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크리스마스 이브, 시내 중심가에서 눈꽃축제가 성황리에 열리는 현장을 뉴스로 지켜보았다. 하늘에서는 눈꽃이 흩날리고 아이들은 빙판에서 썰매를 신나게 타느라 여념이 없으며, 연인, 친구들과 포토존에서 이쁜 추억을 담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의 정취를 맘껏 누리고 있었다. 특정한 날이 가져다주는 행복한 순간을 즐기는 데에는 종교적 의미는 이미 퇴색되어 있지만 모두의 마음에 따듯한 외투를 둘러준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프랑스어이자 탄생을 의미하는 <노엘>을 지금 읽는다면 그 분위기에 동참하게 될 것 같다. 미치오 슈스케라면. 그는 이미 동화풍의 소설도 낸 적이 있으니 미스터리가 아니라도 선뜻 손에 들어보게 될 것이다.

 

 

게이스케는 1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바로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는데 어려서부터 글쓰기가 특기이자 취미였던 게이스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나름 유명한 동화작가 되어있다. 동창생들을 기다리던 게이스케는 야요이의 참석여부가 문득 궁금해진다. 중학생 시절 게이스케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아이들의 멸시와 학대를 당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일 때문에 늦으시는 엄마, 춥디추운 방에서 루돌프 사슴 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 동화창작의 출발이었다. 아이들의 구타 속에서 점차 지켜가던 그에게 한 소녀가 다가온다. 야요이라는 이름의 소녀와 친해지면서 두 사람은 이성의 감정을 조금씩 느끼게 되는데 게이스케는 글을 쓰고 야요이는 그림을 그리는 협업을 통해 둘만의 동화책으로 위안과 동질감을 나누던 두 사람은 또 다른 여자아이까지 휘말린 어떤 불행한 사건에서 오해가 발생하여 그만 절교하고 만다. 그리고 지금, 그녀 생각에 호텔 문을 나선 게이스케는 갑작스레 택시에 치어 쓰러진다.

 

 

내내 그랬던가. 게이스케와 야요이는 부모의 부재에 따른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게이스케야 뻔한 것이고 야요이의 아버지는 엄마를 폭행하고 딸의 알몸사진을 찍는 등의 인면수심에 파렴치한이니 애초에 두 사람 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다른 친구들이 외면하는 게이스케에 눈길이 자꾸 가는 야요이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니 타인의 불행에 자연스런 연민이 생기 수밖에. 그렇게 둘 만의 공통 관심사로 동화책을 만들며 풋풋한 사랑을 키워나가기를 응원하고 싶었는데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고 슈스케가 그냥 이쁜 사랑 하세요, 라고 배려할 사람이 아니지.

 

 

입만 놀리면서. 늘 내게 마음을 쓴다고, 배려한다면서 아무 것도 해주는 게 없다며 엄마를 원망하는 야요이의 말 한마디가 나비효과라도 불러오기라도 한 것일까? 그날의 불행한 사건에도 엄마의 무관심이 한 몫 했거니와 결과적으로 자신을 진정 믿어주지 않는 게이스케에 대한 원망이 포함된 것인지도 모른다. 야요이에게 등 돌려 절교하는 게이스케를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은 쓰라리다. 네가 힘들 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 준 건 바로 나였어. 수업 중 게이스케를 깊은 눈길로 내내 응시하는 야요이의 모습은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계속 맴맴 돌 듯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진실을 알고서는 가책을 받고 대신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데 너무 잔인한 설정에 심한 몰입에 빠져 버렸나 보다.

 

 

저기다. 야요이는 여전히 게이스케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게이스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경멸이 담기거나 야윈 개를 동정하는 듯한 어두운 눈이 아니라 야요이는 그저 차분하게 게이스케를 시야 중심에 잡아두고 있었다. - p.29 -

 

 

그래서 나는 이야기의 향방이 14년 후에 재회하게 된 그와 그녀의 용서와 화해로만 전개되지 않을까 성급한 예상을 해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다리가 굽혀 지지 않는 장애와 엄마의 임신으로 짙은 소외감을 느끼다가 게이스케가 쓴 동화를 읽으며 상처를 극복한 리코, 은퇴 후 아내를 잃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려 자살을 계획하는 요자와도 게이스케의 동화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구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야기가 가지 의미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힐링이 된다는 가슴 따듯한 의도는 분명 나쁘지 않다.

