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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이 길이 내 길’이라고 생각하며 걸었다. 그녀는 길에서 몇 번의 벽을 만난다. ‘소설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자주 견고한 시련의 벽을 만난다. 그녀는 삶의 어려움이라는 벽 앞에서도 스스로 행운아라고 생각하며 벽을 문으로 만들어 열줄 안다. 그러한 용기 있고 진정성어린 시도는 평생에 걸쳐 글을 쓰는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 한발 더디게 흘러가는 생각들을 추억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녀는 『디어 라이프』라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캐나다의 단편작가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는 그녀의 13번째 소설집이자 자전소설인 동명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등굣길에 걷던 거리의 풍경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의 가족들과 친구,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마치 할머니가 흑백사진에서 떠올려낸 이야기를 듣는 듯한 잔잔한 분위기가 전해지기도하고 뒤늦게 봉인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여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문장의 길이는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문장 마다 시간의 깊이가 느껴진다. 미사여구와 장황한 묘사 없이 기억에서 크로키 하듯 포착해낸 장면들은 세월의 두께를 부감하는 기분이 든다. 그녀의 단정한 문장들을 통해 마음에서 부풀어 오르는 시간의 풍요로움을 전해진다.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그녀의 걸음걸이에 제법 속도가 났던 네터필드 부인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하는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네터필드 부인과의 일화는 어머니의 신경증과 함께 긴박한 상황을 이끌어가며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시킨다. 동시에 훗날 네터필드 부인의 딸을 통해 어머니의 오해를 인정하게 되면서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간절하게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가.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유하다가 한 편의 소설이 된다.
마지막 문장을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것일까. 방안의 고요에 균열을 만든 나의 목소리는 어색했지만 내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세상과, 그리고 자신과 싸워야할 남은 삶을 견디기 위한 든든한 위로가 되는 고마운 문장이었다.
『디어 라이프』라는 소설의 제목은 처음 책을 펼쳤을 때의 설레는 감정에서 내 마음 속에 수많은 동심원을 그렸다. 그 동심원들은 과거와 미래의 단면들을 투영한다. 어쩌면 지금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고 여운에 잠긴 시간도 저 멀리 과거가 되어 추억할 수도 있겠다. 아직은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는 미래에 만나게 될 환희의 순간에도, 그 순간이 오기까지 몇 번이고 찾아올 좌절의 시간에도 마치 주문처럼 책의 제목을 마음속으로 읊조리게 될 것이다. ‘디어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