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변현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기 만만한, 그러나 충분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을 읽고

2년 전, 도스토예프스키 5대 장편이라 불리는 후기 작품들을 다 읽고 나서 크게 다짐했던 게 하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작 읽기. 단,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붙였다. 내리읽지 않기. 어떤 한 작가에게 매료되면 그 작가의 작품 전체를 읽고 싶어 지게 된다. 대부분은 생각만으로 끝나지만, 간혹 소수의 독자들은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이렇게 실행에 옮긴 독자들 대부분의 행로는 내리읽는 것이다. 즉, 한동안 그 작가의 작품에만 빠져 지내기로 계획하는 것이다. 이런 몰입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그 작가의 필체에 너무 익숙해진다는 것, 그래서 그 작가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에 둔감해진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몰입해서 읽은 만큼 남은 작품이 점점 바닥난다는 것. 그 사라짐의 허탈함을 잘 알기에 나는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만은 그렇게 읽고 싶지 않았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아끼게 되는 법이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수년에 걸쳐 함께 하고 싶었다. 물론 쉽진 않았다.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을 의지로 버텨야 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작품 하나를 그만 까버리고 말았다. 2차 자료가 아닌 그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읽은 지 1년 만이니 그래도 괜찮겠다 싶었다. 이젠 그의 작품을 하나 읽고 나면 읽었던 작품 개수에 대한 뿌듯함보다는 아직 읽지 않고 남은 작품 개수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생애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를 연구한 세계 각지의 수많은 문학도들에 의해 대중에게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진 작가 중 하나다. 그가 살았던 집이나 도시, 가족 관계 등 세부적인 사정은 모르더라도, 그가 생계형 작가였다는 점 (석영중 교수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했다기보다는 무분별한 지출 습관 때문에 거의 평생을 돈이 부족한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두 번째 아내인 안나를 만나고 나서 이러한 사정이 나아졌다고 한다), 그를 연구한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크게 초기, 중기, 후기 세 부분으로 나눈다는 점, 그리고 그 기준점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뻬뜨라셰프스키 독서 서클에서 당시 금서였던 ‘고골에서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만으로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떠나야만 했던 시기라는 점은 기본적으로 숙지해두면 좋다. 초기는 시베리야 유형 가기 전, 중기는 4년 간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시베리아에서 군인 신분으로 강제 복무했던 4년과 모든 유형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재기를 준비하던 수년간의 짧은 기간, 그리고 후기는 그러한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그의 최대 걸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까지 이르는 시기로 이해하면 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은 모두 후기에 쓰였는데, 그의 철학, 신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적인 심오한 통찰이 빛을 발하게 된 배경에는 그의 유형 생활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 작품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은 중기 작품에 해당된다.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11 작품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읽어낼 수 있었던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스타일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인 까닭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그리 길지도 않거니와 (열린책들 판으로 달랑 348 페이지),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주 공간이 아저씨네 저택뿐이라는 점, 그리고 작품의 핵심이라고 보이는 두 인물 간의 비교 대조가 뚜렷하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장광설이나 자칫 3류 코미디 정도로 느껴질 수 있는 여러 당황스러운 장면들이 나와도,  혹은 러시아 문학 특유의 길고 복잡하고 다채로운 이름들이 등장해도 나는 당황하지 않고 즐기며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이제 처음 읽어보려고 하는 독자가 있다면 나는 이 작품을 주저 없이 추천하고 싶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난해하다고만 여겼던 스스로의 판단을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당장 내려놓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다른 작품에 비하면 가독성도 좋고 재미도 있으며 이해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빠른 