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 국내최초 초판 무삭제 완역본 데일 카네기 초판 완역본 시리즈
데일 카네기 지음, 임상훈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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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가 들려주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비밀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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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 국내최초 초판 무삭제 완역본 데일 카네기 초판 완역본 시리즈
데일 카네기 지음, 임상훈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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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가 알려주는 인생 레슨

-일단 결정을 내리면 실천에 옮겨라

-늘 바쁘게 살면서 걱정을 몰아내라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라.

-내가 가진 문제가 아니라 받은 복을 헤아려보라.

-부당한 비판은 칭찬의 다른 모습이다.

왜,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나

-몇 해가 지나면서 성인들이 품고 있는 커다란 문제 중 하나가 '걱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수업의 수강생은 대부분은 경영자, 세일즈맨, 엔지니어, 회계사 등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전문직을 비롯해 그 밖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다. 여성 기업가들이나 가정주부들 역시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따라서 걱정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교과서가 절실했다.

-이 책의 목적은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기본 원리를 거듭 말하고, 사례를 들고, 간결하게 정리하고, 재해석하며, 탁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 당신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면서 당신도 알고 있는 원리를 본인의 삶에 적용해보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다.

-흥미롭고 소중한 훈련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걱정을 멈추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사는 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제는 고전 중의 고전이 된 데일 카네기의 놀라운 인생 철학서.

<인간관계론>도 유명하지만 이번 현대지성에서 나온 <자기관리론>도 오래동안 곁에 두어야할 소중한 책이다.

그의 인생이 쉽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다. 농사일과 세일즈맨을 전전하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우연히(어쩌면 필연일 것이다!) 대중연설을 가르치며 사람들의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 일로 전향한다. 지금은 자기계발이라는 말로 익숙하지만 그당시에는 익숙치 않은 개념일테니 데일 카네기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이번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또한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이나 앞서간 책이다. 지금은 걱정에 관한 책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이때만 해도 도서관에고작 22권뿐이었다니 말이다.

<인간관계론> 만큼이나 삶의 의욕과 동기를 마구 불어넣어주는 <자기관리론>. 읽다보면 마법같은 일이 펼쳐질 것 같은 이 책 속의 비밀은 결국 우리 안에 있었다.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책의 원제인 'How to Stop Worrying and Start Living'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걱정'에 관한 책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와 걱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보다.

데일 카네기는 걱정이 인생을 망치기 전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기 전에!) 바로 그 걱정을 멈추고 심연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게 되겠어? 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에게는 조용히 이 책의 1부부터 시작하여 10부까지 읽어보자고 말할 것 같다. 진짜 이 책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했고, 워런 버핏 또한 "나는 데일 카네기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웠다"고 말하며 인생에 직접 적용했다고 말하지 않았겠나!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라

-우리는 두 영겁의 시간이 만나는 바로 그 순간에 서 있다. 하나는 영원히 지속되며 쌓여만 가는 과거요, 다른 하나는 기록된 시간 바로 다음을 계속해서 맞물려 이어지는 미래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없다. 찰나의 시간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면서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고 있다. 앞으로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사는 데 만족하기로 하자. 그 시간은 지금부터 잠들 때까지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하루 동안은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다정한 태도로 인내하고 사랑하며, 순수하게 살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의미 있는 부분은 그게 전부다."

-인도의 유명한 극작가 칼리다사가 쓴 시다.

새벽에 바치는 인사

오늘을 잘 살피어라!

오늘이 바로 인생이요, 인생 중의 인생이라.

그 짧은 순간에

당신이라는 존재의 진실과 실체가,

성장의 축복과

행위의 아름다움과

성취의 영광이 모두 담겨 있다.

어제는 꿈일 뿐이요

내일은 환상에 불과하나

오늘을 잘 살면 어제는 행복한 꿈이 되고

내일은 희망찬 환상이 된다.

그러니 오늘을 잘 살피라.

이것이 새벽에 바치는 인사.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적어보라.

1.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현재에서 살아가기를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눈으로 볼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는 마법의 장미 정원을 고대하는 것은 아닌가?

