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은 미유가 데려온 버려진 햄스터의 이름이다.미유의 자리는 누군가 지켜보고 스스로 바라보는 자리다. 그리고 데려오다 라는 말의 주체이며 대상이다. 그렇기에 미유를 통해서 '가족이 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가족은 사랑 그 자체이며 머뭇거림은 없다. 서로 안아주고 체온을 공유하는 것에서 우리는 확인한다.아이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야기는 동화의 흔한 소재일 수 있지만 이 작품은 귀엽고 다정한 장면만 포착하지 않는다. 미유의 사연, 인물들의 깊은 마음, 그리고 햄릿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가족으로서 혹은 친구로서의 태도를 다하는 지점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삽화 속에 미유와 햄릿의 짧은 대화는 동화적 상상의 작은 행복을 준다.송미경 작가의 세계에 큰 인상을 받아왔는데 이 또한 그 영역을 넓혀지는 생각이 든다
자동피아노"나는 지금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장 아메리 『자유죽음』자동으로 기계적인 연주를 하는 자동피아노처럼의도를 넘어서 의식을 지배하는 독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이 소설은 가독성이 떨어진다. 정제되기 이전의 언어와 구상을 생략하는 전개는 소설을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독자에게 불친절할 수 있다. 작가는 어느 지점에서 소설이 아니라고도 한다. 그러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 소설의 가장 진정성있는 지점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언어실험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몸과 마음으로 오고가는 위태롭지만 진실된 기록이다. 단서를 찾으며 추리할 필요도 없으며 의미도 없다.이 소설을 읽는 방식은 낭독이 된다.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그 울림을 느껴본다. 그 발화의 이면에 가까이 도달하면 그의 목소리와 나의 그림자가 닮아있음에 놀랄 수 밖에 없다. 불안과 공포를 함께 유영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독법이다.27나는 나를 죽이고 싶다. 나는 나를 죽이고 싶지 않다. 나는 죽고 싶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나를 죽이겠다. 나는 나를 죽이지 않겠다. 나는 죽겠다. 나는 죽지 않겠다. 나는 두렵다. 나는 두렵지 않다. 긍정과 부정은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함께 무너지는 편을 택한다. 선택할 수 없는 혼돈 속에 강렬한 느낌만이 남는다. 부정의 소거법을 활용한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의 반복은 답이 아닌 어떤 태도를 남긴다.70어쩌면 오늘, 아니면 내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는 일. 내 욕망이 머뭇거림 속에서 실패에 이르는 일. 내가 욕망하는 것은 단 한번의 선택으로만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쓸 수 없다. 오늘은 아니어야 하는데. 어제도 그랬듯이. 아직은, 나는 아직. 무슨 말로 항변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달아난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간다.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이 소설의 지독한 난해를 한번에 끌어안게 한다. 위로나 공감이 아닌 이 위태로운 상태가 나에게도 그림자처럼 남아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시도는 옳을 수 밖에 없다.
빅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인간에게 죽음은 가장 무거운 화두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시작과 끝 앞에서 무력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고민 끝에서도 인간은 유쾌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토요일은 혼자가 아니다. 가족과 함께 있다. 흥이 많고 정신없지만 결국 가장 끈끈한 유대를 확인한다. 암 선고 이후 마지막 생일을 맞는 70세 빅 엔젤. 그는 생일파티를 준비한다.그러나 생일 일주일 전, 100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빅앤젤은 자신의 생일과 함께 진행할 계획을 세운다. 그의 가족은 순조롭게 두 번의 행사를 치를 수 있을지가 이 소설의 중심이다.생에 던져진 존재라면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면 어떤 힘으로 견딜 수 있나 생각해본다면 결국은 가족이다. 그들이 모이고 마음까지 함께하는 일은 쉽지 않아보이지만 그 떠들석함은 유쾌하게 혹은 마음의 울림을 남기게 한다. 인상깊은 것은 맨 뒤에 작가의 말이다.작가의 가족에 대한 진솔한 고백에 결국 눈물이 났다. 그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소설 전체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