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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평점 :
삶의 의도를 이탈한 바보 사랑꾼
<레스>를 읽고
레스는 추락하고 있다. 당신은 짐작한다. <레스>의 책 표지에서 그는 분명 중력의 법칙에 따라 이끌리는 것으로 보인다. 형편없는 게이 소설가는 매몰차게 바닥에 내던져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허공 속에서 무언가 적고 있는 ‘바보사랑꾼’의 운명을 단정할 수는 없다.
레스는 헤어진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불참의 핑계를 만들어낸다. 아메리카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횡단하는 세계여행을 계획한다. 뉴욕에서의 작가 인터뷰 진행, 멕시코 문학 행사, 이탈리아 토리노의 시상식, 독일 자유대학에서의 문학수업, 모로코 여행, 일본 요리 기사 작성. 그의 목적은 명백하지만 그의 마음은 방황한다. 헤어진 연인 프레디의 결혼식을 피하려는 너무나 그럴싸한 핑계 앞에서 자신을 속이는 일은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어떤 여행지에서도 자책을 이어간다. 형편없이 늙어가고 있으며, 형편없는 소설을 쓰고, 형편없는 게이임을 인정한다.
레스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소설의 주인공인 게이 스위프트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를 생각할수록 아무도 그를 가엾게 여기지 않으리라는 가벼운 절망이 이어진다. 쉰 살이 된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스위프트는 레스에게 조차 연민을 받지 못한다.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현실를 자각하는 것처럼 레스는 스위프트에게서 자신을 본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의 작가 앤드루 숀 그리어 역시 레스에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옮긴이의 말을 참고하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성연인과 살고 있는 쉰 살을 앞둔 미국의 소설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고민은 소설적 가공을 거쳐 레스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슬퍼하고 있다. 연인을, 커리어를, 소설을, 젊음을 잃은 것에 대해.’(225쪽) 레스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의 상실감을 읽어볼 수 있다. 잃기 이전을 회상하며 잃은 이후의 현재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스는 여덟 군데의 나라에서 여행을 하며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한다. 젊음과 그 이후의 나이 듦, 연애의 기억과 그 이후의 실연, 주목받았던 첫 작품과 그저 그런 입지의 후속작. 어쩌면 친구 카를로스의 말처럼 인생의 전반부는 희극이었다면 이제 쉰 살을 맞은 그에게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유명 작가를 인터뷰하는 뉴욕의 행사에서 “대체 아서 레스가 누구야?”라는 질문에 상처받지 않고 익숙해지려고 한다. 다음 여행지인 멕시코에서는 과거의 애인 로버트의 부인 메리언이 행사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받는다. 그는 ‘게이 남성이 지옥에서 심판받는 방법’이라며 두려워하지만 다행히 그녀는 불참한다. 또한 기대 없이 참석한 이탈리아 토리노의 시상식에서는 상을 받는다.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독일과 비행기 사정으로 머물러야 했던 프랑스에서는 각각 짧게 새로운 연인을 만난다. 모로코에서는 동행하는 여행자들의 실연에 대한 사연을 듣고 인도에서는 발목 부상으로 친구 카를로스의 리조트에 머무른다.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만 우리의 ‘바보 사랑꾼’ 아서 레스는 어디서든 과거 자신의 삶의 일부였던 연인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을 거울로 쓰겠다는 끝없는 욕구, 그 거울에 비친 아서 레스를 봐야겠다는 욕구(225)’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의 거울은 그가 바라보는 것을 비추고 그 안에서 그의 마음을 투영시킨다. 언제나 제각각 다른 모습이겠지만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는 무리한 세계여행으로 다행히 프레디의 결혼식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적극적인 시도에도 마음속에서 프레디는 더욱 선명하게 존재한다. 결혼식을 상상하고 이어지는 신혼여행을 짐작해본다. 그가 계획한 여행은 그럭저럭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의 숨은 의도에서 반은 실패한 셈이다. 그는 여행지마다 프레디와의 기억을 그리고 그 이전에 로버트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의 과거가 현재와의 거리를 벌릴수록 지금의 자신이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의 거울 속에는 실연당한 쉰 살의 게이 소설가가 있다. 애초에 그의 의도는 이런 ‘형편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것은 의도를 이탈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말까지도 예상치 못한 화자의 등장으로 그의 의도는 너무나 기분 좋게 의도를 벗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의도를 이탈한 바보 사랑꾼은 삶에 안착할 것이다.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중력이 있다.
그는 슬퍼하고 있다. 연인을, 커리어를, 소설을, 젊음을 잃은 것에 대해.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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