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 문학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지음 / 예책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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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인생과 신앙의 반려자이자 도우미


이정일 저,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를 읽고


이 책은 전작 (이정일 저,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과 맥을 같이 한다. 저자의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오랜 신앙적 경험을 토대로 문학이 인생과 신앙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차근차근 친절하게 들려준다. 전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특정한 아홉 편의 문학 작품을 선정하여 그것들을 중심으로 각 장을 구성한 것이다. 


놀랍게도 선정된 아홉 작품은 모두 현대 문학에 속한다. 가장 오래된 작품이 원서로는 1995년 작이다. 현대 문학보다 고전 문학을 더 사랑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지만, 고전을 잘 읽지 않는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춘 저자의 배려가 느껴져 나의 실망은 쉽게 누그러질 수 있었다. 또한 이 사실은 저자가 끊임없이 문학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문학에 대해 조곤조곤 풀어주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저자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공부는 언제나 힘이 있는 법이고 마땅히 칭찬받아야 한다.


문학 박사이자 목사인 저자의 정체성은 이 책을 관통한다. ‘문학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니. 내가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프로 과학자이자 아마추어 문학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저자의 세계관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전작에서도 들었던 인상이 이 책에서도 지속된 것을 보면, 저자가 쓴 두 책은 출판사의 기획 의도에 맞춰 써낸 것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열매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즉, 이 책은 저자의 생각이 아닌 삶을, 좋은 제안이 아닌 실제 증거를 담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문학과 인생과 신앙, 이 셋의 하모니와 시너지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고 저자와의 소통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다. 누군가는 이 문장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면 성경을 읽어야지 문학을 왜?, 라는 의문 아닌 의문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 이 문장의 방점은 “더”에 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다. 더욱 깊고 풍성하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만이 아닌 문학 읽기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함’이라는 디모데후서 3:16-17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나 역시 저자의 메시지에 100% 공감한다. 우린 문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성경을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만 읽어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도 된다. 이는 사실이다. 실제로 성경을 제대로 읽게 되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 모순된 부분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애써 이런 불편한 사실들을 외면하려고 하지 않는 솔직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만 읽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우리에게 목회자나 신학자와 같은 성경 선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그들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만 읽으면 된다고 경솔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거나, 읽어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문자적으로 수동적으로 읽었거나, 아니면 그저 목사들의 설교에서 인용되는 제한된 본문 정도만을 알고 자신이 성경을 읽고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의 성경 읽기 방법이 늘 우리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1 말씀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의심하고 질문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끊임없는 흔들림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자. 하나님을 정말 신뢰한다면 우리가 의심과 질문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비치는 과정에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런 면에서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도 크게 무리가 없지 않을까.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성경 읽기와 의심과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 중 성경 선생 역할을 훌륭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 신앙의 성장과정 중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가 육의 양식으로 밥을 매일 먹듯 영의 양식으로 성경을 매일 읽는다면, 우린 자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목회자나 신학자를 찾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풀리지 않고 누적된 여러 문제로 인해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을 가진 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일상이지도 모른다. 바로 이때다. 일상 속에서 언제나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도구.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선생이 되어줄 수 있는 문학. 저자는 책에서 지속적으로 말한다. 문학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충실한 반려자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도우미라고. 여전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은 독자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예책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44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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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록
서자선 지음 / 지우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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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무용성의 유용성


서자선 저, ‘읽기:록’을 읽고


‘읽기’는 크게 두 번에 걸쳐 우리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첫 번째는 언어와의 첫 만남에서다. 우리는 언어의 유입으로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 읽을 줄 알게 된다는 건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나만으로 가득 찼던 상상의 세계에서 타자와 세상이 함께 존재하는 풍성한 세계로 진입한다. 그 세계는 언어의 세계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언어의 법을 배우고 복종하고 또 내 것으로 삼게 된다. 두 번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과도 같은 인생의 전환점에서다. 이는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기회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책을 만나게 되는 시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 이전에도 글을 읽긴 읽었으나 그건 읽은 게 아니었다는 고백을 하게 될 정도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읽기의 기능과 효과를 기계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면화하여 자기 것으로 삼아 비로소 즐길 수 있게 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감히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독서 활동가이자 책 전도사, 그리고 알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유명인, 이 책의 저자인 서자선은 위에서 언급한 두 번째 전환점의 산 증인이다. 단순히 글을 읽을 수 있는 기계적인 단계를 지나 그녀는 읽기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잘 활용하는 단계도 거뜬히 넘어선 지 오래다. 그녀는 성실하게 지속한 읽기를 통해 읽기가 나와 타자와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깊게 깨닫고 그것의 유용성을 전도하는 자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나 역시 독자로서 그 선한 영향력을 입는다.