시간 안에 완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철저하게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상이겠지만, 이 책으로 처음 도스토예프스키를 접하는 독자라도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었을 때와 비교해서 느껴지는 독특하고 색다른 (어쩌면 불편한) 느낌을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것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만큼 이 작품 안에는 압축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만의 필체가 살아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장광설을 포함하여 정신병자 아닌가 싶은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행동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장면들의 연속, 그러면서도 기가 막히게 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심리를 꿰뚫어 본 듯 그것을 날 것 그대로 끄집어내는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마 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특별한 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스타일이라 이해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5대 장편의 평균 분량이 약 천 페이지 정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350페이지 정도의 이 작품은 비록 장편 소설로 분류된다 하더라도 짧은 축에 속한다. 가장 복잡하고 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다양할 만큼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은 각기 고유한 캐릭터와 서사를 가진다. 그리고 그 서사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마침내 거대한 스케일의 산이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하여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은 단편적이다. 이야기는 화자인 세료자가 그의 아저씨이자 퇴역 대령인 예고르 일리치 로스따네프의 편지를 받고 그의 저택을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편지에 따르면 그 집에 포마 포미치라는 한 인물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료쟈는 자연스레 아저씨가 걱정되었고, 자신이 직접 그 집을 방문하여 문제를 확인하고자 했으며, 확인이 되면 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저씨인 예고르 일리치는 지주 (제목에 나오는 ‘스쩨빤치꼬보’ 마을의 지주)이자 그 집의 주인인데 반하여 포마 포미치라는 인물은 그저 식객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집에 실제로는 갑을 관계가 역전된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아저씨는 마치 ‘백치’의 미시낀 공작의 이미지를 언뜻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로 그려진다. 순진하고 착하고 남에게 해를 입힐 줄 모르며 언제나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을 하며 쩔쩔매는 고결한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반면, 포마 포미치는 그와 정반대의 이미지, 즉 위선적이고 허세를 떨기 좋아하며 그 허세로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부리는 동시에 언제나 자신이 모욕당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위를 불편하게 만드는 인물로 그려진다. 식객 같은 주인, 주인 같은 식객,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가 바로 이 작품의 화두다. 화자인 세료쟈는 전체 이야기의 전개에서 그리 중요하게 그려지진 않지만, 세밀한 관찰자로서 예고르 일리치와 포마 포미치, 이 두 인물 간의 차이를 조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재미있게도, 혹은 기발하게도 작품에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포마 포미치라는 인물이지만, 그 문제의 해결자 역시 포마 포미치다. 이런 역설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그러나 한편으론 사람의 심리를 깊게 통찰한 사람만이 가능한 시나리오는 그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를 피하기 위해 여기에 적진 않겠지만, 한 가지 힌트를 준다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연애 혹은 치정 (물론 돈, 도덕, 가난 등의 소재와 연결되어 있다. 단, 이 소설엔 살인이 등장하지 않는다)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다. 그러니 가볍게 마음을 먹고 충분히 재미를 느끼면서 이 작품을 쉽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꽤 많은 단편들을 합치면 아직 내가 읽지 않은 작품 수가 읽은 작품 수보다 많다. 물론 분량으로 따지면 훨씬 적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천천히 즐기기로 다짐했던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모처럼 만난 장광설과 그 특유의 황당무계함이 어찌나 반갑던지. 다음 작품은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기대가 되고 기다려진다. 하지만 끝까지 아끼면서 읽어나갈 것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9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도제희 지음 / 샘터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스토옙스키로부터 난데없는 위로를