 

 

그러면서 시한부 삶을 살며 투병 중인 리코의 할머니에게서는 오랜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을 떠올리며 간병에 지친 자녀들의 한숨은 크리스마스는 누군가에겐 기쁨이지만 누군가에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절망이라는 현실을 직시한다. 비록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의 빛이 되고 구원의 손길이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는 잘 알겠다. 루돌프 사슴 코 이야기는 대중에게 친숙한 캐롤을 대상으로 삼아 편하고 훈훈하게 다가오지만 그 후의 동화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따라간 것처럼 쉽사리 동화되기 어려웠다. 와 닿지 않는 이야기들을 배제하고 계속 더 몰입할만한 구도는 없었을까? 중반까지의 몰입과 상반되는 중반 이후의 이탈은 그래서 불확실한 감상만을 남긴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에는 공감이 가나 해법을 이해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진정한 힐링 스토리가 되기엔 많이 역부족이었다. 아, 뿜겠네. 그래도 올만에 읽은 슈스케의 소설인데 이러면 안 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 - 지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개정증보판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문예춘추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헤르만 헤세는 아마도 괴테와 더불어 독일인들의 내면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대문호이자 다른 한 편으로는 문명정신과는 이질적인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유년시절부터 헤세의 인간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을 키워준 힘은 그가 자란 독일의 산간도시와 알프스 산맥의 산간마을의 자연에서 자연스레 형성되었으니 개인적 삶과 체험에서 축적된 세계관에는 그를 독일스러움과 그렇지 않은 면을 동시에 갖춘 상대성이 깊이 서려있다 봐야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출간된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는 예전에 이미 국내에 선보인 적 있으나 누락된 분량의 한계를 복원하여 새롭게 개정판으로 다시 소개된 셈인데 산문집의 형식을 빌려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개인적 감성을 응축한 문체로, 조화와 이상을 꿈꾸는 현대인들을 과거로의 향수에 젖게 만든다. 그 운치와 푸근함이 진정 세련되었으니 깊이를 논해서 무엇 할까? 

 

 

그리고 원래 국내제목은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가 아니었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차라리 잘된 일이다. 내가 떨쳐버리려고 해도 어느새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는 그 표현이 얼마나 감성을 자극하는 지, 그리움이 동반하는 외로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데 글로만 빛나는 것이 아니더라. 헤세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글과 어우러져 한 편의 수채화로 거듭나고 있는데 글만 잘 쓰는 줄 알았던 그에게 이런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작가가 아니라면 화가 겸업도 가능할 그 비범함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따로 전시회로 만나고 싶을 정도로 세상을 보는 순순한 심성이 보석같이 반짝이는 색채로 붓이 캔버스에 펼쳐놓은 낙원인 듯하다. 

 

 

결국 글과 그림을 통해 삶을 살고 사랑하는 일에는 여러 경로가 있음을 그는 말한다. 만남과 작별, 탄생과 사멸, 자연이 빚어낸 꽃망울과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나그네를 숭고한 고향으로 이끈 세상만물의 공로에 예찬을 늘어놓으며 경이로움에 젖는다. 맹목적인 소유욕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헤세의 지혜 앞에서는 성숙된 인간만이 꿈꿀 수 있는 단순함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욕망에게 속박되어 있는 나, 그리고 현대인들이 새삼 자유로운 영혼 속에서 살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무의미하게 소모되고 있음이 안타까워 그렇게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자연과 인간, 예술을 이해하려 고뇌했던 헤르만 헤세만의 치열한 여정은 모든 사소한 일에도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조국 독일이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에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따뜻한 시선과 온기가 시간을 초월한 시공간 속에서 여전히 공감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그 섬세함에 마음은 무장해제 되어 버리니 헤세의 글과 그림이 인도하는 대로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보자. 슬그머니 추운 겨울 옆구리를 녹이는 감동이라는 환희에 온 몸이 떨려올 테니. 이것이 헤르만 헤세 식 미학적 진수이다. 동경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ㅣ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멕시코 만의 한 예인선, 한 남자가 굳어진 시멘트 통에 두 발을 담근 채 서 있다. 12인의 총잡이들이 뱃전에 서 있는데 아무래도 이 남자를 물고기 밥으로 던져버릴 작정인가 보다. 이 남자 조 커글린은 인생에서 순간의 선택이 운명의 주사위를 어떻게 굴릴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잔인함을 뼈저리게 통감했을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무모한 도박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금은 소설에서 미래를 먼저 보여줌으로서 필연인지 우연인지 판단하기 힘든 그날이 궁금하게 만든다.