2. 과거에 일어난 일, 이미 끝나버린 일에 대한 후회 때문에 현재를 억울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3.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을 붙잡고 24시간을 최대한 이용하리라 결심하는가?

4.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더 많은 것을 얻게 될끼?

5. 언제부터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다음 주? 내일? 아니면 오늘?

걱정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 지식

1. 걱정을 없애고 싶다면 윌리엄 오슬러 경의 말대로 행하라.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살라. 미래에 대해서 조바심을 내지 말라.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주어진 그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된다.

2. 큰 문제에 부딪혀 궁지에 몰리면, 윌리스 캐리어가 고안해낸 마법의 공식을 사용하라.

1단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자문해보라.

2단계: 어쩔 수 없다면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라.

3단계: 침착한 자세로 이미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최악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라.

3. 걱정이 건강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기억하라. "걱정과 싸우는 법을 모르는 기업인을 일찍 죽기 마련이다."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은 '걱정'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긴 책이다.

우리가 왜 걱정을 하고 있고 걱정은 어떤 팩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극복했으며 성공하는 길은 무엇인지 오랜 시간을 사랑받아온 데일 카네기만의 마법 같은 비밀이 담겨 있다.

사실 이 책을 펴기 전에는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이 걱정에 관한 책인지 몰랐다.

일요일 밤을 앞둔 나는, 오늘도 내일의 걱정에 한번씩 생각에 빠져 고민을 안고 있었다. 내가 가진 걱정의 대부분은 아직 일과 미래에 관련된 것인데 아마 시간이 흐르면서 이 걱정들의 난이도는 더 올라갈 것이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주변사람들의 건강은 예전같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걱정에 사로 잡혀 있는 순간 만난,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

확실한 건 걱정이 많은 나에게도 이 책을 읽는 이 순간 만큼은 명상처럼, 마법처럼 걱정이 반의 반의 반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거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걱정의 99%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해도, 당장 한 달만 지나도 지금 하고 있는 걱정이 해결되거나 없어지거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걸 알고 있다고 해도, 그 놈의 걱정은 좀처럼 잡히질 않는다.

데일 카네기의 말처럼 '오늘'을 살고 싶다. 오늘을 잡고 싶고, 오늘을 더 알차고 보람있게 보내고 싶다.

그런 나에게 데일 카네기의 문장들은 걱정을 쪼개주고 의지를 키워준다.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에는 참 재밌는 비유들도 많은데, "딱정벌레 때문에 쓰러지지 말라"는 응원도 있었다.

400년이 넘은 나무가 눈사태와 폭풍 같은 자연재해도 이겨내며 오랜 기간 살아왔는데도 아주 작은 딱정벌레 무리들의 공격에 파고들어 결국 쓰러진다는 말이다.

작고 사소한 딱정벌레 같은 걱정들이 우리를 갉아먹을 수 있다. 특히 걱정과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는 다른 병들보다도 더 치유하고 힘들고 위태롭다.

걱정 없는 사람은 타고난 게 아닐까? 오래도록 고민한 적이 있다.

이 고민의 결론은, 사람마다 걱정하는 양은 다르지만 누구는 좀 더 예민하고, 누구는 좀 더 태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문득 이 결론에 나는 억울했다. 그럼 나처럼 걱정이 많은 사람은 태평한 사람보다 불행한 것일까?

이 물음의 답도 결국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흐름이었지만 나는 그 방향을 바꿨다.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악의 상황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생긴다. 그리고 이를 정면돌파한다. 만약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면 사소한 것들은 없애버리고 늘 바쁘게 살면서 걱정도 몰아내보라고 격려해준다.

그리고 수 많은 책을 읽으며 알아낸 사실인데, 걱정이 많은 사람은 남들보다 촉수가 예민해서 그만큼 다양하게 느끼고 즐길 수 있다니!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걱정으로 인생을 낭비하기엔 삶은 너무 짧다.

그리고 이 에너지로 더 생산적인 일, 즐거운 일, 행복한 일을 하는 게 나를 위한 일이다.