도제희 저,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저자는 201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서 당선, 등단한 작가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풀어가는 솜씨가 훌륭하다. 직장에서 난데없이 퇴사한 이후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으며 치유를 경험한, 보기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책 소개란에 적힌 “물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 수영을 배운다면, 퇴사라는 인생의 수렁에서 저자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택한 생존법은 고전 읽기다”라는 문장이 내 이목을 사로잡았다. 사건과 상황만 다를 뿐 나 역시 인생의 낮은 점에서 책이라는 세상을 만난 후 궁극적으로 다다른 곳이 고전 문학이었고, 그 절박한 읽기를 통해 치유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나와 전혀 다른 필체를 구사하고, 관심 분야도 많이 다른 것 같고, 유일한 공통점은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탐독했다는 사실밖에 없는, 전혀 몰랐던 작가의 책을 나는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구매해버렸다.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읽어본 사람은 드문 도스토옙스키. 그의 작품은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이 분량에서부터 두꺼운 벽돌을 연상시키며 독자를 가뿐히 압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쉽게 외면을 받곤 한다. 그러나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경솔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도 벽돌 같은 외형만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어려운 내용이라 판단한다면 곤란하다. 용기를 내어 벽돌 뚜껑을 열고 일단 읽기 시작하면, 철학적이거나 학문적인 문장들이 아닌 3류 소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통속적인 문장들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를 도전하길 원하는 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한 마디는, 부디 벽돌에 눌리지 말고 뚜껑 한 장만 열고 몇 페이지만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라는 것이다. 이것만 실천에 옮겨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한 가지 더. 도스토옙스키는 통속에서 심오를 끌어내는 작가다. 이 점을 마음에 두고 통속을 즐기다 보면 어느덧 자연스레 심오의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독자들은 그저 통속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본인의 힘들었던 순간을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그와 함께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그 경험의 열매인 셈이다. 그러나 그에 따라 책의 내용도 힘들고 무거울 거라 예상한다면 큰 오산이다. 저자는 평범한 소시민인 듯하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대신하여 경험한 바를 잔잔한 에세이로 풀어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보고 듣고 만나고 겪은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들에서 퇴사라는 흔하지 않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상황과 사건에 걸맞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배경, 혹은 대사 등을 자연스레 연결시키면서 스무 편이 넘는 꼭지로 구성된 에세이를 풀어나간다. 갑의 자리보다는 을의 자리에서 바라본 세상을 글로 풀어내기에 도스토옙스키 만한 작가가 또 있을까 하고 개인적으로 나는 생각한다. 저자도 나도 낮고 누추하고 눅눅한 진창 같은 곳에서도 한 줄기 따스한 빛이 비친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은 유경험자이며, 그런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기에 도스토옙스키는 그야말로 정확한 표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난데없이 터져버린 사건과 상황, 난데없이 다가온 도스토옙스키. 혹시 아는가. 도스토옙스키는 또 다른 위로받을 독자를 위해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그 독자라 바로 당신일지.

