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여선 작가님의 소설에는 시간이 경과된 사건울 인물의 목소리로 개성적이고 선명하게 그려내는 힘이 있다고 믿어왔다.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동시에 사건 이후이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몰입감을 준다, 일부를 읽어봤지만 강렬한 인상이 여전히 남아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일린

이 책의 제목은 아일린일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이 책의 주인공이다.

소도시에서 자기혐오와 불행에 대해 분노하지만

불순하고 의미없는 공상으로 삶을 견디는 젊은 여자.

그녀는 떠나고 싶다는 갈망 앞에서도

현실에 대한 냉소와 막연한 두려움으로

제자리에 머물러버렸다.

12월 말의 일주일, 그동안 진정한 아일린이 완성된 것이다.

 

p. 32

시계 초침이 멈칫 떨리다 앞으로 휙 나가는 모양이, 처음에는 불안해서 겁먹었다가 절망으로부터 힘을 얻어 절벽에서 뛰어내렸으나 결국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만 사람 같았다.”

 

p. 86

천국은 믿지 않았으나 지옥은 진짜 있다고 믿었다. 정말로 죽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항상 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

 

아일린은 삶에 대한 의지와 죽음에 대한 확신,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현실 속의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는 불안 또한 있었다.

X빌이라는 소도시에서 알콜 중독인 아버지와 단둘이 살면서

청소년 교도소에서 사무를 보는 아일린의 삶은 지긋지긋할 뿐이다.

불만은 쌓여 분노가 되고 격렬한 감정의 파도는 그녀의 정신만을 덮칠 뿐이다.

현실에서는 그저 자신의 삶을 개선 없이 수긍할 뿐이다.

자기 혐오와 자기 연민이 섞인 날카로운 내면의 목소리는

섬세하게 드러나 유리처럼 투명하게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유리라고 믿었던 벽은 때때로 거울이 되어 나의 내면을 비춘다.

분노는 내면을 폭발할 만한 힘으로 자신을 뒤흔든다.

그 철저한 고통의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나 또한 아일린일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아일린의 서술로 이어진다.

특히 초반은 특별한 사건이 없다.

지루함을 예상할 수 있지만

아일린의 목소리와 내면의 일관됨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몰입감을 준다.

그리고 무언가 터지리라는 기대는 후반부에서 폭발한다.

아일린이 사라지는 이야기. 혹은 스스로 떠나는 이야기.

그녀의 뒷모습은 단호한 내면을 보여준다.

마치 그림자마저 벗어두고 가는 것처럼.


"시계 초침이 멈칫 떨리다 앞으로 휙 나가는 모양이, 처음에는 불안해서 겁먹었다가 절망으로부터 힘을 얻어 절벽에서 뛰어내렸으나 결국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만 사람 같았다."
- P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여성시인이 남긴 편지의 서두를 기억한다. ‘내 상처를 이해해 준 그대에게.’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 불행과 불안에 대해 고백한 장문의 편지를 남긴다. 그 편지의 끝은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라보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강물로 들어간다. 그녀의 강물 속에서 물의 흐름과 깊이를 빌려 시의 마지막 연을 완성했는지도 모르겠다. 버지니아 울프. 1941328일 그녀는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신영배의 기억이동장치1’의 시적 정황은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이 떠올랐다. 그 장면을 목격한 바 없으므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2002년 작 디 아워스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시의 화자는 비가 내리는 날 창밖을 응시한다. 섬세한 눈길은 유리창에 묻은 지문마저 본다. 그 흔적에서 누구의 것인지 기억을 더듬는다. 관찰의 대상이 지문은 상상으로 전이되어 그녀를 붙잡는 손이 된다. 그녀는 강가를 거닐고 휘청거린다. 수면에 그녀의 그림자가 떠 있다. 발이 빠지고 죽은 이들의 얼굴을 아마도 본다. 여기까지의 정황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 장면과 닮아 있다. 화자는 섬세한 시선으로 대상을 보고 마음의 불안으로 휘청인다. 결국 강가로 이끌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따라가려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의 정황에서 그녀는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손의 지문도 그대로다. 다시 집의 일상으로 그녀는 자리를 잡는다.

그녀가 돌아왔기 때문에 비극의 강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가혹은 생의 인력이 그녀를 붙잡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의 상상이 사그라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에서 새로운 슬픔이 파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 사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화자를 애절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녀가 지문에서 손을 불러냈다면 우리는 시의 화자에게서 묘사되지 않은 얼굴을 비춰본 셈이다.

그녀, 즉 화자를 형상화에 집중되기 보다는 화자를 안고 있는 배경과 분위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비가 오는 날, 강가로 가는 그녀. 유리창의 지문마저 드러나는 습기가 찬 날이다. 물은 어디서나 내리고 흘러가고 고인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 떨어진다 해도 그 이유를 묻기보다는 그 얼굴이 마음에 남을 것이다. 신영배가 구축한(구축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지만) 이미지는 내리고 흘러간다. 신영배의 화술은 물의 목소리와 닮아있다.

물은 흘러간다. 신영배의 물은 시어들을 적시며 행과 연을 타고 흘러간다.