저자는 이 짧은 책에서 독서를 어떻게 시작했는지부터 시작해서 독서를 하는 이유, 어떤 저자들의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마지막으로 독서를 통해 어떤 변화를 경험했고 경험할 건지를 겸손하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무용하게만 보이는 독서의 힘, 이 무용성의 유용성을 아는 자들 중에 속한 나에게는 저자의 고백에 하나하나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 경험에서 묻어난 고백이기에 저자의 권고는 더욱 힘이 있다. 


이 책은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읽기 수월한 책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관심만 가진 분들도, 나아가 기독교와 상관없이 책 읽기와 나누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읽어도 큰 부담이 없을 것 같다. 저자가 문을 열거나 관여하고 있는 독서모임도 기독교 신자에게만 열려있지 않다. 나 역시 혼자 읽는 것과 함께 읽는 것의 차이를 잘 알기에, 나아가 어떤 하나의 카테고리에 갇히지 않고 열리고 풍성한 나눔에서 어떤 긍정적인 열매가 더 나타나는지 잘 알기에 이 역시 동의가 된다. 


기독교 신자로서 특별히 저자와 뜻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궁금한 게 생기면 스스로 질문하고 찾으려고 애쓰는 자세를 가지라는 권고다. 이 권고는 읽기라는 방법을 도저히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신앙/신학 서적은 목회자나 신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책 읽기라는 건전한 배움을 통해 더욱 깊고 풍성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작게는 개인 신앙의 회복, 크게는 한국교회의 회복과도 궤를 같이 하리라 믿는다. 사소하지만 지속할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읽기의 신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경험하길 기대한다.


#지우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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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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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부재와 결핍 속에서 피어난 사랑


크리스티앙 보뱅 저, ‘작은 파티 드레스’를 읽고


우리는 모두 태어남과 죽음 사이를 살아간다. 유년기를 거치며 성년기로 나아간다. 자크 라캉은 ‘에크리’에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재해석하며 ‘언어의 유입으로 인한 주체의 탄생’을 말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환영일지도 모를 그 모습을 따라 상상으로 자아를 구성하는 단계 (상상계)에 머물던 아이는 어느 날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면서 새로운 세계 (상징계)로 진입하며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상징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이자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을 인식하고 모든 관계를 맺는 세계다. 인간은 언어에 노출되고 그것의 법에 복종하면서 비로소 주체가 되는 것이다. 


거의 한 달 만에 손에 든, 귀국 후 처음 읽은 책은 한국 오자마자 선물 받은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 중 하나였다. 어느덧 읽기와 쓰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나에게 지난 한 달은 가혹했다. 금단현상이랄까. 똑같은 하루를 살아도 뭔가 중요한 것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내 가족과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 휑한 느낌은 여전했다. 그만큼 수년에 걸쳐 내 일상을 진하게 물들였던 읽기와 쓰기는 마치 공기나 물처럼 나를 그리고 내 삶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인정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성실한 지속의 힘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은 반복의 힘을. 여백과도 같은 일상의 힘을.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아주 잠시 곁눈으로 공부했던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이 떠오른 건 아마도 이 책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처음부터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아니다”였기 때문일 것이다. 보뱅은 유년기를 전체 인생에서 구분 짓는다.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그 무엇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했던 시기를 유년기로 본다. 보뱅에게 유년기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간직된 시기다. 무엇보다 유년기에는 책 (언어 혹은 글로 해석할 수도)이 없다. 그는 말한다. “독서라는 경이로운 애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무한한 공간이 바로 우리 자신이고,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유년기라고. 유년기의 아이는 어느 날 언어를 접하게 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유년기의 온전함은 상실된다. 대신 공포를 동반한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비록 맥락은 다르지만, 보뱅에게 있어서도 언어의 역할은 라캉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특히 글을 알게 된다는 것의 의미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지대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어, 즉 글 읽기를 통해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온다. 문자의 부재에서 문자의 바다로 건너온다.