#샘터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94599463918140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024470600931025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11384872239590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34426206602123
16. 닮은 듯 다른 우리 (by 김영웅):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57630130948397
17.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5027567450621330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8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5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주는 뜻밖의 위로


가즈오 이시구로 저,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을 읽고

몇 주째 지속되는 원인 불명의 불안 때문이었을까. 마침 읽고 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내 내면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명을 믿진 않지만 운명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공간을 향유하는 공감각적인 독서는 종종 독자를 과도한 자기 주관으로 이끌곤 한다.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그로 인해 조용히 위로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주관적인 해석을 부정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위로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니까. 마치 운명처럼 알 수 없는 이유와 이해하기 힘든 과정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니까.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선이 있다면 불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겐 불안의 시기를 함께 했던 고마운 친구로 기억될 이 작품은 중간중간 전지적 작가 시점을 병행하는 듯한 부분도 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술된다. 중년 남성인 주인공 라이더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피아니스트다. 800 페이지를 가뿐히 넘기는 분량을 가득 메운 자잘한 모든 이야기는 유럽의 어느 이름 모를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현재 그는 여느 유명한 음악인들처럼 세계를 돌며 연주 일정을 소화 중이다. 

표면적으로는 목요일 밤에 있을 공연 중 피아노 연주와 짧은 연설이 그가 이 도시를 방문한 주된 이유다. 소설은 그가 며칠간 묵을 호텔에 발을 디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유명세에 걸맞게 누군가의 환대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그 상황을 묘사한다. “나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심지어 프런트 직원마저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택시 운전사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라이더만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마저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장면인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이러한 어긋남에 대한 묘사로 할애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이 작품에 흐르는 전체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압축된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어긋남’ 혹은 ‘미끄러짐’ 정도가 아닐까. 특히, 카프카의 ‘성’을 읽어본 독자라면 내가 그랬듯 이 작품의 주인공 라이더와 ‘성’의 주인공 측량기사 K가 중첩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K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소설 끝까지 성 주위를 맴돈다. 마찬가지로 라이더 역시 일정에 있는 무언가를 실행하려고 할 때마다 그 도시에 거주하는 여러 사람들의 간섭과 사사로운 부탁 때문에 일이 계속 연착되고, 때론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일에 휘말리기도 하다가, 결국엔 자신이 이 도시로 온 주된 이유인 피아노 연주와 연설을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직면하게 된다. 닿으려고 하지만 닿을 수 없고, 계속해서 어긋나고 미끄러지기만 하는, 어찌 보면 마치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 같은 며칠 간의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이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는 이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남는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의도적으로 주인공 라이더의 과거 기억 속에 있는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과 상황의 파편들을 이 도시의 사람과 사물을 통해 형상화해 놓는다. 라이더를 건망증이 심한 인물 혹은 단편적인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인물로 해석해도 무방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이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를 철학적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할 입장이다. 나는 그런 입장보다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나 사물들이 주인공의 기억 혹은 과거의 상처와 맞물려 망령처럼 되살아나 주인공을 괴롭히고, 주인공은 그 과정을 불완전하게 처리하며 변화를 맞이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입장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명확한 해설을 내놓지 않지만, 처음으로 만난 짐꾼이 알고 보니 장인어른이고, 그 짐꾼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려 만나게 된 여자와 소년이 알고 보니 아내와 아들이며, 호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자니 갑자기 그 방이 자신이 어릴 적에 살던 집 안의 방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나, 주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과거에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는 사실 등, 자칫 어느 한 기억 상실증 환자의 섬뜩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해석하는 입장을 고수하다 보면 이 작품은 3류 소설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괴기스러운 실험작 정도의 작품으로 폄하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배경들을 주인공 라이더의 기억과 맞물린 비유나 상징으로 보고 그에 따라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가한다면 비록 관념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줄어들게 된다. 물론 가즈오 이시구로가 자신의 철학을 문학적 장치인 소설로 구현하려고 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앞에 언급한 두 입장 중 어느 하나만 옳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독자인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카프카적인 어긋남과 미끄러짐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다. 답답하기도 하고 묘연하기도 하며 다분히 환상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제목과는 상관없이 적잖이 위로가 된 작품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황혼을 노래한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에서 느꼈던 그의 고유한 필체를 이 작품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전 작품을 읽기로 작정했던 이유는 그 필체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목적에서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어긋남 때문에 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매력을 느낀 그의 필체는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의 최근 작품인 ‘클라라와 태양’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도 공히 다뤄지고 있는 소재는 바로 기억이다. 황혼 3부작의 주된 소재가 기억이라고 할 수 있고, 전혀 다른 필체로 쓰여진 이 작품에서조차 기억이 중심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기억을 요리조리 요리할 수 있는 작가로 기억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하나의 필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배울 게 정말 많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제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몇 안 남았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진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80748465303230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86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과 죽음, 신과 인간, 그 깊음에 대하여