 

 

시대적 배경은 미국 범죄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시기로 손꼽히는 금주법 시대로 설정되어 있다. 미국의 금주법은 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전시의 식량절약, 맥주를 만드는 독일인에 대한 반감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1917년 미국에서 알코올 음료를 양조·판매·운반·수출입을 금지하는 미국헌법 수정 제18조가 1920년 1월 발효되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법망을 교묘히 피해 간 밀조·밀매 등에 따르는 갱들의 범죄가 대폭 증가하여 통제에는 태생적 한계를 보임으로서 마침내 1933년 수정 제21조에 의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들은 인간의 탐욕이 비정한 경쟁을 낳았던 암투에 대한 동경이나 향수가 부분 존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전작 <운명의 날> 이후 금주법 발효 6년이 경과한 시점을 그리고 있는 <리브 바이 나이트>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보스턴 경찰 간부로 재직 중인 아버지를 두고 있지만 자신은 친구들과 강도질을 일삼는 범법자이다. 아버지는 범법자를 단속해야 하는 입장과 아들을 보호할 수 밖에 없는 후견인의 양 갈래길에서 딜레마에 빠져있는 진퇴양난의 입장이라 조 커글린에 대해서는 다른 아들들보다 애증이 깊다. 하지만 조 커글린이 불법 도박장을 털다 보스턴 마피아 조직의 보스 앨버트 화이트의 정부인 에마 굴드를 만나 위험한 사랑에 빠진 것이 문제다. 그녀와 사랑의 도피를 하고자 은행 강도짓을 하다 감옥에 잡혀 들어간다.

 

 

 

감옥 밖에서는 범죄조직의 말단이었지만 감옥 안에서는 보다 이 세계에서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맞게 되는데 마피아 조직의 보스 마소 페스카토레를 만나게 된 일이다. 마소는 조의 아버지를 이용하여 경쟁조직을 소탕하도록 압박을 가하지만 이를 거절한 아버지가 아들의 신변을 염려하여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모습에서는 그도 한낱 보통남자였을 뿐이었다. 세상 누구에게서도 발견하게 되는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 모습에 진정 안쓰럽고 눈물이 난다. 결국 조는 마소의 목숨을 구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어 출소 후 조직을 물려받아 남부 플로리다에서 밀주와 카지노사업으로 성공하게 된다. 이후 조가 이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경쟁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숨 가쁘게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이다.

 

 

낮보다 밤이 더 익숙한 남자들의 세계는 언제나 부와 권력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제시하지만 약속을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곳이 아니던가? 이 남자들도 낮에는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야 키우기 수월하다며 덕담하는 훈훈함을 보이지만 어둠이 짙어지면 악수를 내미는 대신에 총부리를 들이대면 언제든지 난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낮에 서투른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만족이란 바로미터가 없다. 자신을 마피아가가 아닌 치외법인이라고 주장하는 조의 의중과는 달리 끝없는 탐욕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거리낌 없이 까발리는 피비린내는 전쟁을 치르다보면 의리는 땅에 떨어지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통의 연속이 되어버린다. 내내 뒤를 돌아보며 살아야하며 세상의 규칙에 따르기보다 남자 스스로 만드는 밤의 규칙을 더 신봉하는 조에게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점이 증명된다.

 

 

 

 

조의 삶은 소중한 사람들을 비극에 내모는 애도의 현장에 항상 내몰려왔다. 감옥에서 상대조직으로부터 마소의 살해를 지시받았던 일, 도전장을 내민 RD 프루잇과의 담판, 예인선의 시멘트 통에 발을 담근 일,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 등, 불법이고 더러운 일에 파리가 꼬이는 것은 당연한 일, 유색인종에 이민자들이 한데 뒤섞인 조직을 불순하게 바라보는 인종차별적 위협, 뇌물과 거래한 권력과의 결탁 등 부정부패와 추악한 권모술수가 난무했던 미국의 암흑기를 편협하고 잔인할 정도로 실감나게 그려낸다. 단 한순간도 주저함 없이 일사천리로 질주하는 서사의 힘은 온전히 데니스 루헤인의 필력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2등이 없는 비열한 거리에서 운을 낭비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말대로 조는 위기 상황에서도 기본을 망각한 무리들에게 책임을 묻고 나약함 대신 무자비한 보복으로 응징했으니 현실에선 금기지만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매혹될 만큼 매끈한 이야기 구조여서 만족스러웠다. 영화화하기에 더 없이 적합한 구성답게 벤 에플렉 연출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2015년에 영화화되어 개봉된다니 기대가 실로 크다. 책 표지에서는 조니 뎁이 언뜻 연상되는 점도 있는데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조니 뎁 주연도 좋을 것 같다. 네 사람을 어떤 식으로 연출, 주연으로 패를 섞어도 모두 합격점이리라. 그런데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 감독과 스노우맨을 한다더니 소식이 없네. 물 건너간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띠리띠리 2015-02-2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런거 좋아요^^