온전한 자아가 간직된 시기가 유년기이기 때문에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올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아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커다란 상실이다. 이어서 기다림이 시작된다. 이 기다림은 어떤 특정한 것을 향하지 않는다. 그저 공기처럼 우리 안에 존재한다. 무와 기다림은 함께다. 보뱅은 말한다. “유년기가 끝나면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자신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자신을 향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너무나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간다. 사랑은 순수한 힘을 회복시키며, 근사한 것들의 소망이며, 하루하루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이며, 생명 그 자체이며, 우리의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순결한 아이의 얼굴을 되돌려준다. 그러다가 사랑도 떠나간다. 여기서 보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 자각이다.” 사랑이 떠나가면 세 동방박사가 찾아온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셋은 유년기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이 책은 서문과 아홉 편의 에세이로 엮어진 짧은 산문집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책, 읽기, 쓰기, 기다림, 침묵, 사랑 등이다. 읽기와 쓰기에 대한 내용이 정면에 드러난 부분을 제외하면, 분량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글이 다분히 관념적이어서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 기다림, 침묵, 사랑은 그 의미가 모호해서 이 단어들이 담긴 에세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조차 잘 와닿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저자가 쓴 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아홉 편의 에세이를 선택하고 엮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편집자의 취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인 크리스티앙 보뱅이 시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취한 태도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글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보는 방식, 마치 시를 읽듯, 분석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전체를 느끼면서 감상하는 방식으로 아홉 편의 에세이를 읽어 나가는 게 어쩌면 편집자의 숨은 요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책을 연이어 두 번 읽은 지금은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작품 전체를 시로 감상하기로 하고 두 번째로 읽은 후 드는 생각은 의외로 저자의 메시지가 명확하다는 점이었다. 보뱅은 단순히 읽기와 쓰기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시인의 감성과 깊은 통찰력을 가진 작가로서 노래하듯 글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인 우리는 그의 글에서 심오한 철학적인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확대해석으로 굳이 이 작품을 과대 포장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 나가다가 섬광처럼 가슴 깊숙이 어떤 문장에 찔리게 되면 책을 놓고 생각에 잠기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중간중간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읽기와 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문장들이어서 이것들을 읽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책은 나처럼 읽기와 쓰기를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다. 특히 이 문장들은 반짝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무게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읽고 나면 무언가가 반드시 남게 될 것이다. 이에 두 가지 문장만 맛보기로 소개해본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건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아, 이 역설! 부재와 결핍 속에서 피어난 사랑! 진정한 읽기와 쓰기의 시작과 끝!)


보뱅에 따르면, 글을 통해 유년기에서 성년기로 넘어온 우리는 자아의 상실을 겪고 난 이후 끝도 목적도 없는 기다림에 이르게 되지만, 이내 사랑이 찾아와 우리를 인도한다.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곧 사랑이 찾아온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하게 된다. 온전한 자아의 부재는 성숙한 자아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이를 매개하는 건 바로 글이다. 먼저는 읽기, 그리고 이어지는 쓰기. 보뱅의 말처럼 기계적인 읽기와 쓰기가 아닌 침묵을 기반으로 하는 읽기와 쓰기, 나 하나로만 가득 찬 읽기와 쓰기가 아닌 타자를 지향하는 읽기와 쓰기만이 진정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길에 동참하련다.