엔도 슈사쿠 저, ‘깊은 강’을 읽고

이 작품의 저자 엔도 슈사쿠는 ‘침묵’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침묵’에서 말하고자 했던 침묵의 의미는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독되었다. 작품 ‘침묵’은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오래된 난제 중 하나인 신정론을 떠올리게 하는데, 많은 독자들에게 침묵은 곧 ‘하나님의 침묵’으로써, 이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고통 앞에서도 선뜻 구원의 손길을 베풀지 않으시고 끝까지 침묵을 고수하시는 하나님’의 의미로써 오해되었다. 아무리 작품이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고, 독자는 제2의 저자라고 하지만, 독자에게 저자의 의도가 완전히 반대로 해석된다면 그건 실로 난감한 상황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오해를 바로 잡고자 ‘침묵’ 출간 26년 후인 1992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그 작품에 대한 해제로써 ‘침묵의 소리’라는 책을 펴낸다. 거기서 그는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언급한다. 작품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챕터라고 할 수 있는 ‘기리시단 (Christian의 일본어 음역)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에게는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본의 경우에는 아예 누락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챕터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믿음이 강한 (?) 자만이 아닌,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아 겉으로 보기엔 배교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소위 믿음이 약한 (?) 자들의 신앙에 대한 저자 엔도 슈사쿠의 숨은 메시지가 드러난다. 

후미에를 밟았던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했고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간교하고 교활한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던져주었던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써 로드리고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챕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이 간직했던 (혹은 회복되었던)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그러므로 작품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의 의도는 ‘끝까지 침묵하시는 매정하고 야속한 하나님’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침묵의 소리’라는 표현의 의미였다.

엔도 슈사쿠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서양에서 건너온 기독교와는 달리 일본의 문화와 정신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일본인들이 (혹은 조금 더 넓게 본다면 동양인들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시에 정통 기독교 (혹은 C. S. 루이스의 표현대로라면 ‘순전한 기독교’)의 정신 혹은 본질을 견지할 수 있는 기독교를 원했다. 이성, 논리, 합리에 천착한 교리 위주의 서양식 관점으로 해석된 기독교는 일본인 엔도 슈사쿠가 보기엔 ‘몸에 맞지 않는 양복’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과 고민은 아마도 엔도의 평생 숙제였던 것 같다. 1923년생이었던 그는 1966년에 ‘침묵’을 출간하고,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94년에 마지막 장편소설이었던 이 작품 ‘깊은 강’에서도 그의 그러한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심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엔 주요 인물 총 다섯 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남남이며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인도 단체 여행을 계기로 우연히 모두 만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다섯 명이 모두 저자 엔도 슈사쿠의 부분적인 분신이라는 점이다. 엔도가 경험했던 과거의 편린들이 각 인물들의 과거 흔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사람이라면 저마다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이들 역시 그랬다. 함부로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에 의해 영향받고 지배받는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과거 이야기들. 살다 보면 어떤 예기치 못한 시공간이 불현듯 찾아와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했던 그 이야기들을 꺼내놓게 될 때가 있다. 이들 역시 그랬다. ‘깊은 강’, 즉 인도에 위치한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 흐르는 갠지스 강 앞에서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던 깊은 이야기들이 불거진다. 그 순간은 곧 자기 내면의 정직한 모습을 대면하는 순간이었고, 자기 자신이 조절할 수 없고 헤어릴 수 없는 그 무엇과 접촉하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깊은 강’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인간의 깊음과 그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의 깊음과 대면하는 곳.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엔도 슈사쿠의 깊은 고민의 열매로 직결된다. 특히 다섯 명 중 오쓰의 삶의 모습, 그의 말과 믿음과 행동에서 엔도의 메시지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오쓰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숙맥이라 오타쿠처럼 친구도 없고 홀로 진지한 철학, 신학적인 문제 (어쩌면 이는 우리 모두가 고민하는 삶과 죽음, 즉 인생의 문제로 해석 가능할 것이다)로 고민에 빠져 있다. 다섯 명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미쓰코는 주위 친구들에게 반쯤은 떠밀려 오쓰로 하여금 일탈을 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미쓰코에게 버림받게 된 오쓰는 그것을 계기로 신부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미쓰코는 오쓰를 신으로부터 훔치고 싶어 했고, 잠깐 성공한 듯싶었으나, 오히려 결국엔 신에게 더 가까이 가게 만든 결과를 내고 만 것이었다. 