<데일 카네기 자기관리론>을 손에 들기 직전까지 걱정들로 둘러쌓여 있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 책을 진짜 즐길 수 있도록 데일 카네기가 제안한 것처럼 일고 읽고 또 읽다보면 걱정을 멈추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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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역사 - 세계 경제를 결정하는 5대 머니게임
우야마 다쿠에이 지음, 신은주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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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부의 역사"

서로 주고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서로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두로만 약속을 맺으면 의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법도 없고 법을 감독하는 곳도 없었던 고대에는 계약이나 서약을 어디에서 보증받았을까요?

인간은 그 역할을 종교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일반적으로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은 논리와 도덕을 이끌어냅니다. 인간은 폭력이 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선악의 가치 판단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합니다. 이기적인 행동을 멈추는 것이 다른 사람과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조화로운 자세로 공존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논리와 도덕으로 선악을 판단할 때 모든 인간이 명명백백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 속에 이를 반복해서 새기기 위한 제도나 의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필요에 응할 수 있는 것은 종교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 범죄를 막는 것은 수사가 아니라 종교였습니다. 수사력에 한계가 있었던 전근대사회에서 범죄를 막으려면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 이외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라는 시스템을 공동체 운영에 편입시켜야 했습니다.

죄를 범하면 신이 벌을 주는 것은 세계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벌칙을 규정해놓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신의 뜻에 따라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사후 세계의 안락과 신의 은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와 은혜를 교묘하게 섞어서 사람들이 신을 경외하도록 합니다.

신이 경제 기반을 반든다

고대 - 5대 머니게임의 서막

중세 - 종교, 경제에서 태어나 경제를 낳다

근세 - 인간은 어떻게 돈의 노예가 되었는가

근대 - 머니게임 후반전, 경제와 과학과 종교의 분립

현대 - 하나로 움직이는 세계 경제와 그 배후

요즘 핫한 책, <부의 역사>.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를 찍었고 페이스북과 인터넷서점을 돌아다니다보면 오야마 다쿠에이의 <부의 역사>가 종종 보이곤 했다.

드디어 나도 궁금해서 읽어본 <부의 역사>.

우선 책을 펴보면 바로 알겠지만 누구나 읽기 쉽게 쓴 부와 종교에 관한 경제경영서이다.

책의 하단에는 'must person', 'must affair' 이라고 꼭 알아두면 좋을 인물이나 사건을 콕 집어주고, 역사의 흐름을 잘 잡기 위해 도식화해서 표현도 해준다.

책의 제목인 <부의 역사>, 그리고 그 부제목인 '세계 경제를 결정하는 5대 머니게임'이라는 말을 보고 책을 폈을 때는 정말 몰랐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부의 역사는 곧 종교의 역사와 다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신성한 종교를 돈과 부와 자본주의에 묶을 수 있느냐고 성을 낼 수도 있지만, 그런 비판과 비난에도 꿋꿋하게도 저자는 종교를 이해하는 방식은 곧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자 가치관이며, 시대의 정치과 경제는 물론 사회까지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부와 종교라니.

그동안 나왔던 역사책과 다른 <부의 역사>는 새로운 시야를 넓혀주며 쓱쓱 잘 읽히기까지 한다.

지금이야 법과 제도라는 장치로 악과 불법을 막는다고 하지만,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연히 한정된 부와 자원을 가지고 싸우기 마련이다.

저자는 <부의 역사> 가장 앞단에서 왜 부의 역사에서 종교를 빼놓을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고 조율할 수 없는 바로 그 싸움을 인간 위의 존재, 즉 신이라는 고차원적인 절대자로 막으려했다는 것이고 이로써 종교와 부는 역사의 길을 함께 걷게 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사이사이의 역사적 큰 사건들과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종교적 특색에서 묻어나는 부의 흐름은 <부의 역사>를 읽는 또다른 재미도 준다.





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장치

-그렇다면 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이해관계 조정 기능입니다.

종교는 세속을 넘어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욕심 많은 인간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서 신처럼 세속을 초월한 존재를 이용했지만 종교 자체가 세속을 초월한 것은 아닙니다. ... 더 많은 풍요를 찾아서 경제 활동 규모를 크게 만들려고 할 때 광범위한 집단을 구성하기 위하 공동 이념으로서 종교가 필요합니다.

