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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계성 성격장애입니다
민지 지음, 임현성 그림 / 뜰book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경계성 성격장애라는 단어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가장 큰 혐오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세상이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디 가서 말하기조차 껄끄러운 병은 환자의 입을 통째로 틀어막아 버린다. 이 책은 그런 세상을 향해 비명을 지른다. 여기 아픈 내가 있다고, 혹시 당신도 아픈 거면 우리 같이 비명을 지르자고.
안타깝게도 그날을 내가 기억하는 한 태어나 처음으로 성추행을 당한 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일들은 서른을 넘긴 해를 살아오는 동안 부단히도 많이 일어나곤 했다. (45쪽)
성 관련 피해를 당하면 내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쉽게 어디에 털어놓지 못하고 신고는 생각도 못 해본다. 가해자가 버젓이 있는데 왜 피해자가 가해자를 자처하는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건지 화가 난다. '피해자다움'이라는 틀 속에 피해자를 억지로 구겨 넣은 사람들 모두가 피해자의 입을 막은 2차 가해자다.
그는 아직도 바짓가랑이 사이를 주물럭거리며 어린 소녀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을까. (73쪽)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그러지 못한 결과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피해자들이 병원에 다닌다.
문득문득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가 있기는 한 걸까.
직장을 다니고,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잠을 자는 몸뚱이는 있는데, 어째서 나는 나를 인지할 수 없을까. (159쪽)
나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해서 작가님도 같은 생각을 하시는 게 신기했다. 분명 일상은 내가 이루는 행위들로 차 있는데, 그 속에 진짜 내가 있는 건지 있다면 다는 그냥 움직이는 기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건지. 이런 생각이 가끔 든다.
아프다고, 나 아프다고, 나는 상처받았으며,
그 상처를 준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 소리쳐야 한다.
죽음은 잠시 미뤄 둬도 괜찮다. (192쪽)
죽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느끼며 최선을 다해 사세요. 같은 진부한 위로가 아닌 '죽음을 잠시 미뤄라'는 작가의 위로가 와닿았다.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이끈 존재들의 비참한 최후를 위해서라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데, 근데 만약에 나를 죽음 앞으로 끌고 간 게 나 자신 같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나는 무엇을 명분 삼아 죽음을 미뤄야 할까.
진절머리 나도록 아팠던 과거의 나를 직시하며 울지 않은 날보다 우는 날이 더 잦았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 글로써 내리며 조금 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으며, 치유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에필로그' 중)
이 글을 쓰는 과정을 치유로 인식한 것. 그 자체로 이미 작가님은 봉오리를 가졌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 꽃이 핀 모습도 괜찮겠지만 봉오리 그 자체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꽃봉오리는 피지 않아도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멋있다.
감상
누군가의 인생 중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골라 마주할 수 있는 책이다. 너무 슬픈 건 인생 대부분이 고통의 순간이었다는 것이다.작가는 미성년자 때, 어른들 때문에 받은 상처가 너무 많았다. 읽는 내내 한숨이 절로 나왔고 무기력한 기분을 느꼈다. 타인인 내가 이 정도면 실제로 그 일들을 겪고 버텨냈어야 하는 작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내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책을 읽은 지 한참이 지나도 쉽사리 서평을 쓸 수가 없었다. 여러 복잡한 감정이 들었는데, 이 감정들을 어떻게 글로 담아내야 할 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자판을 칠 수 없었다. 책의 집필 과정에서 자신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돌아보며 치유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에필로그에 쓴 작가의 글을 보고 '정말 그럴까?'란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책장을 덮은 지 이주가 지났고 이제는 그 뜻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처를 마주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를 기꺼이 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갈 힘도 함께 얻을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작가님은 치유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서평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책을 들춰보지 못했다. 유독 이 책이 나에게 힘겨웠던 이유는 아마 작가님이 적으신 생각 중 몇몇 생각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아서인 것 같다.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