미쓰코는 오쓰를 골려 주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것들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남자들과 동침도 하고 몸을 망가뜨려가며 일탈을 감행하면서도 늘 마음 한 편에서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미쓰코로 하여금 대학을 졸업하고 세월이 흘러서도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오쓰를 신혼여행 중 불쑥 찾아가게 만든다. 미쓰코에게 오쓰는 자신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무언가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쓰코는 이혼하고 나서도 자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프랑스를 떠나 인도 바라나시에서 거주한다는 오쓰를 찾아 나선다. 

오쓰는 프랑스까지 가서 신부가 되고자 애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논리, 이성,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점철된 서양식 기독교가 이질적으로 느껴져 도저히 양심 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유일신 사상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모든 것 안에도, 심지어 유대교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힌두교도에게도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다. 가톨릭 교회는 오쓰를 당연히 이단적인 사상으로 물든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고, 그 결과 그에게 신부 자격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쓰는 자신의 신앙관을 버리지 않고 신의 이름을 사랑과 동일하게 정의하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 밖에 속하는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주류 교회 안으로 편입되지 못했지만, 어쩌면 오쓰야말로 교회 안에서 엄숙하게 무게를 잡고 경건한 척하는 성직자들보다 예수를 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저자 엔도 슈사쿠는 오쓰의 이러한 모습에 자신을 신앙관을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종착지이자 저자 엔도 슈사쿠의 메시지가 농축된 갠지스 강은 삶과 죽음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진 곳이다. 한쪽에서는 성스러운 그 강에 온몸을 담그며 입을 헹구고 나와 브라만 승려에게 축복을 구한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곳으로 죽으러 오는 많은 사람들의 시체나 화장된 재가 뿌려진다. 강에 둥둥 떠다니는 죽음과 새로운 생을 기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역설적인 장소가 바로 갠지스 강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작품의 제목 ‘깊은 강’의 의미도 곧 삶과 죽음을 모두 아우르는 가장 깊은 곳,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자칫 오쓰의 신앙관이 범신론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한 것 같다. 저자는 오쓰로 하여금 직접 모든 것에도 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으로 해석해야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신이라는 의미인 반면, 범재신론은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므로 그 모든 것 안에는 신이 내재하며, 모든 것의 여집합도 신 안에 존재하므로 신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오쓰의 여러 대사와 행동들을 종합해 보면, 그의 입장은 범신론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범재신론적인 신앙관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는 서양식 기독교관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신론과 대비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에 오쓰는 주류 교회 안으로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 엔도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서양 기독교의 편협함을 넌지시 짚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의 의미는 범재신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세상 모든 걸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피조물 안에 거한다는 생각,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초월하시며 존재하신다는 생각. 과연 이런 생각이 정통 기독교에 반하는 것일까. 오쓰가 교회 안으로 수용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막연하게 ‘모든 것’ 혹은 ‘세상’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단지 타 종교인 ‘불교’나 ‘힌두교’라는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작품 속에는 뚜렷한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봄직한 주제 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덧붙여, 한 가지 꼭 일러두고 싶은 점은 이 작품이 종교적인 색채만을 띠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목을 집중할 수밖에 없을 간결하고 서정적이며 애잔함을 불러일으키는 필체로 쓰여있으며, 이런 필체는 소설 끝까지 지속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던지고는 있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써졌다고 봐야 한다. 신앙 서적도 신학 서적도 아닌 문학 서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자가 어떻게 소설을 구성했는지, 어떻게 사건과 상황을 묘사하고, 어떻게 서사를 이어가는지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누구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깊은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가 아닐까. 빨려 들어가는 소설, 생각을 깊게 해 볼 수 있는 소설이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엔도 슈사쿠 읽기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378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자의 신앙공부 - 생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과 신앙 이야기
김영웅 지음, 신현욱 그림 / 선율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직업이 과학자인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경험과 사유를 풀어놓은 에세이입니다. 전문 과학서도, 전문 신학서도 아닙니다. 이 책은 과학자이면서도 신앙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생물학자의 눈을 통해 본 신앙과 삶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