기부와 투자의 등장

-앙코르와트와 같은 거대 사원은 단순히 종교 시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왕족들의 사치품도 아닙니다. 거대 사원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기폭제였습니다.

-앙코르와트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시작된 거대 사원 건설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유인이었고 기능적으로는 경제 유동 시스템이었습니다.

-성장의 파급 효과를 꿰뚫어본 부유층은 적극적으로 사원 건설에 투자 또는 기부를 했습니다. 기부를 하면 왕조에서 다양한 상업적 이권이나 토지 개발 및 개간을 허가해줬습니다. 이런 형태로 캄보디아 투자 경제가 거대한 순환을 이루면서 발전했습니다.

면죄부가 독일에서만 잘 팔린 이유

-푸커가는 알베르히트에게 독일에서 독점권을 갖고 면죄부를 판매하게 했습니다. 알브레히트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독일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판매를 하는 면죄부에는 엄청나게 큰 정치적 프리미엄이 붙었습니다.

-면죄부를 천만 원어치 산 사람보다 1억 원어치 산 사람이 호엔촐레른에 대하 공헌도가 높았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힘을 얻어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거액의 면죄부를 구입한 사람은 요직을 얻거나 농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존재라는 숙명

-인간이 이성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사회를 저절로 공정함과 정의로 이끄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신이라는 초월자와 그 위대한 힘을 느끼고 경외하는 것은 종교적인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인간인 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또는 숙명적으로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과 종교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믿음과 신적 의미의 종교도 물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종교과 부가 어떻게 흐름을 같이하고 있는지를 재밌게 짚어낸다.

예를 들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캄보다이의 멋진 사원, 앙코르와트도 종교적인 의미와 함께 국가적 기부와 투자, 그리고 그런 인프라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고용하는 경제의 힘이 숨겨져 있었다고 말한다. 비슷한 의미로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곳곳에 멋진 성당이 있고 높은 철탑의 교회가 있는데, 이 또한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의 중심이자 부와 기부, 그리고 경제적 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 교화를 중심으로 구역을 나눈다고 하니 의미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학교다닐 때 배웠던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이 외친 독립기념문과 미국전쟁 안에서도 우리는 종교가 어떻게 한 국가와 경제를 왔다갔다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때론 그 종교가 부를 막기도 한다. <부의 역사>에서는 어쩌면 중국의 폐쇄적인 시장 경제가 유교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종교의 영향일 수도 있으며, 이슬람 또한 불로소득이나 이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인 문화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논한다.

그에 반해 유대인들의 빠른 셈과 기막힌 부의 흐름을 읽는 교육들은 유대교를 넘어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부의 상위를 차지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각 국의 종교와 시대상을 따라가다보니 어쩌면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는 결국 비슷한 꼴을 가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와 명예를 나누고 싸우고 화해하는 역사적 모습은 지금의 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 나라의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고 종교라는 이름은 결국 부를 나누기 위한 방편이거나 더 많은 부를 거둬들이기 위한 국가의 표식일 수도 있다.

"신이 만든 부의 역사"라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만든 종교 속의 부의 역사"이다.

하지만 그 종교는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그 신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우리는 더 살기 좋고 행복하고 부를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부의 역사>에서는 이 책으로 경제와 종교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길 바란다고 저자는 말하는데, 이제 우리 삶에 종교는 종교 그 이상의 많은 의미가 있음을 역사의 흐름과 함께 걸어가며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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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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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언가가 내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어떤 통상적인 확신이라든지, 어떤 명백한 사실로서가 아닌, 어떤 병처럼 찾아왔다. 이것은 음험하게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나는 조금 이상하고, 약간 거북한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그것은 한번 자리를 잡고 나자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아주 조용히 있어서, 나는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것은 공연한 걱정일 뿐이다, 라고 스스로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기_1932년 1월 25일 월요일

물체들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것을 만질 수 없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사용한 후에는 제자리에 두고, 그것들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유용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다르다.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데, 이게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 난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과 접촉하듯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이제 알겠다.내가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자, 이제 가야하는데, 마음이 분명치가 않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내게 재능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하지만 난 한 번도, 한 번도 이런 종류의 글을 써본 적이 없다.

