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광장에서
윤은성 지음 / 빠마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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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광장에서

유리 광장을 상상한다. 유리처럼 연약하지만 투명한 마음들이 모여 넓고 단단하게 광장을 만든다. 거리와 광장에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간절한 기도가 외침이 되어 메아리로 퍼져나가는 장면은 상상하지 않는다. 시인의 아픈 기억이며 진실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실패를 예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도는 태도를 만들었다. 단정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모습은 선택을 위한 저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맴돌고 있다. 시인의 시선으로, 시인의 문장으로, 그리고 시인의 마음으로. 시작과 끝, 출발과 도착처럼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으로 판단은 유보된다. ‘머무는 것과 돌아오지 않는 것 중 무엇이 조금 더 삶에 가까운가’(「우산을 쓰고 묻는다」), ‘그의 마음속에서 내가 어떻게 되살아날지 되살아나지 않을지 알기는 어렵다’ (「선반 달기」). ‘부정확한 문장도 정확한 문장도 답처럼 보였다가 뒤로 물러가고.’(「개관일」) 정답을 말하지 않지만 대답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윤리적 태도가 있다. 그래서 시인의 판단은 느리지만, 목소리는 낮고 천천히 들리지만 어쩌면 가장 멀리까지 가 닿을 수 있는 울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시인의 진실한 시선에 포착되는 생의 비밀이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늘귀 안을 들여다볼 때는 크고 무서운 마음이 잠깐씩 깊어진다.’ (「남안」)거나, ‘구름 사이로 빛이 보이면 무언가 알아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유리광장에서」)처럼. 계시처럼 현현하지만 어떤 신호로만 남아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그 순간은 아름다워진다. 기억에 남기 전에 흩어지더라도 파편화된 시어들이 만드는 세계는 아름답다. 같은 맥락에서 시인에게는 고독감이 남는다. ‘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푸른 곰자리」), 혹은 ‘누구와도 쉽게 동질감을 느끼지 못’할 때 (「마음 닫기」)가 그렇다. 하지만 시인의 고독은 고유하다. 내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세상을 향한 용기를 낸다. ‘용기를 낼 거야. 겹쳐진 꿈은 선명해지기도 하니까.’ (「모르는 일들로부터」) 목소리는 모여 선언이 되고, 손들이 맞잡고 투쟁을 하는 것이다. 고립과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피켓을 쥔 주먹이 되어주는 것. 광장에 모여 파업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손잡고, 플래카드 붙은 길목을 응시하며, 전쟁 소식에 외교부를 향해 노래를 부르고 행사장에서 자본으로부터 폭력을 배우는 세계를 우려한다. 시인이 발 닿는 곳에 따라, 농가나 유곽, 매립된 어촌이, 화랑유원지가 시의 배경이 되고 시인의 목소리는 넓은 곳을 향해, 많은 이들에게 퍼져나간다. 시인의 외침이 있는 곳은 유리 광장이 된다. 투명히고 단단한 연대의 마음을 서로에게 보이는 곳. 이제 유리 광장을 상상하지 않는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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