의식도 흘러간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들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흘러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현실에서 타인의 세계라는 벽에 부딪힌다. 이때 문학은 견고한 벽이 문이 되는 시도다. 문을 열고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설을 통해 세계와 갈등하는 인간을 만나고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문득 등장인물이 독자인 나와, 혹은 무의식 속에서 잠재하는 나의 욕망과 닮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문을 열고보면 그것이 거울인 것을 깨닫는 것이다. 소설을 통해 나와 무관한 세계로 들어가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갈등의 진폭을 느끼며 현실에서의 균형감각을 돌이켜본다


소설의 세계는 인물이 등장하고 세계가 구축된다. 세계는 인물의 배경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승패없는 전장이 되기도 한다. 인물과 세계 사이에 민감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면서 극이 전개되고 갈등이 고조된다. 구축된 세계는 인물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러나 세계에 안착했다고 해서 해피엔딩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역동적인 세계에서 쏟아져나오는 문제적 인간들과 세계를 공유해야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정체성을 위협하며 우리의 일상과 허상을 전복시킨다. 우리의 방법적 회의는 자아의 심연에까지 미친다. 그렇게 우리는 소모되고 마모되며 의도를 배반한 나를 만나게 된다


구병모의 이창은 주인공인 '' 자체가 문제적이다. 만인에 대해 집요하게 신경쓰는 일명 오지라퍼로 등장한다. 나의 정의감은 언제나 정도를 넘어선다. 나의 사정권에 들어온 그녀는 예상과 달리 의연하며 연출된 것처럼 준비된 변명으로 나의 오지랖으로부터 방어한다. 나는 그녀의 아동학대에 관한 단서를 잡아나가고 그녀는 나의 시도를 무화시킨다. 나와 그녀의 대결은 치열하다. 나와 그녀는 각자 자신의 세계를 방어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세계를 침입한다. 진술의 신뢰도를 의심받을 만한 문제적 주인공과공격과 수비의 역동성있는 전개가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방법들. 단순히 거울로 확인하는 방법부터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 쓴 일기, 혹은 일생에 대한 일대기를 다루는 자서전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얼굴을 직접 그린다면 자화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표현 욕구를 가지고 있다. 대상에 대한 해석의 초점을 주체인 나에게로 돌려 일종의 메타사고를 통해서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해석은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인 작업일 것이다. 많은 화가들에게는 자화상이 있고 많은 작가들에게는 자전소설이 있다. 자화상은 예술가에게 있어서 자기 고백이며 자기반성일 수 있다. 그러나 이원의 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은 제목이 주는 기괴한 분위기와 함께 자신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자화상의 일반적인 범주 외에 있다. 과연 살가죽이 벗겨진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살가죽을 나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단지 살가죽이 덧씌워진 나의 이면에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가. 시의 제목으로 질문의 연쇄가 시작되는 것이다

.

1연은 1행으로 되어 있다. ‘검은 빛에 갇힌그러나 주어와 동사로 구성된 문장, 혹은 명징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명사가 아니다. 수식 어구뿐이기 때문에 수식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수식대상은 2연에서 이어진다. ‘길들하루. 2연의 분위기는 검은 빛의 수식을 받아 이어가기 때문에 어둡다. 1행의 제 스스로 몸을 구부려 돌아가고 있는 것에서 편하게 빠른 길로 가는 것과 대비되어 고행의 느낌을 준다. 이어서 하루벽을 밀고 가는 것이다. 벽은 밀리지 않는다. 예정된 실패의 행동들이 하루의 과업인 것이다. 3행에서는 한 여름에 모포를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는 형국이라고 묘사하며 일부러 고생하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2연의 행동들, 돌아가거나 벽을 밀고 가거나 땀을 흘리는 것은 특별한 산출물이 없는 고생 정도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이 자화상이었던 것을 염두 하면 2연에 그려진 고행은 자기반성을 위한 선행 단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2연에 등장하는 물 빠진 뻘의 배는 바다로 나갈 수 없는 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바다 멀리 까지 보인다.’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는 한계만을 확인하게 한다. 나를 배로, 바다를 세계로 치환할 때 내가 세계로 진입하는 데 있어서의 좌절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1연에서 나의 자기반성적 고행을 시작으로 2연에서는 세계로 진출하지 못하는 나를 묘사하고 있다. 3행에서 지칭하는 여기는 죽은 사람, 산 사람이 모두 보이는 공간이다. ‘여기는 시 안에서 물 빠진 뻘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떠난 자들과 남겨진 자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층위에서 다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

3연은 하나의 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이 들끓어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이 의도한 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에 가장 근접한 시적 언술이 된다고 본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말로 진정한 자아가 될 것이다

.

4연은 자기반성의 결과인데 다소 파격적이다.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것이라는 다짐에서 인간에 대한 메타사고가 인간에 대한 부정에 이르는 모순을 확인하게 된다. 이어지는 2행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내가 사람인지조차 모를 것이다라고 끝까지 부정한다. 자기반성의 의도로 시작한 자화상의 결론이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 마무리되면서 이 시의 대상은 애초에 나라는 소박한 차원에서의 자화상이 아니라 인류 전체로 확대되는 것이다

.

자기 해석의 결과는 의도와 달리 강한 자기 부정성을 내포한다. 자기 해석의 과정은 자기 부정성을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부정된 자아 역시 다양하게 해석된 자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쩌면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를 비운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허상들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아마 살가죽은 우리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나라고 믿고 있던 허상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자화상을 통한 나와의 대면 과정은 고통스럽고 자기 한계를 확인하는 괴로운 과정이지만 그 결과로서의 자기 부정은 더욱 결연하여 진실로서 믿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연을 읽었을 때의 울림은 강렬한 시적 분위기를 성취하고 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