...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러면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이 이 책을 썼어. 카페에서 빈둥대던 빨간 머리 친구지." 그리고 내가 이 흑인 여자의 삶을 생각하듯 내 삶을 생각할 것이다. 귀중하면서도 반쯤은 전설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한 권의 책. 물론 그것은 우선은 지루하고도 피곤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놓일 때가 올 테고, 그것이 발하는 약간의 빛이 내 과거 위에 떨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통해 나의 삶을 혐오감 없이 떠올릴 수 있으리라. 어쩌면 어느 날, 나는 바로 이 시간을, 내가 웅크리고 앉아 열차에 오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우울한 시간을 생각하면서,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모드 게 시작된 것은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어"라고 중얼거릴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마침내 자신을 -과거 안에서, 오직 과거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리라.

 

 

 

 

살면서 한번씩 느끼는 구토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천재적인 철학가의 놀라운 소설 <구토>를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또 다른 매력에 반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명언과 실존주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사르트가 소설가로서의 작품성과 인지도도 있었다니 아직 배우고 읽어야할 것이

<구토>의 화자 '로캉탱'은 어느날 문득 "그 무언가가내게 일어났다"는 서스펜스 주인공같은 말로 글을 시작한다.

마치 사르트르 본인의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자전적인 느낌이 물씬나는데 이것, 저것, 그것 등 추상적인 표현과 꽤나 어려운 말들로 사유를 가지고 노는 사르트르의 글은 읽는 재미와 '구토'의 재미를 동시에 주었다. 나만 이렇게 난해한 것인가? 생각이 들 때면 '사르트르 소설'을 검색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공감하며 난해한 글 속에서 많은 의미들을 찾아주었다.

근데 난해해서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는글이 있는가하면, 난해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하며 계속 읽게되는 글이 있는데 사르트의 <구토>도 그런 책인 것 같다.

마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처럼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과 감정은 <구토>의 '로캉탱'에게 어쩌면 삶을 바꾸는 놀라운 하루였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평소와 같은 하루겠지만 그 '무언가가' 로캉탱 안에서 자리잡았다.

처음 <구토>의 제목을 봤을 때 부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삶의 막막함이나 부조리함으로 생기는 어지러움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르트르의 '구토'는 일상에서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안에 아이러니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현상이라고 느껴진다.

물론 하루종일 구토를 느끼면 문제가 있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소설 속 구토의 느낌은 어느 벤치나 카페에 앉아 거리를 보면서,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음에 행복함을 느끼며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처럼 아이러니함 속의 행복과 다짐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서를 접하면서도 어렵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이번 <구토> 를 읽으면서도 다시 읽고, 또 다시 읽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 읽은 이 작지만 강한 힘이 있는 <구토>는 내 이해와는 별개로 사르트르의 사유와 철학을 함께 느끼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불완전함을 함께하고, 만나는 인물들과의 관계와 마지막을 나누면서 '구토'라는 단어와 감정을 이렇게 오래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딘가 사르트르의 다른 글에서 본 것인데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만족스럽지는 못하나마 내 삶의 본질을 표현했다."라고 했다는데

사르트르의 실존과 존재의 치열한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고 사르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말>,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함께 <구토>라는 작품도 소중하게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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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올케와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기분이 고약했다. 죄책감 같기도 하고 소외감 같기도 했다. 차라리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드러내게 될까 봐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래도 희망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남아 있지만 우리 식구에겐 그게 없었다. 엄마도 남아서 그들처럼 하려고 나만 피난을 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미처 그렇게 하기 전에 엄마의 아들은 효자답게 살아서 돌아와 지금 엄마의 품 안에 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저들보다 행복할까. 엄마가 행복하건 말건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에게 중요한 건 내가 여기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게 참을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다.

꿈꿨네, 다시는 꿈꾸지 않기를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 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간에 총질하고, 부부간에 이별하고, 모자간에 웬수지고, 이웃끼리 고발하고, 한 핏줄을 산산이 흩트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나는 강씨가 그 정도로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게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몰랐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일이었다. 오랜만에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까지 들었다.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적당히 못나서 좋았다. 사람의 생각 속에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거기 속할 수 없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은데, 누굴 만나면 우선 저 사람 속이 흴까 붉을까부터 분간해야 하는 관습화된 심보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임진강만은 넘지마

그날을 앞두고 식구들은 잠을이루지 못했다. 벌떡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가슴을 쥐어뜯곤 하는 엄마를 올케가 천사 같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임진강만 안 건넌다면요."

