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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귀신이 되다
전혜진 지음 / 현암사 / 2021년 5월
평점 :
사회의 틀에 갇혀서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빼곡한 책이다. 이런 여자들의 죽음은 사대부의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주로 쓰였다. 이들을 진정 위로한 것은 '여성' 무당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고전 이야기를 처음 접해봤는데, 읽는 동안 너무 재밌었고 작가님이 이야기를 엮고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신 듯하다. 이야기 속에서 당대 사람들의 인생을 읽어내는 안목이 길러진 것 같다.
계기
제목을 보자마자 한 서린 과거 여자들의 얘기가 상상돼 나도 모르게 울화통이 치밀었다. 입이 있고 목소리가 나오는데,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고, 죽은 뒤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적 결말이긴 하겠으나, 읽고 있으면 억울하게 죽은 여성도 남성의 출세를 위한 발판일 뿐인지 묻고 싶은 삐딱한 마음이 비죽 고개를 든다. (35쪽)
여기 삐딱한 마음 추가요^^ 언어는 권력이다. 한 서린 여성의 이야기조차 사대부의 능력을 증명하는 도구로 전락했고, 아무도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건 권력자가 정립한 언어가 우리 일상에 깊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모습은 가해자나 그에 동조하는 자들이 바라는 '피해자다운 피해자'의 모습에 가깝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권력자에 저항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를, 당대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피해자의 모습으로 멋대로 전유해 버린 것은 아닐까. (88쪽)
'피해자다움'이라는 폭력적인 단어가 조선 시대부터 있었고 지금까지 큰 의미 변화 없이 존재한다는 게 화난다. 성추행을 당하고 법정에서 '기분이 더러웠어요'라고 진술한 피해자에게 피해자답지 못한 언행이라고 말한 재판부가 생각난다.
이들(신분이 낮은 통인, 후처)은 사대부가 진상을 밝히고 처벌해 원한을 풀어줄 수 있는, 만만한 가해자들이다. 하지만 권력자가 연인들의 사이를 갈라놓거나 농락한 경우, 피해자의 원혼은 아예 원님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 (94쪽)
생각해보니까 계급 높은 사람이 처벌받는 이야기는 거의 못 본 것 같다. 만만한 가해자라는 표현이 아이러니한데 찰떡이다. 누구 손에 죽는지에 따라 죽어서도 억울할 수가 있다니... 권력, 계급이 도대체 뭔지 많은 의문을 남긴 대목이었다.
어쩌면 남성 사대부들은 이와 같은 이류의 이야기나 승화형 상사뱀의 이야기에서 자신에게 편리한 여성들을 제멋대로 상상해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손쉽게 몸을 허락하면서도 지고지순한, 그러면서도 자신을 출세시켜주거나 보물을 안겨 주거나 신적 존재가 되어 내조하면서도 번거롭지 않게 알아서 사라져 주는 여성들 말이다. (141쪽)
준 것도 없는 주제에 바라는 건 개많네... 문화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욕구가 반영된다는 말이 제일 와닿는 대목이었다. 사대부의, 사대부에 의한, 사대부를 위한 설화를 읽을 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관점이라 왜 그동안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싶을정도로 이상했다. 이 시대 문헌들은 철저히 사대부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접할 때, 그 점에 유의해서 접한다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신부형' 설화들에서 버림받은 신부들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신랑의 신행길에 비를 뿌리거나 크고 작은 재해를 내리지만, 자신을 배반한 신랑을 죽이지는 않는다. (143쪽)
죽인 이야기가 있었어도 각색되지 않았을까 싶다. 감히 고귀하신 사대부 남성을 죽인 여자는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니까.
감상
고전 소설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고등학교 때, 문제집과 시험지에서 만나고 생긴 고전 소설, 이야기에 대한 편견을 단번에 부숴준 책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촘촘히 짜인 책이 이 정도로 재밌다면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어진 #월하의동사무소 가 재밌을 거란 건 당연한 거 아닐까.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한 이야기들로 책이 채워져 있었다. 더 화가 나는 건 당시에 있던 썩은 사상이 아직도 우리 생활에 일부 남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사회는 바뀌는 듯 바뀌지 않는 듯 결국 바뀌긴 하는데, 여성 인권 관련 부분은 속이 터지도록 더디게 바뀐다. 차별이 가득 담긴 조선 시대 사상이 아직도 남아있는 거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