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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ㅣ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를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 2013년 상반기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의 영예에 빛나는 이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나 미쓰다 신조 같은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들과 순위권 경쟁에서 멋지게 제압했다는 점에서 더욱 호기심이 동했던 케이스다. 그런 기대감에 <곤걸>과 더불어 2013년 스페셜리스트로 일찍이 점찍어 둔 이 소설은 실로 경찰소설의 백미라고 감히 추켜 세울만한 대작이었다.
쇼와 64년(1989년) 한 소녀가 유괴된다.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사건해결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소녀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채, 범인도 놓쳐버린 미제사건은 “64”로 불리면서 14년이 지나 이제 공소시효 만기가 코 앞에 놓여있다. 사건 “64”의 해결을 독려하고 유족을 위로한다는 취지에서 경찰청장의 D현경 시찰 일정이 잡히는데 “64”를 빌미삼아 주도권을 놓고 경찰 내부 조직간의 헤게모니 게임을 그리고 있는 “64”는 7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아니 10년간의 집필기간에 더 놀라야겠지만 단단하고 뜨겁게 탑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라가면서 독자들을 끝내 코너에 몰아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적유희도 속도감도 트릭도 반전도 없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것들을 상쇄할만란 클라스가 분명 존재한다. 아래에서 다루어보자.
경찰과 언론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인가?
주인공 미카미 경정은 예전 D현경의 형사부 소속 형사출신으로 지금은 인사발령에 의해 홍보실 소속의 홍보담당관으로 근무 중이다. 현장에서 잔뼈 굳은 형사로 남고 싶었던 바람은 조직의 원칙 없는 인사에 의해 원치 않는 보직을 맡게 되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홍보실을 개혁하여 소신 있는 홍보행정을 꾸려나가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한 변수가 되는 건 언론과의 관계 설정이다.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관련자들의 실명 공개여부와 내막을 어느 수준에서 조절하여 정보를 기자들에게 제공하느냐는 포인트는 소설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저울의 추를 맞출 수 없는 시소게임의 원동력이 된다.
소설에서 가장 핫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카미의 보직이 현장이 아니라 홍보라는 점에서 무게가 더 쏠리는 것이다. 수사상의 기밀보안 유지와 국민의 알 권리 사이에서 피칭과 캐칭처럼 왔다 갔다 하는 볼은 누가 보던 쉽사리 결정내리기 힘든 뜨거운 감자일 것이다. 진실을 호도하지 않겠다는 정보제공자와 인권의 보호라는 대명제를 겸허히 수용할 수 있는 현명한 정보 활용자라는 균형 잡힌 관계설정이 미카미의 고뇌와 결단이 수시로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타협을 보는 과정과 결과가 대단히 아슬아슬하다.
그러면서 호흡이 절로 가빠지도록 설정한 작가의 탁월한 시놉시스가 돋보인다. 박수 짝짝!
경찰의 혁신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D현경의 양 축인 경무부와 형사부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조직의 인사관리와 현장수사를 맡고 있는 부서 간의 대의명분이라는 밥그릇이 한 그릇 밖에 없다는 공급의 원칙에서 출발한다. “64” 사건을 해결 못했으니 이에 책임을 물어 중앙이냐 지방이냐는 별개로 능력 있는 인사정책만이 경찰조직의 동맥경화를 방지하고 효율적인 조직으로 쇄신 가능하다는 경무부는 중앙이라는 막후의 인사권을 등에 업고 화이트컬러의 정책을 실현하려 한다.
이에 반해 현장에서 민생치안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형사부는 블루컬러를 대변하여 중앙 집권식 통치에 반발, 자주적 경찰인사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기를 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전직 형사부 출신이라는 경력은 미카미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양 측 어느 쪽도 확실한 명분의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해 박쥐, 심지어는 경무부의 개 취급당하면서 무엇이 D현경을 위해 최선의 선택인지 고민하여 끊임없는 혼 란 속에서 불협화음을 봉합하고자 동분서주하는데 어느 조직에서도 볼 수 있는 라인은 있다.
어디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역적도 되었다가 충신도 되었다가 하는 식의.... 앞서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그랬지만 경무부와 형사부의 갈등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고 선 미카미의 행보는 여러모로 애처롭고 안타까우며 예측 불가능한 미스터리를 서스펜스화하여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연민과 대작 경찰소설의 품격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64”라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
14년 전 유괴범에게 딸을 희생당한 아마미야가 선택할 수박에 없었던 일련의 행보들은 또한 어떠한가? 수사의지를 천명하고자 하는 경찰청장과 D현경에 대한 불신에서 모든 것을 상실한 아버지가 보여준 반전(반전은 분명 없지는 않다.)은 세상 모든 것을 바꿔서라도 억울한 죽음을 보상받고 싶은 절절함이 폭풍이 휩쓸고 가듯 맘을 쥐어짰다가 결국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 열린 결말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애절한 부정 앞에서 그 누가 눈물짓지 않을 수 있으랴?
마키미도 자신을 못난 외모를 닮은 딸이 절망해 가출하고 만 작금의 고통 앞에서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통하게 되는 서글픔에 따라 오열하지 않던가 말이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항상 수퍼맨이 되어야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자화상을 떠올리면서 문득 과거 일본 후쿠오카를 여행했던 기억도 중첩된다. 동료들과 파친코에 들렀던 일, 물론 나는 룰을 몰라 잠시 구경만 했는데 그 파친코 장의 여자 직원이 무척이나 추했다. 여자의 외모엔 관대한 나로서도 도저히 정면으로 응시 못하고 외면해야만 할 정도의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데 그 당시 저런 외모로 살아야만 하는 그녀와 그녀를 낳은 부모는 어떠한 심정일까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보았다.
외모지상주의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중 한 사람인 나는 그녀의 활짝 피지 못한 미소를 기억하면서 미카미와 어린 딸 아유미를 연관 짓게 되더라. 파친코의 그녀도 아유미도 분명 지금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고 있으리라. 집 나간 아유미도 아버지가 보고 싶어 집으로 돌아 올 것이고. 그러면서 멀게만 느껴졌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하는 미카미의 심경변화는 미스터리 소설에서도 소중함의 가치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소설 “64”는 경찰소설의 최고봉이자 인생의 경륜을 오롯이 써내려간 올해의 미스터리가 될 것 같다.
그런만큼 뜨겁고 단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