"오냐, 오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든지 임진강만은 건너지 말거라."

올케하고 엄마가 입을 맞추는 임진강 소리가 나에겐 암호처럼 들렸다. 내 마음속에는 삼팔선이, 그들의 마음속엔 임진강이 각각 넘어서는 안될 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임진강만은 넘지마

차차 나도 식구들과 같아졌다. 최소한도로 말했고 최소한도로 움직였다. 무언가 먹긴 먹었겠지만 다음에 무얼 먹을까 걱정하지 않았고, 무슨 맛인지 모르고 먹었기 때문에 먹지 않음과 같았다.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먹는 문제에서 놓여났는데도 여전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살아 있다는 감각도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였다. 우리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동안이지 생각도 안 나게 오랫동안 비곤, 악운, 질병 등 인간의 그늘만 독차지하다보니 드디어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돼 버린 것이다. 마침내 편안해진 것이다.

한 여름의 죽음

나는 혼자 다니는 데 더 익숙했다. ... 구속되기 싫었다. 남을 의식한다는 게 나에게는 일종의 구속감이었다. 남한테 신경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유년기에 이미 형성된 버릇이었다. 일학년 때부터 산을 넘어야 하는 긴 등굣길을 친구 없이 혼자서 다니다 보니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위안이 필요했고, 그건 자신 속에 침잠해 공상을 일삼는 거였다. 그렇다고 내내 외톨이로만 지낸 건 아니다. 엎드러지는 친구도 생겼지만 한때였고 오래 우정을 유지한 친구는 한눈팔거나 딴생각하고 나도그냥 거기 있는 친구였다. 정말 좋은 친구는 화제가 끟긴 동안이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가장 내밀하 소통의 시간이 되는 친구였다.

나는 마모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기를 펴고 싶었고, 성장도 하고 싶었다.

문밖의 남자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그날 엄마가 정릉으로 빨래를 간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에필로그

 

 

 

많은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 박완서 선생님.

이번에는 박완서 선생님의 멋진 책들이 타계 10주기 기념 아름다운 표지로 웅진출판사에서 다시 태어났다.

타계 10주년이라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다시 나타나셔서 그동안에 책들을 엮고, 신간도 내고, 시대에 대한 한탄도 같이 하면서 그래도 삶은 살아가는 것이리라 말씀해주실 것만 같은데 말이다.

박완서 선생님을 처음 알게된 건, 아마도 학교 수업시간.

<엄마의 말뚝>이라는 작품이 짤막하게 실려있는데 시험에도 꼭 출제되니 잘 읽어야하는 부분이었다. 대부분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이 그러하듯 그저 문제를 위한 문제, 작가의 의도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는데 <엄마의 말뚝>을 읽는 순간 몇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그동안 내가 읽은 우울한 한국문학 작품과는 결이 다른, 우울함 속에도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있는 그런 작품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그래도 몰랐다. 박완서 선생님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몰랐고, 읽으면 읽을수록 빛이 나는 작품인지도 몰랐다.

더 커서도 몰랐다. 40살 이후 등단하신 기적같은 분이라는 것과 한국문학의 정수라는 말들을.

이제는 그때보다 책을 아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잘 모르지만,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세대라는 사실에 무한히 감사함을 느낀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책 소개를 읽어보자면,

"미완으로 끝났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작이며, 작가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다" 라고 말한다.

미완으로 끝났던 작품의 후속작...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작품...

워낙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풀어서 이야기를 담아내는 박완서 선생님 답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도 처절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각기다른 주인공들의 삶이 펼쳐진다.

주인공 '나'가 스무살이 되던 1951년부터 1953년 결혼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장편소설은 박완서 선생님의 실제 연작 자전소설로도 유명하다.

