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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이번에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 라디오 시리즈를 꺼내 들었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라고 역시 앙앙에 수록 연재되었던 50편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 것이 시리즈의 1탄이라고 하는데 왜 순서대로 출간되지 않았는지 내심 궁금해진다. 그러한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같은 이전 제목과는 달리 이번 것은 채소나 동물이 의인화 되어있지 않다. 그냥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라....
그런 그런 이번 에세이도 여전히 천연덕스럽고 능청스런 익살과 해학이 있어 즐거운 독서가 가능했다. 우선 <리스토란테의 밤>을 들여다보자. “어느 특별한 밤에, 어느 특별한 여성과 아오야마의 어느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그래봐야 결국 아내와 결혼기념일을 축하한 것뿐이다. 뭐야아아, 시시하게, 시시하지 않나? 성격 급한 나는 이 문구의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뭐야아아, 이 아저씨 어떤 여성을 만나 밀회를 즐긴 거야?” 라며 혼자서 엉뚱한 오해를 해버렸다.
근데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된다고, 결혼기념일에 아내랑 외식했단 결말에 초반부터 파안대소하였다. 그런 비도덕적인 시나리오가 버젓이 나올 리도 없지만 결국은 일부일처제에 대한 귀여운 푸념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기혼남들의 감춰진 응큼한 속마음을 짧은 문구 속에 숨겨진 반전과 경쾌한 해피라이프를 잘 압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키란 남자는 이런 사람이다. <리스토란테의 밤>의 그 뒷이야기는 기억에 남지 않는데 오직 서두만 기억에 남을 뿐.
<불에 태우기>는 또 어떤가? 소설가라는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이상한(쓸데없는) 일에 연연하는 인종이라고 자가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왜 또, 뭐 이런’ 같은 반응을 부르는 일에 신경을 쓰여 미치려고 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인용하는 일화가 70년대에 여성해방 운동을 부르짖던 페미니스트들이 그 주장의 일환으로 브래지어를 태운 일을 언급한다. 남자여서 그 물건이 속박하는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알 길 없어 불평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냥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엉뚱한 발상을 그대로 전파해버린다. 새 것이었는지, 아님 착용하던 것인지에서 시작하여 다른 여성용품들은 왜 태우지 않고 브래지어만 희생양이 되었느냐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쓸데없는 잡설에 불과하다고 일축해 버린다면 하루키의 라디오 시리즈를 읽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다.
그런 외전 격인 상상들은 소설가로서 집필을 하는데 있어 원동력이랄까 소재로도 활용이 가능할 것이고 그 점은 일상의 정해진 루트대로 반복적인 경험과 할당된 목표에 대한 기능적 걱정에만 고착화 되어있는 나 같은 현대인들에게는 상상력의 부재나 고갈을 창의적인 발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극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눈앞에 보이는 그 현상 이외의 사실에 대한 고찰과 확대 재생산이 전혀 없는 나를 일깨울만한 신선한 아이디어화 하고 싶다. 그래서 브래지어에 대한 이야기는 우스꽝스러운 농담이 아닌 진지하게 읽었던 것 같다. 한가해도 내 두뇌는 이미 굳어간다. 소설가들은 그래서 사고가 유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먹어본 적은 없지만 가키피란 일본식 과자가 있나 보다. 톡 쏘는 매운 맛의 감씨 모양과자와 통통하고 고소한 땅콩이 섞여있는 과자. 잘 배분하여 조화롭게 먹어야하는데 무슨 맛일까? 한 번 먹어보고 싶은데... 이 과자의 구성을 결혼생활에 비유하는 그 센스란... 위엄돋네. 감시가 ‘들이대는’역할로 공격적으로 치고 들어오면 땅콩은 ‘받아주는’ 역할을 맡아 그저 고개만 끄덕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받아칠 줄도 알아야 하는, 그야말로 핑퐁 같은 조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듣고 보니 결혼생활의 조화도 얘기하고 있는 거다. 땅콩을 좋아하는 아내에 투덜대면 가키피에 불균형이 발생하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 협력하며 살아야한다는 것. 슬기로운 결혼생활을 위한 전제조건이자 배려이면서도 일부일처제에 대한 탄식을 잊지 않는 하루키식 해피 라이프는 언제나 솔직해서 좋고 공감백배라서 좋다. 이번에도 하루키의 에세이는 머릴 싸매고 분석 안 해도 되니 더 좋은데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그의 소설과는 여전히 담을 쌓고 싶다. 하지만 그의 유쾌한 에세이라면 언제든지 읽어주마. 대환영일세. 그리고 나도 바쁜 아침에 귀찮은데 전날 저녁에 면도하고 잘까? 나름 괜찮지 않을려나. 물론 다음 날 오후 늦게면 코 밑이 거뭇거뭇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