유마 2015-02-23 18:36   좋아요 0 | URL
넵. 이 책 참 잼나죠 ^^
 
아 아이이치로의 도망 ㅣ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의 매력이라 한다면 전적으로 주인공에게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 이름부터가 괴상하지 않은가. ‘아이이’인지 ‘아아이’인지, 수시로 헷갈리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간단히 ‘아’로 줄여 부르는 것이 편하다. 저자 ‘아와사카 쓰마오’도 글자 순서를 뒤섞은 애너그램으로 필명을 만들 정도니 주인공 이름만이 아니라 이 시리즈 내내 곳곳에서 비슷한 발음에서 착안한 언어유희로 유머를 시도하는 것은 일본소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자 이 시리즈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제 ‘아’시리즈도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다. ‘낭패, ’사고‘에 이은 ’도망‘은 전작들의 재기발랄한 유머와 위트, 발상과 트릭, 캐릭터까지 똘똘 뭉친 이색추리세트의 방점을 찍는다. 독자들을 속인다는 트릭은 일견 기상천외하면서도 인간심리가 추종하는 편견이라는 맹점을 교묘히 비틀고 있기도 하다. 그것을 추리하는 과정은 엉뚱하지만 견고한 논리를 내세워 어설프다 욕할 수 없을 정도의 즐겁고 유쾌한 체험이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인상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자. 아카시마 섬에는 ‘서 일본 나체주의자 클럽’ 이 운영하고 있는 나체촌이 있다. 일체의 문명이기와 격리된 채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모태로 모인 사람들은 알몸으로 지낸다. ‘아’가 이 섬에서 물고기 사진을 찍겠다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가운데 괴한이 나타나 이들을 위협하며 한 여자를 납치하려는 소동이 일어난다. 사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괴한이 납치하려하는 여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아’의 예리한 관찰력은 사람들이 자칫 놓치기 쉬운 작은 단서에서 진실을 유추해내는 것이다.  

 

 

 

거대한 스케일의 환상트릭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식의 입장은 <구형의 낙원>에서도 즉시 적용되니까. 종말에서 혼자 살겠다고 만든 거대한 구형의 방공호에서 숨진 대부호가 있다.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안전의 결정체에서 외부의 침입도 없는 상태로 죽은 대부호는 자살이었던가? 그렇게 사건을 위장은폐 하려한 범인의 수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안에 가둬두고 신체에 충격을 가하는 방식은 고정관념을 노린 참신함(?)에서 아이디어가 돋보여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진정한 의의라면 항상 사건현장에서 얼쩡거리는 얼굴이 세모꼴이고 정장을 한 노부인의 정체가 마침내 밝혀진다는 점이다. 추리가 어떻고 트릭도 어쩌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노부인의 정체가 너무나 신경이 쓰여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기에 앞서 우선 ‘아’의 정체를 아는 것이 급선무다. 알다시피 그는 각종 잡학 방면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가이자 꽃미남에 세련된 패션까지 갖춰 가는 곳 마다 여자들의 폭풍 같은 인기를 한 몸에 누리고 있는 남자다. 한데 비주얼의 환상은 얼빠진 말과 행동으로 산산이 깨어지고 실소를 금치 못하도록 만들지만 가설로 펼치는 추리능력만큼은 누구도 부인 못할 탑 급의 수완을 발휘해 왔다. 

 

 

 

