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시간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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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별의시간
클라리시리스펙토르
암실문고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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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문장의 접점은 어디쯤에서 형성되는 것일까. 문장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막연히라도 고민해봤을 것이다. 자유연상에 의거해 생각나는 대로 쓰는 문장일수도 있고 정제된 생각을 직조한 것처럼 구성된 문장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생각은 문장을 이끌고 동시에 문장은 생각을 포함한다. 생각과 문장의 관계가 밀접할수록 가독성이 높고 의미있는 서사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의 언어는 해체되어 문장은 파편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서사를 향해 희미하게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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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그래'로 시작되었다. 한 분자가 다른 분자에게 '그래'라고 말했고 생명이 탄생했다. 하지만 선사 이전에는 선사의 선사가 있었고 '아니'와 '그래'가 있었다. 늘 그랬다. 어쩌다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주가 시작된 적이 없음을 안다. 정말이지, 나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단순함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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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시간은 작가의 헌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작중 작가인 의해 한 여성이 설명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림으로 친다면 스케치에 해당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한 방식은 이미 채색까지 한 완성작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방법은 다르다. 스케치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엇나간 부분은 지우고 다시 선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언어는 의미를 의도하지 않고 생성한다. 인물은 서사를 통해 구현되지 않는다. 어렵고도 새로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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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작가로 설정된 작가 호드리구와 그가 창조한 ‘가난한 여성’ 마카베아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주로 마카베아의 비극적으로 처참한 배경과 가난하고 무지한 그녀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호드리구의 적극적인 설명이 주를 이룬다. 마카베아의 삶은 처절하지만 작가가 의도한 것은 비극성이 아니다. 그녀는 철저히 홀로 고립되어 괴로운 삶을 살고 교류했던 남자마저 그녀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삶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모습이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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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길을 건널 무렵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미래를 잉태한 사람. 그녀는 이제껏 느껴 본 그 어떤 절망보다 더 격렬한 희망에 차 있었다. 그녀가 이제 더 이상 그녀 자신이 아니게 된다면, 그건 이득이 되는 상실이었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듯 점쟁이로부터 삶의 선고를 받았다. 갑자기 모든 게 너무너무 많고 커서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죽어 가는 태양처럼 빛났다.(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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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작중 작가와 인물 마카베아의 구도는 클라리시리스펙토르에게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까. 작중 작가의 목소리는 인물로 향하는 듯하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는 모호한 상황이 이어진다. 이러한 설정에서 정작 클라리시리스펙토르는 어디에 있을까. 강렬한 문장은 쉼없이 이어지고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특별함이 농도 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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