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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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잎이 생리적 연령에 도달하여 식물에서 이탈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요. 이는 쇠락과 죽음을 암시하며 모두 덧없음의 이미지요, 지나간 날의 달콤함을 떠오르게 하지 않기에 지나간 여름의 향내라는 표현도 찾아보니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표지를 들여다보면 붉은 낙엽이 썩어 쌓인 토양에 언뜻 붉은 피가 저택의 창가와 문 밖으로 흘러내린 것도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작가 토머스 H. 쿡의 작품세계관은 낙관론적인 것과는 거리를 두었음을 미리 고지하면서 삶은 우리가 원하는 행복한 결말로 진행되지도 않을 것임을 동시에 결론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에릭 무어라는 이 남자는 이미 인생의 한파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동차 사고로 죽고 여동생은 병에 걸려 고통스런 죽음을 겪었으며, 형 워렌은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자기 주도적인 인생을 설계해 본 적 없는 낙오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의 부양을 자신의 진로에 걸림돌로 생각하고 독불장군으로 군림하여 숨통을 막으셨던 분이십니다. 유일하게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커왔던 에릭은 이 모든 불행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의심할 뿐입니다. 결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아니 조금도 닮고 싶지 않았던 에릭에게도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인지, 아들 키이스를 대하는 방식이 겉으로는 자상한 아버지처럼 비쳐지지만 아버지의 권위에 맞서지 않고 회피하고 순응하는 어린 시절로 인하여 마음 속 진정 우러나는 이해와 진심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에 의심을 조금씩 키워가던 에릭에게 두번 째 한파가 닥칩니다. 키이스가 이웃집 소녀를 돌봐주고 돌아온 후 그 애가 실종됩니다. 이제 모든 정황은 키이스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면서 진실을 둘러싼 세상의 편견에 맞서면서도 혹시라는 내면의 의심이 또다시 꿈틀거리는 걸 막지 못하게 됩니다. 불신은 아버지를, 형을, 아내를, 아들을 하나씩 집어삼켰다가 내뱉는 되새김질을 하는 와중에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균열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번 시작된 미세한 균열은 마냥 튼튼해보였던 그 축을 소리소문없이 붕괴시켜서 시간을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서 다른 분들도 언급하셨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포커스는 누가 범인이냐 같은 추리적 과정에 기인한 합의적 도출은 아닙니다. 오히려 심리적 갈등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리듬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족의 불행을 이미 겪은 세대원은 다시 한 번 시행착오를 되출하고야 마는 우를 범한 것이죠.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아집을 못 버린 에릭의 끊임없는 의심의 증폭이 모두를 이차적인 불행으로 이끈 것입니다. 어머니를 죽게 한 것은 아버지가 아닐까? 여동생 제니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면? 아내는 딴 남자랑 놀아나고 있는 건가? 키이스가 정말 범인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두가 세상이라는 깨진 병 조각을 벗어나 편온하고 따스한 벽난로가 되고 싶은 마지막 보루의 절망을 지켜보며 우리 모두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부호를 달게 합니다. 더 불편하고 경멸스러운 사람들과 어쩔 수없이 기만과 위선으로 똘돌 뭉쳐 자학적인 동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은 에일리언이 부식성이 강한 액체를 토해내어 우주정거장의 한 층, 한 층을 차례대로 부식시키며 더 낮은 바닥수준으로 향한다는 소설 속 표현처럼 마음 속의 의심과 오해는 가차없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얼마나 끔찍하고 위험스런 결말을 낳게하는지 그 폐해를 낱낱이 그려낸다는 점에서 살인마의 칼날보다 무섭고 뒤틀린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깊이 파고들어 고통의 산물을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모든 아픔을 뒤로 한 채 가족은 화해하고 밝고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게 한다는 허무맹랑한 선택 대신 이럴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라는 듯한 마지막 선택때문에 고통과 슬픔이 극한까지 도달했던 것 같습니다.

 

이로써 우리 모두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보다도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열렬히 아끼고 사랑하라는 명제를 얻게됩니다. 방심하면 그 틈새를 불신이 파고들어 쓰나미처럼 한 순간에 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준엄한 경고도요.... 그래서 소설 속 인물심리 흐름을 조용히 따라가면서 에릭에게 비난을 가할 자격이 없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똑 같은 존재입니다. 그것을 작가는 주인공이랑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죽음을 대하는 취약한 긍정의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이제 <채덤 스쿨 어페어>가 금년 중에 출간되겠지요. 추리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토머스 H. 쿡의 명성을 다시 확인해 볼 좋은 기회가 어서 오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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