어떻게 그렇게 살지요? 라는 물음이 절로 나오는데 아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질문하면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만 같기도 하고.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주인공 '나'는 1951~1953년이라는 한국전쟁 전후의 한참 힘들었을 시기가 배경이다보니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우여곡절들을 겪는다. 이것이 인생인가, 이것이 사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들만큼 살아가는 것보다 죽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런 '나'에게도 많은 인물들의 만남이 있다. 모두가 피난을 간 서울 한복판. 자기네 식구만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우연히 알게 된 '강씨' 아주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그로 인해 알게된 인민위원회 사람들. 가족들을 두고 홀로 피난을 가면서 함께한 '근숙이 언니'. 그리고 그 언니를 통해 취직한 한국물산 '파마자부'와 피엑스 생활. 무엇보다 이제 반평생을 함께할 반려자 남편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 일들까지. 그리고 남보다 못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피는 불보다 진한 '나'의 일가친척 가족들까지. 주인공 '나' 한 사람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

'그래도 '엄마'와 '오빠'인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무심하고 철없어 보이는 그 둘의 대화를 보면 마음이 아린다. 사람이 힘들면 어려진다고 했던가. 다리에 총상을 맞아 종아리에 총구멍이 뚫린 '오빠'는 박완서 선생님의 다른 많은 작품들 속 '오빠'처럼 1인분의 몫, 제 구실을 못한다. 걷지 못해 피난도 가지 못한다. 훗날에도 올케와 '나'의 노력을 인정해주기는 커녕, 자기 힘든 속만 말하니 원.

주인공 '나'에게 '엄마' 또한 마음껏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애증의 관계이다. 워낙 시대적 배경이 남자, 남자를 외치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 그렇겠지만 사실 지금도 남아있는 그 풍토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설움이다. 더구나 어렸을 때 무방비상태로 당하는 남녀차별의 한방이란. 지금도 한번씩 트라우마처럼 떠오르는 기억들은 아마 어른이 되어도 평생 가겠지만 그 아픔을 '나'가 조금 달래준다.

"할머니는 그럼, 작은아버지 지게 지는 것만 속상하고 작은 어머니 광주리 이고 다니는 건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우리 근본이 뭔데요. 작은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면서기 하신 거? 그건 할머니, 일본놈의 아전 같은 거예요. 창피해요, 창피해. 그것 때문에 해방되고 나서 친일파라고 동네 청년들이 우리집 깨부수고 난리 친 생각도 안나세요?"

참다 참도 보다못한 '나'가 이번에는'할머니'에게 가하는 따발총이다. 자기 자식(남자) 힘든 것만 알지 남의 자식(며느리)과 식구들(딸, 손녀) 힘든 건 눈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이 다 화가난다. 결국 서울대학까지 갔었던 이 시대 인텔리, '나'는 참을 수 없다. 아마 박완서 선생님 본인의 투영이리라.

어렸을 때는 일상 생활에서나 책과 영화 속에 이런 장면들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시대에 화가 나는 분노를 느꼈다. 왜 악습을 계속하는 것일까를 고민하던 찰나에 이제는 어느정도 양보하게 된다. 그래 그 시대는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보고 자라며 배우지 못해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배경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주인공 '나'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이 거친 세상을 살아남은 패기를 응원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인물들의 인생이 참 기구하고 연민이 든다. 불쌍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말로는 십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을만큼 일반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시련이 닥쳐온다.

수많은 전쟁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의 배경이된 한국전쟁이 가져온 피해와 상처는 개인을 이렇게 파괴할 수 있구나. 서적과 자료로만 보던 상처를 소설 속 '나'와 인물들에 투영해서 아주 조금이나마 함께 느껴봤다. 전쟁의 아픔을 없앨 수는 있지만 이후 세대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최소한의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박완서 선생님의 너무 좋은 글들은 그래도 어찌됐든 살아갈 수 있다는, 살아가게 된다는 희망이 있다. 그래, 죽으란 법은 없을거야. 하는 희망이.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고 악다구니 받쳐서 외치는 말들도, 내 안에 참고 참았던 설움의 울음이 터지는 순간도 모두 소중하다.

박완서 선생님은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같은 작품들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시대를 함께 나누는 순간들의 기록은 박완서 선생님의 글처럼 아름답다.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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