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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 종말이 오다 - 종말문학 공모전 신체강탈자 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ㅣ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3
최경빈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12월
평점 :
최근 3개월여 동안 밀리언셀러클럽에서 한국장르소설들이 꾸준히, 그것도 연속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우수서평 회원 자격으로 받고 있는 것이지만 실상 외국 장르소설들에 비해 한없이 부족하다는 편견이 깊이 뿌리박혀 있어 기왕이면 한국소설 보다는 외국소설로 받았으면 좋겠다는 푸념이 배어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전정보도 없이 읽게 된 이번 단편집은 “10개월, 종말이 오다”라는 제목의 종말문학 장르인데 좀 더 세분화하면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수상작이라는 생소한 타이틀을 달고 있네요.
신체강탈자문학의 정의랄까, 역사 같은 것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지만 여전히 국내에서는 대중화된 장르는 아니겠죠. <옥상으로 가는 길>이나 <한국추리스릴러단편선4>같이 먼저 출간된 작품들은 여전히 척박한 토양 속에서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국내 장르소설의 현실의 한계를 깨뜨리기 위한 작가들의 치열함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결과만큼은 대박에 미치지 못한 채 편차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큰 기대 없이 읽은 이번 수상작 모음집은 그야말로 기대했던 것 이상의 박력과 흥분이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것들은 진짜였습니다. 당선작 <10개월>을 비롯하여 우수작 5편이 실려 있는데 편차가 크지 않음에 대만족이었습니다. 초속과 종속 차이가 크지 않은, 그야말로 오승환식 돌 직구였던 것입니다.
<10개월>은 어느 날, 갑자기 여자들이 남자로 변해버리는 이야기입니다. 바이러스처럼 전 세계적으로 남자 변이 증후군이 퍼지면서 성비의 균형이 점차 무너지고 여자들의 숫자가 점차 줄어듭니다. 세상은 당연 일대 혼란이 벌어집니다. 어제까지 여자 친구였던 그녀가 수염에 떡대 좋은 남자로 돌변하고 아내이자 엄마였던 여자는 잠이 들면 남자로 변이된다는 소문에 남편과 아이들이 교대로 밤새 지켜가며 뜬눈으로 지새우려는 사투를 벌입니다. 남자였던 여자와 여자였던 남자는 성적호기심에 뒤바뀐 육체로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야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여자의 숫자가 줄어들자 성적충동을 억제 못하는 일단의 남자들이 임산부를 납치해서 겁탈하려는 대목입니다. 임산부는 남자로 변하지 않는 특이현상(?)에 피그미족을 사냥하듯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욕구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이성과 도덕의 마지막 경계가 무너진 말세 그 자체를 이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 적도 드물다 생각하니 충격의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여자들의 수난에, 비록 소설이었지만 남자로서 읽는 동안 미안하고 안쓰러운 맘이 들었고 혼돈의 세상 속에서는 소수자는 다수의 힘에 눌려 언제나 보호받거나 존중받지 못하고 공격당한다는 역사의 반복은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은 결코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는 작가 기리노 나쓰오 식 소신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균형이 무너지면 어떠한 불행을 초래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전달과 함께 우리가 대처해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수작입니다.
<베르테르 증상>은 세계최고 수준의 자살대국이라는 불명예를 얻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는 문제작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최근 발생한 전직 유명 야구선수의 자살이 가져온 충격이 때마침 오버랩 되면서 자살증후군은 전염병처럼 급속도로 펴져나가는 내용입니다. 새삼 산다는 것의 의미와 고민을 되새겨줍니다. 특히 자살을 유도하는 매개체가 물이라니 닥치면 피해가기 어려운 영겁의 저주가 따로 없습니다. 역시 인상적인 소설입니다.
<귀환>의 경우에도 우주 탐사 후, 귀환한 탐사사선이 이미 멸망한 지구의 인류를 탐사한다는 내용인데 기술자들이 장난으로 프로그래밍한대로 자의적 판단대신 입력된 설정대로 탐사를 수행하면서 맞게 되는 기이한 생명체들과의 조우와 임무종료까지... 외국 유명 SF작가들의 작품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종말론적 세계관을 아름답고 처연하게 보여주는데 무엇인가 뭉클함이 가슴 한켠을 치고 올라오는 순간은 말을 잊게 합니다. 그리고 여운이 남습니다. 작가의 범 우주론적 상상력이 뛰아나서 좋았습니다.
<미래도둑>은 <10개월>과 함께 이번 수상작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모두 외계인이라는 전개는 재밌고 독특한 설정이 아니라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죽음의 향연을 보여줍니다. 외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곧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됩니다. 즉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게 되는데, 문제는 아이의 성장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서 단기간 내에 어른으로 자랍니다. 그런데다 아들은 아버지를, 딸은 엄마 이런 식으로 외모와 기억까지 전부 그대로 복제해버립니다. 진정한 신체복제 = 강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제 아들이 남편이 되고 딸은 아내가, 동생이 엄마역할을 같이 하는 대 혼돈의 가족동거가 되면서 근친상간이라는 최악의 악수마저 생깁니다.
이제 원본은 카피본을 죽이려 들고 카피본은 원본을 죽여 먹으려 드는데 그 와중에 벌어지는 살인극은 가족의 근간을 해체하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드러내고 말죠. 극중 복제인간 은혜가 “나랑 같이 죽을테냐.”며 진짜 은혜를 집요하게 쫒아오는 순간은 등골이 오싹하면서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공포스러웠습니다. 뒤돌아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후덜덜함이란 진정 압권 그 자체입니다. 밤에는 결코 두 번 다시 해당 페이지를 넘긴다는 것은 감당키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쩜 이리도 읽는 이의 심장을 조여들어갈 수 있는지 작가의 진정한 능력에 감탄합니다. 향후 주목해야할 국내작가 중 한 명이 아닐까 합니다. 브라보!!!
그 밖에 한국근대문학에 신체강탈 소재를 퓨전화시킨 <운수 나쁜 날>이나 담배로 외계인과 대결하는 샐러리맨의 고군분투기 <금연 클럽>, 걸 그룹과 삼촌팬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야기 <HOOK>(극중 걸 그룹 ‘지소’는 분명 ‘소시’에 대한 풍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아이유’를 연상시키는 비유도 있지요.)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고퀄의 진수를 뽐내고 있어 은연중에 국내 장르작가의 필력을 과소평가했던 저를 반성토록 합니다. 이 수상작 모두가 인류의 종말을 테마로 펼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후유증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강한 중독성과 흡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초에 만난 대박작으로 손색이 없는 필견의 소설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