그런 그를 보며 여자들이 외모에 반해 공통적으로 떠올렸던 특정신분이 사실 실제였다는 걸로 드러나고 노부인의 정체도 ‘아’의 신분과 연관 있는 것임이 추가로 알게 되면 자연히 아, 그런 거였나? 라는 반응이 따라 나오게 된다. 노부인이 ‘아’의 주변에서 항상 맴돌았던 이유는 지극히 타당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에피소드는 올스타전이다. 화려하고 정겨운 피날레로 마침표를 찍게 되니 모든 상황은 얼렁뚱땅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설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시켜준다. '만일 탐정 명단이 만들어진다면 일본어, 알파벳 어떤 순서로 정렬하더라도 맨 앞에 올 수 있도록 '아 아이이치로'라고 이름 지은 것'이라는 작가의 의도대로 유머 감각과 논리의 조화만큼은 시대를 초월한 즐거움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이고 유쾌하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 요절복통이여 굿바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녀가 죽은 밤 ㅣ 닷쿠 & 다카치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SF 본격 미스터리 계열로 포문을 열었던 니시자와 야스히코와 가진 두 번째 만남은 SF의 딱지를 떼어낸 청춘 미스터리 소설이다. 이 작품 <그녀가 죽은 밤>은 대학생 네 명을 주인공으로 한 ‘닷쿠&닷키치’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SF적 설정은 없지만 현실을 무대 삼아 본격 미스터리 계보에서는 다소 벗어난 듯 독특한 논리와 유머, 서술이 돋보이면서 역시 이색적이며 개성 강한 미스터리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집안이나 각자의 사정은 다르겠지만 여대생 미오의 집안은 부모님 모두 교육자로서 딸에게 엄격한 통금시간을 강요하는 고루하고 보수적인 가풍을 가지고 있다. 통금시간이 오후 여섯 시일 정도였으니 답답한 마음에 일탈을 꿈꾸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니, 천우신조일까? 미국 플로리다에서 홈스테이 할 기회를 얻었는데... 한데 미오는 대학 동창생들과 환송회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더니 웬 낯선 여자가 거실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또한 여자의 옆에서는 스타킹에 잘려진 머리카락 한 뭉치까지 발견된다. 

 

 

미오의 입장에서는 생면부지의 여자로 인해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다면 성가심을 물론, 홈스테이 일정까지 차질을 빚을 지도 모를 초조함이 엄습할 것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이해할 것도 있고 친구들에게 뒤처리를 부탁한 무책임함에 이기적이다 비난할 수도 잇을 것도 상황이었다. 사건의 해결을 위해 등장하신 네 사람은 다양한 사정을 개인의 입장에서 변주하고 대처함으로서 배는 하나인데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갈 처지에 놓이게 된다. 

 

 

좌충우돌에 주책은 한 바가지요, 진지함이라고는 여간해서 찾기 힘든 ‘보안’ 선배와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사각지대까지 포착해내는 예리한 사고를 지녔지만 그것이 지나쳐 종종 삼천포에까지 발을 들여놓은 ‘닷쿠’. 특히 사건의 배경을 미오 부모님의 엄격한 가풍에서 도출하여 사회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문란한 사생활로 연계시키는 상상력만큼은 이번 작품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닷쿠’라는 캐릭터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동시에 그의 활약이 계속 보고 싶어서라도 후속작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맘이 굴뚝같게 한 데 있어서 일등공신이다. 

 

 

이 시리즈의 또 한 축인 여대생 ‘다키치’는 평면적 여성 캐릭터 대신 시크하면서 중성적 느낌에다 ‘닷쿠’의 추리가 가진 현실성 결여에 일침과 보완을 해 줄 수 있는 서포터적인 요소가 강했으니 아마도 다음 편에서는 그녀의 활약이 전면에서 부각되는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또한 ‘보안’ 선배와 티격태격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신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그의 부인처럼 결을 떠나지 못하고 챙기는 모습에서 남녀관계의 재밌는 일면을 보는 것 같은 즐거움이 있다. 같은 남자라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가장 정이 가는 주인공은 단연 ‘보안’ 선배이기도 하고.   

 

 

여기에다 ‘미오’를 좋아하는 마음에 시체의 유기를 떠맡은 동급생 ‘간타’까지 사건 해결을 위해 일동이 나서지만 해결방안은 보이질 않고 럭비공처럼 마구 통통 튀다가 마지막에는 사회 미스터리 고유의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과 범행동기가 가진 모순이라는 단어가 술이 가진 알코올이라는 마력을 빌어 드러난다. 과학적 물증만을 인정하는 ‘링컨 라임’이나 거구의 몸집이라는 신체적 핸디캡으로 인하여 조수 ‘아치 굿윈’을 이용하는 ‘네로 울프’와는 또 다른 형태의 취중추리라는 는리에는 명탐정도, 유능한 경찰수사도, 피가 튀고 살을 도려내는 끔찍한 살인방식도 등장하진 않는다.

 

 

다만 술이 아니고선 나올 수 없는 기괴한 망상들이 낳은 가설과 가설의 무한 변주가 높은 확률에 도전할 뿐이다. 결코 프로가 아니며 사회에 아직 물들지 않은 그들만이 제시할 수 있는 청춘 미스터리라는 재미만큼은 신선했다고 보여 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