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하면 ()인 사람이 된다. 대상에 대한 사랑은 사소하지만 애정 어린 시적발화를 이끌어낸다. 낯간지럽고 유치한 구절들을 일기장에 적어본 기억 때문에 연애시(戀愛詩)에 대한 편견이 있다. 하지만 연애시라고 해서 단순히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시인 김혜순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은 시인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제 시 속에서 대상과 사랑에 빠진 화자의 모습을 즐겨 등장시킵니다.”라고 말했다. 김혜순의 시에서 사랑에 빠진 화자는 사랑을 속삭이는 것 이상으로 시인이 구축한 시적 공간에서 대상과 주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기에 존재론적 성격이 강하다


김혜순의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은 나와 당신에 대한 훌륭한 연애시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나와 당신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구축되고 선명한 감각으로 서로를 소환한다. 사랑과 이별의 서사는 일상에서 우주로 펼쳐지는 무한한 무대, 특히 도시라는 공간에서 자유롭게 그려진다. 그 중 1부에 실린 얼굴을 통해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시의 첫 구절은 당신 속에는 또 하나의 당신이 들어있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당신을 파악하는 것이 이 시를 이해하는 즐거움이다. 이어서 당신속의 당신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표면적으로는 본연의 자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를 연애시의 범주에서 읽을 때,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대상 그 자체를 파악할 수도 없다. 사랑은 해석의 행위이며 하나의 대상은 다양하게 해석된 형태로 존재한다. 대상은 언제나 분석주체만큼의 해석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 속의 당신내가 해석한-사랑하는 당신일 수 있으며 해석의 틀을 확장한다면 당신이 해석하는-사랑하는 나로 읽을 수도 있다. 당신 안에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발견할 수도 있고, 어쩌면 당신 안에 사랑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나를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시의 대상은 당신을 넘어서 당신 속의 당신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당신 속의 당신이 어떻게 서사를 이끌어나가는지 추적함에 따라 그 존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2연에서 당신 속의 당신몸 안으로 단단히 당겨 잡고있다. ‘손톱이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려들어갈정도로, ‘귓바퀴가 몸속으로 소용돌이치며 빨려갈정도로 잡아당기는 힘은 상당한 것으로 보여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하다. 하지만 손을 놓으면 당신 속의 당신은 세상에 없는 것이 된다. 세상에 없다는 것은 죽음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연애시의 맥락에서는 이별, 혹은 존재론적으로 무의미한 대상이 된 당신 혹은 나로 해석할 수 있다.


3연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당신 속의 당신과 나와의 관계가 구축되고 있다. ‘내 얼굴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내가 느끼기도 하는것으로 보면 나와 당신과의 아름다운 사랑이 느껴진다. 여기서는 당신 속의 당신을 당신인지 당신에 의해 해석된 나인지에 관계없이 나와 당신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난다. ‘내 속의 내가 등장해 당신에게 끌려들어갈 지경이라고 말하면서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지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신 속의 당신을 당신이 해석한 나로 본다면, 해석된 내가 일상의 나를 사로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 속의 나를 당신이 해석한 나로 파악가능하다. 사랑에 의해서 나에 대한 재개념화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교류되는 상황에서 당신 속의 당신내 속의 나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 닮아가고 흉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 속의 당신은 당신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떠나도 여기에즉 내가 있는 이 곳에도 있다. 돌려보낼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강력한 존재가 되어있다. 다음 연에서 시인은 부재자의 인질이라고 나를 묘사하는데 사랑의 감정에 완전히 점령당한 나의 모습을 매력적인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없어도 내가 사랑하는 당신 혹은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김혜순의 얼굴당신 속의 당신혹은 내 속의 나와 같은 개념을 시적 대상으로 선택하여 사랑하는 대상, 즉 해석된 대상의 존재에 대해서 접근하고 있다. 시적 공간이 거의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체와 대상만이 있으며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서사에 의해서 사랑의 정황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화자는 사랑에 의해 완전히 사로잡힌 부재자의 인질의 상황에서 대상에 대한 순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내 안의 것들을 숙성하여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은 단순한 순정 그 자체가 아니다. 대상에 대한 시인의 심층적 사고를 통해 존재로서의 의미를 부여받은 철학적 대상을 통해 깊은 사유에 이르는 것이다


사랑은 해석이다. 나의 연인은 나에 의해서 해석된 대상이다. 대상 안에는 내가 해석한 대상이 존재한다. 해석된 대상은 해석주체만큼 무한하며 대상 안에서 연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마치 러시아 민속인형인 마트로시카처럼 대상 안에 대상이 숨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속의 당신을 우연과 의도에 따라 생성한 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 속의 당신에서 열렬히 사랑에 빠진 나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해석되어 서로에게 존재할지는 알 수 없으나 무한대의 해석에 이른 사랑은 고유하고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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