#1984BOOKS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7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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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3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혜경.심성보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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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정황이 문학의 상상력을 입을 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어’를 읽고
실화라고 운을 떼며 소설의 문을 여는 이 작품의 화자는 어느 날 이반 마뜨베이치 부부와 함께 악어를 구경하러 아케이드를 찾는다. 한 사람 당 25꼬뻬이까의 관람료까지 내며 들어간 전시장에서 그들을 맞이한 악어는 죽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얕은 물 웅덩이 속에 덩그러니 드러누워 있었다. 그 모습은 어느 누구에게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모두를 실망시켰다. 특히 악어 구경을 가장 먼저 제안했던 이반 마뜨뻬이치의 아내 엘레나 이바노브나로부터도 관심은커녕 혐오스럽다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자연스레 일행은 그 옆에 전시된 원숭이 우리로 재빨리 이동했다. 바로 그때였다.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본능적으로 몸을 돌린 일행은 끔찍한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옆에 있는 줄 알았던 이반 마뜨베이치는 악어에게 몸통이 반쯤 먹힌 채 공중에 들어 올려져 있었다. 그는 그 안에서 절망적으로 두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순식간에 악어 입 속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악어는 입 속에서 이반 마뜨베이치의 다리를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고, 잠시 그를 토하는 듯 싶더니 다시 그를 허리 위쪽까지 끌어올렸으며, 다시 약간 뱉어 냈다가 꿀꺽 삼켜 버렸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악어는 이반 마뜨베이치가 목에 걸렸는지 마지막으로 입을 잠시 한껏 벌렸는데, 일행은 그 괴물의 아가리 속에서 절망스러운 얼굴 표정을 지으며 순간적으로 악어 목구멍 위로 살짝 튀어나온 이반 마뜨베이치의 얼굴과 그의 얼굴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안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악어는 마지막으로 용을 써서 그를 완전히 삼켜 버리고 말았다.
위의 끔찍한 내용은 전체 6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단편소설 ‘악어’의 초반 여섯 페이지에 대한 요약이다. 가히 충격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화자는 이게 실화라고 밝히고 있으니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독자로서 멘붕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을 목도할 때 받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 그러나 숨을 가다듬고 몇 페이지만 더 읽게 되면 이것이 모두 도스토예프스키의 설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이 실화라고 밝혔던 건 저자가 아닌 화자였다는 점을 내가 간과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방점은 단순히 한 사람이 산 채로 악어에게 잡혀 먹히는 사건을 보도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에 있다. 당연히 이반 마뜨베이치의 아내는 악어의 배를 갈라 남편을 꺼내야 한다고 흥분하며 소리쳤다. 독자의 입장에서, 특히 화자에게 나를 투영하며 이 책을 읽던 나에게도 엘레나 이바노브나의 요구는 상식적이었고 당연한 수순 같아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악어 주인의 입장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치밀한 설계 덕분이겠지만, 책 속에서도 엘레나가 악어를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기 전에 악어 주인이 먼저 입을 열어 통곡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악어 주인은 두 손을 꼭 쥐고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오, 나의 악어, 나의 가장 사랑하는 카를르헨!” 그리고 악어 배를 가르자고 소리치는 엘레나를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가 악어를 약 올렸어요. 무엇 때문에 당신 남편은 악어를 약 올렸습니까! 카를르헨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당신이 물어내야 해요. 저놈은 나의 아들, 나의 하나뿐인 아들이란 말입니다!”
악어의 배를 빨리 갈라야 한다, 갈라봤자 이미 남편은 죽었을 텐데 뭐하러 가르냐, 등등의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놀랍게도 어디선가 갑자기 이반 마뜨베이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둔탁하고 가늘고 날카로웠다. 바로 악어 뱃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던 것이다! 아내는 “여보, 당신 살아 있었군요!”하면서 기뻐하고, 악어 주인은 산 사람을 뱃속에 가지고 있는 악어는 반드시 관광상품으로써 돈벌이가 될 것을 확신하며 기뻐한다. 엘레나와 악어 주인의 실랑이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반의 살아있음으로 해결이 된 셈이었다! 아,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 진정 도스토예프스키다운 장면일 것이다.
그 이후 실제로 악어 주인은 돈을 벌었고, 화자는 악어 뱃속에 들어앉아 있는 이반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이반의 말인즉슨 악어 뱃속에서의 삶이 만족스러우며 그 안에서 전 인류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는 완벽한 사회 체제를 구상할 수 있었고 진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갑자기 인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영웅이라도 된 듯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악어 뱃속에 들어가기 전엔 그저 평범한 관리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이 악어 뱃속에 들어가자 영웅이 되어버린 사건. 그러나, 그래 봤자 그가 처한 곳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캄캄하고 좁디좁은 악어 뱃속일 뿐! 아, 이 아이러니!
환상소설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상천외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 이 작품을 읽으며 우선 나는 놀랍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런 상상을 도입하여 작품을 쓴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 해설을 읽고 나서야 나는 이 작품이 1865년 당시 부르주아 자유주의 이념을 가진 급진주의자들을 조롱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세상은 악어 내부와 같이 어둡고 폐쇄된 공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그래서 현실과는 괴리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시대 정황을 고려한 이러한 해석을 읽으며 ‘아, 그렇구나’ 싶었지만, 나는 그러한 정치 풍자적인 관점보다는 작가의 상상력 관점에서 이 작품을 높이 사게 되었다. 적나라한 상황이 신문에 기재되면 한 순간에 머물고 말지만, 문학의 옷을 입고 재탄생하게 되면 이렇게 백 년이 넘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다시금 주목하게 된다. 문학의 힘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작품으로 만난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새로운 면모를 마주하며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매료된다. 배울 게 정말 많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3894599463918140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024470600931025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811384872239590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posts/4834426206602123
16. 닮은 듯 다른 우리 (by 김영웅):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4857630130948397
17.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5027567450621330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436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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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3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혜경.심성보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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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속에 빛난 고결함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몽 같은 이야기’를 읽고

