘인생의 역사’에서도 그랬던 것 같은데, 이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도 첫 번째 꼭지와 두 번째 꼭지 (혹은 세 번째 꼭지까지)에서 나는 숨을 참을 만큼 깊은 울림을 느꼈다. 여기서 그 울림이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울림이라는 것이 신형철을 많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이유이자 신형철만이 해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여기선 그저 그가 늘 강조하는 ‘정확함’이라는 단어밖엔 표현할 수 없어 감상문을 쓰는 나로선 답답할 뿐이다. 
 
신형철은 한 꼭지를 쓰기 위해 같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봤다고 한다. 글 하나에 담긴 보이지 않는 애씀과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함’의 깊이와 예리함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혹은 다르게 보이는 것들로 인해 그의 글도 그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이 가해졌을 것이다. 한 달에 한 꼭지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신형철은 그렇게나 노력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싶다. 정확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시간과 마음과 행위들. 글을 대할 때 조금 더 진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확한 사랑, 정확한 글을 위해서.

 

* 신형철 읽기

1.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1161

2. 인생의 역사: https://rtmodel.tistory.com/1525

3. 정확한 사랑의 실험: https://rtmodel.tistory.com/1654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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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도 믿음의 글들 24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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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관한 루이스의 생각

C. S. 루이스 저, ‘개인 기도’를 읽고

공동 기도가 아닌 개인 기도에 관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바라본 여러 의문점들과 그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 혹은 믿음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다. 자칫 가르치려 드는 자의 강압적인 뉘앙스를 피하기 위해 루이스는 말콤이라는 가상 인물을 설정하고 그에게 편지로 답을 하는 방식을 취한 듯하다. ‘루이스가 메리에게’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볼 수 있지만, 말콤은 메리보다는 신학 혹은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이 많은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루이스의 답장은 기독교의 교리나 문화 혹은 세계관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보다는 좀 더 세분화되고 전문적이라 할 수 있는 깊이까지 나아간다. 이 책의 장점은 평신도 입장에서 개인 기도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는 점이지만, 이것은 또한 이 책의 한계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에 적힌 루이스의 대답이나 설명이 기독교의 공통된 입장이라기보다는 신학과 철학과 문학에 능통한 한 평신도의 입장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속한 기독교는 영국 성공회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특히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 천국의 모습이나 기도의 능력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루이스가 편하게 쓴 개인적인 의견 정도로 보는 관점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이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말콤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서간체 형식을 빌려 이 책을 쓴 이유일 것이다. 

루이스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둥, 루이스의 책을 읽으면 혼란이 온다는 둥의 의견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평신도가 마음껏 상상하고 의견을 내놓는 모습이 나에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고 묻지 않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익명성의 비겁한 무리보다는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루이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루이스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당대와 후대 기독교인에게 남긴 건 실보다는 득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책에선 개인 기도 중에서도 청원 기도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을 이룬다. 전지하신 하나님에게 우리는 왜 청원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성만찬이나 몸의 부활 등의 성경적 지식과 교리에 이르기까지 루이스의 해박하고 일리 있는 친절한 설명을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밑줄 그으며 묵상할 만한 문장들도 많았다. 네 문장만 여기에 옮겨본다.

“균형 잡힌 마음상태는 기도로 구해야 할 축복 중 하나이지 기도할 때 입어야 하는 멋진 의상이 아니라네.”
루이스가 무심히 던진 이 문장을 읽고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아마도 자주 기도를 미루거나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는 나의 모습이 드러난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작은 일들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체면 때문일 듯싶네.”
이 문장 역시 읽고 나는 부끄러웠다. 기도를 어떤 어렵고 구별된 의식만으로 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와 기도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수 있었다.

“신비주의를 향한 나의 욕구는 물욕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사도 바울의 판단으로 보자면 ‘영’이 아니라 ‘육체’에 해당하네.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탐욕스러운 욕구가 있을 수 있는 거야.”
기독교는 신비하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위험하다. 나는 루이스처럼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면이 기독교의 중요한 부분이라 믿는다. 

“청원기도에 대해 너무 많이 쓴 것 같기도 해. 하지만 후회하지 않네. 그것이 올바른 출발점이거든.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도 하고. 나는 청원기도의 문을 지나지 않고서 더 높은 형태의 기도를 하거나 그런 기도를 논하려 드는 사람은 믿을 수 없네. 청원기도를 하지 않거나 경멸하는 것은 탁월한 거룩함의 표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하여 낮은 수준에서 만족한다는 표시일 수 있다고 보네.”
나는 이 문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솔직하게 나를 열고 어린아이처럼 간구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균형은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모든 신앙인에게 권하고 싶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도 좋아할 것이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홍성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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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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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함일지도 모르는 긴장 섞인 서먹함

슈테판 츠바이크 저, ‘과거로의 여행’을 읽고

한 남자가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그가 부인이라 부르는 한 여자를 만나 함께 기차를 타고 하이델베르크를 향한다. 두 사람 사이엔 애틋함일지도 모르는 긴장 섞인 서먹함이 감돈다. 이 묘한 감정은 사랑, 열정, 초조, 혼란, 그리고 자제가 낳은 열매이자 이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유지되는 감정선이다. 약 십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헤어지기 직전 금지된 사랑을 막 시작했었다. 그러나 남자의 멕시코 장기출장 때문에 둘은 반강제적으로 헤어져야만 했고, 마침 유럽에서 터진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별의 기간은 더 길어졌었다. 유일하게 둘을 이어주던 편지까지 전쟁 때문에 불가능해지면서 남자의 마음에선 점점 여자가 잊혀갔다. 남자는 멕시코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는다. 세월이 흘러 전쟁이 끝나자 남자의 마음속엔 다시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한동안 잊었던 여자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2년 뒤 남자는 업무회의차 베를린을 찾게 되고, 여자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의 남편이자 남자의 보스였던 사람은 이미 죽었고 여자는 혼자였다. 둘은 과연 십 년 전 못다 한 사랑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인가. 스포를 하지 않기 위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생략하기로 한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남자는 겸연쩍은 마음으로 잡은 호텔방에 간신히 부인과 함께 들어가지만 이내 답답함을 느끼고 탈출하듯 산책을 나와 회상에 잠긴다. 십 년 전 여자가 읽어주던 시가 떠올라 남자의 기억의 저장고를 열어젖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시는 예언과도 같았다. 다음과 같다. “얼어붙고 눈 내린 옛 공원에서 두 그림자가 과거의 흔적을 찾고 있구나.”

막 불이 붙었지만, 장작개비 하나 태우지 못했던 금지된 사랑이 십 년이라는 기간을 통과하며 어떻게 변모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단지 그 변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순간순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감정선에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결과보다는 과정이랄까.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도 알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을 갖는 작품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미완성이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독자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남자와 여자의 그 애틋하고도 서먹하고 도무지 어찌할 바 모르는 그 묘한 감정선을 함께 타며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미완성 이야기로 완성을 이룬 것이다.  

어찌 보면 삼류 연애소설 같은 냄새가 살짝 풍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이 작품은 너무 우아하다. 상상할 수 없는 시공간과 상황 속으로 나를 데려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힘. 나는 다시 한번 겸허한 마음으로 슈테판 츠바이크 앞에 서게 된다. 그의 전 작품을 읽을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귀재임이 틀림없다.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빛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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