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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로후 발 긴급전 ㅣ 미도리의 책장 12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시작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주요 등장인물인 김동인의 인생은 제가 보고 들으며 조사했던 한국인들의 실제 인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 한국인 친구들도 재일 한국인이 가지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생각, 전쟁에 대한 감각 등에 대하여 솔직한 조언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또한 주인공 케니 사이토와 김동인이 맺는 끈끈한 우정과 인연은, 한일 두 나라의 시민들 사이에도 그러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저의 진심이 우러난 표현이기도 합니다.”
1941년 미국은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보다 확실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계 미국인인 케니 사이토 겐이치로를 스파이로 잠입시킨다. 겐이치로가 여러 후보 중에서 선택된 것은 비록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어가 가능했고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다는 경력에다 살인청부업자라는 약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인죄를 눈감아주겠다는 미 해군정보국의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것이다.
겐이치로는 일본인으로 무사히 입국해 미국인 선교사 슬렌슨과 재일조선인 김동인을 만나 도움을 받으며 진주만 기습의 출격지가 훗카이도 인근 에토로후섬이라는 결정적 단서를 얻게 된다. 이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곳으로 떠나지만 일본 헌병대의 집요한 추적에 쫓기게 된다. 한편, 에토로후섬에는 난파 선원이었던 러시아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이자 사생아인 오카야 유키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외삼촌으로부터 물려받은 역참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곳 에토로후섬에 찾아온 겐이치로를 수상쩍게 여기면서도 조금씩 사랑을 느끼게 되고, 겐이치로 또한 마찬가지로 같은 감정이 싹트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미일 개전의 전운은 그를 어쩔 수 없이 임무로 내몬다. 한시바삐 미국 해군정보국에 일본해군 함대의 진주만 기습 출격을 알리는 게 급선무일 터. 이후엔 어떡해야 할까? 그제야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겠지. 그럴 시간이 있을지. 시대만 아니었다면 그녀와 함께 정착해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구나. 임무만 끝나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탈출해서 조용히 살아가야 해.
그간 <제복수사>,<경관의 피>,<경관의 조건> 같은 경찰소설의 대가로 잘 알려진 사사키 조는 <베를린 긴급지령>,<에토로후발 긴급전>,<스톡홀름의 밀사>로 이어지는 ‘제2차 세계대전 3부작 시리즈’를 통해 스파이 소설로도 유명하다. 3부작 중 유일하게 이 책만 국내 정발되었고 그나마 절판되었기에 도서관에서 그나마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진주만 기습을 미국이 정말 사전에 몰랐느냐를 두고 설왕설래하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대로 다른 두 번의 승리를 위하여 한 번 지는 전략을 택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소설은 미국이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정보전을 전제로 하면서 결코 어느 국가에도 속해 있지 않은 아웃사이더들의 치열한 생존기를 촘촘하고 박진감 있게 그려낸다. 주인공 케니 사이토 겐이치로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미국 내 일본자산 동결과 동양인 차별 등을 겪으면서도 일본인이라는 뿌리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철저히 아나키스트를 고집하고 있다. 자발적인 임무수행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국 일본에 대한 스파이 행위에 대한 거부감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파란 눈에 금발의 오리지날 미국인 대신 스파이로서는 더 적임자였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인으로 위장 중인 김동인(가네모리)가 식민지 반도민 출신으로서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격렬한 적개심이 순수해 보일 지경이다. 김동인이 그러한 속마음을 거침없이 겐이치로에게 내뱉는 순간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후예로서 절로 공감하며 피가 끓기도 한다. 그래서 사사키 조가 한국인 친구들로부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생각과 조언을 많이 들었다더니 작가의 진심이 전해져 정말 고마웠다. 진주만 기습이라는 불편하고도 민감한 소재를 이용하고 있어도 한국민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올바르고 공정하게.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도 얘기했잖습니까. 전 식민지 사람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 있다 한들 저는 결코 아 나라를 멸하기 위해 힘을 쏟을 겁니다. 알아두십시오. 전 이 나라가 온통 불바다가 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이 나라 놈들이 온통 불바다가 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이 나라 놈들이 위아래 할 것 없이 굶주려 길거리를 헤매고, 티끌 같은 식량을 두고 다투며 서로 죽이는 꼴을 보고 싶단 말입니다.“
“슬렌슨은 시민 구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일본군의 만행 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다. 일본군의 잔학 행위는 대부분 구역질이 날 정도였고, 그것이 매일 엄청난 규모로, 조직적으로, 더군다나 버젓이 계속되었다. 그 방법에 비하면 기관총 난사로 죽는 것은 행복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수많은 포로와 시민들이 군도에 목이 날아갔고, 그도 모자라 총검에 꿰뚫렸다.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힌 사람도 있거니와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내몰린 사람, 머리에 불을 놓인 사람, 몽둥이에 맞아죽은 사람도 있었다. 흡사 인간에게 내재된 잔인성의 표본과도 같았다. 놀랍게도 일본군은 그 행위를 사진으로 촬영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숨겨야만 할 행위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선교사지만 스파이로 활동하는 슬렌슨의 경우에는 중국 난징에 있을 때 위와 같은 대학살을 겪었고 사랑하는 여자도 일본군에 겁탈 후 잔인하게 살해당했었다. <난징의 악마>같은 소설을 통해 난징대학살이 서구작가에 의해 소재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일본소설에서 이처럼 꽤 많은 지면을 통해 일본군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그려지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싶어서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