도스토예프스키 전작 읽기도 분량으로 따지자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호흡이 긴 장편을 선호하는 취향 덕에 그의 작품 중 장편을 먼저 다 읽고 이젠 중단편을 아쉬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하나씩 까먹고 있다. 쉬이 없어질까 두려워 맛난 간식을 아껴먹으려는 아이처럼 나는 책장에 꽂힌, 의도적으로 아직 읽지 않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을 일주일에도 여러 번 손에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이전엔 몰랐다. 독서도 즐겁지만 아끼는 것도 즐겁다는 것을.

대부분의 도스토예프스키 중단편들은 책 한 권에 여러 작품이 실려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색을 감히 사랑하는 독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 읽기에 익숙하다. 하지만 자연스레 빨라지는 속도에 그대로 내 몸을 맡기지는 않는다. 저항하며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건 단순히 텍스트 읽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존경하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도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평가가 될 필요까지는 없다. 작품과 작가의 배경을 따로 공부하는 분석가가 될 필요도 없다. 다만,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문체, 이를테면 신랄하게 비꼬기, 어이없을 정도로 어리석게 행동하기, 섬뜩할 정도로 추악해지기, 그 가운데 고결한 구원의 작은 등불을 잊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상징적으로 그려놓기, 등을 대할 때면 일부러라도 천천히 읽어야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충분히 공감하고 상상하며 텍스트 사이에 써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입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여러 권을 읽은 듯한 효과를 내며, 작품의 재미를 떠나 작품이 가지는 여러 층위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맛을 볼 수 있는 미각을 일깨운다. 나아가 작가의 사상을 대충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작가가 읽어주는 걸 듣는 듯한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독서는 공감각적이고, 그래야만 하며, 그래야 제대로 된 독서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상력이 거세된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특히 문학 영역에서의 읽기라면 더욱 그렇다. 줄거리는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남는 건 결국 그 당시 잠깐이라도 시행했던 공감각적인 경험의 흔적이다. 잊지 말자. 독서는 향유다. 그래야만 한다.

‘악몽 같은 이야기’는 중기 작품에 해당하는 단편소설이다. 기준에 따라 중편으로도 분류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열린책들 판으로 100 페이지 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이다.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중 나에겐 가장 짧은 작품이었다. 앞으로는 더 짧은 여러 작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 작품으로 그 첫 문을 연 셈이다. 나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늘 긴 호흡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전개와 수 페이지에 걸쳐 진행되는 장광설까지도 즐겼었는데, 이젠 상대적으로 짧은 호흡과 급박한 전개 혹은 간단한 설정 정도에 만족을 해야 하니 조금 아쉬운 감도 없진 않다. 마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전체 이야기 중 한 장면에 불과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는 생각했던 것보단 걱정을 덜 해도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백 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약 20분의 1 분량이다)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충분히 도스토예프스키다운 문체로 온통 도배를 해놨기 때문이다. 문학을 감상할 때 줄거리를 파악하거나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지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체를 조금은 새로운 설정에서 맛보는 경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다만, 여전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장편에서 더 돋보이는 작가라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작품은 염치를 모르는 것 같은 한 고관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짧은 분량 덕분인지 복잡하게 꼬이는 이야기도 없고 상대적으로 단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장편보다 압축적이고 뚜렷하게 드러난다. 상징적인 부분들도 여러 번 등장하며 설명을 대신하여 이야기 전개에 한몫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의도적으로 시대상을 반영한 듯 보이는데, 정치와 사상에 관련된 부분, 특히 복고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그리고 작품을 다 읽고 나서도 모순적으로만 보이는 ‘휴머니즘’이라는 개념 사용에 대한 풍자를 선보인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휴머니즘을 사랑하고 실천하며 복고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나름대로 앞서간 인물이라고 여긴다. 시대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기도 할 정도로 자기애가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오래 유지되진 않는다. 대부분의 일상은 늘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거기에 맞춰 사는 비주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입진보’랄까. 남들 앞에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인 것처럼, 헌 것을 뜯어고치며 새로운 것을 향해 먼저 나아가는 선구자로 보이기를 갈망하지만, 그 모두가 허세에 지나지 않는 인물. 정작 그의 관심은 휴머니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만 대접받기를 바라면서 휴머니즘을 부르짖는 건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는 휴머니즘을 실천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남들에게 휴머니스트로 보이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인생 자체가 허세에 쪄든 인물인 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인물의 성향을 직접적인 설명 대신 그가 어느 날 밤에 벌인 우스꽝스럽고 창피하기도 한 어떤 해프닝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뒤처리를 하는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언제나 말과 글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효과가 큰 법이다. 소설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은 자신이 얼마나 휴머니즘을 사랑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 밤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부하 직원의 결혼식 피로연에 늦은 시각에 참석하기로 맘 먹는다. 높은 직책의 대단하신 분이 한 달 월급이 10 루블밖에 되지 않는 하급 관리의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참석하여 그 부하 직원을 축하해주고 살며시 나온다면 도덕적으로 고결함을 증명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휴머니즘을 실천하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인물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는 이런 어이없는 자신의 상상만으로도 들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 터무니없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야 마는데, 어지간한 독자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파티 분위기는 망가졌고, 그는 결혼식 피로연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신랑은 잔뜩 눌려서 꼼짝없이 수발을 들었다. 가난한 관리의 집에선 마시기 힘든 샴페인도 두 병이나 대접받으며 불청객처럼 그곳에 머물렀다.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주인공 고관 나리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결과, 술에 취해 뭐라고 지껄이다가 쓰러져 잠들고야 마는데, 그 여파로 사람들은 다 흩어졌고 남은 신랑과 신부, 가족들은 그 고관을 아무 데나 재울 수 없기 때문에 새로 산 신랑 신부를 위한 침대에 눕히기로 결정한다. 신랑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었고, 신부는 울분이 터져 목청 높여 울기 시작한다. 신부의 어머니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면서 신랑을 구박한 뒤 신부 손을 잡고 집을 나간다. 입이 턱 막히는 상황 전개. 비극적이고 또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운 광경. 아, 나는 '과연 도스토예프스키로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앙 한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침착한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신랑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술에 취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고관을 밤새 침대 옆에서 돌보았고, 아침이 되어 씻으라며 물까지 준비해준 천사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구원의 빛 한 줄기로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인물인 셈이다. 인간이라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인내하고 용서하며 악을 선으로 갚는 고결함. 이 우스꽝스러움과 고결함의 극적인 대비. 역시 도스토예프스키구나, 싶어 나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르고, 남의 시선에 맞추어 사는 비주체적인 우리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내 주위에서도 몇몇 비슷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말로만 바르고, 말로만 앞서가고, 말로만 선한, 가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악랄한 인간들. 분노가 살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신랑 어머니의 고결함이 그 분노를 눌러버렸다. 그것도 넉넉하게 말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주인공 고관은 유아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인간 정도로, 그래서 분노해야 할 인물이 아닌 불쌍하게 여겨야 할 인물로 바뀐다. 이 놀라운 관점의 변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할 이유는 이것 말고도 충분하다. 남은 여러 중단편들이 기대가 되는 이유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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