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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 -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3가지 기준
김기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1월
평점 :
'인간다움'을 말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려 할 때 인간다움이란 어떤 품성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인간이 동물 계열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는데는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다른 동물에 비해 지능과 협업능력이 탁월하다 보니
동시에 연속 선상에 있지 않은 특별한 종이라는 착각도 일으키곤 한다.
인간이 별종이라는 그 착각이 결국 지구 안에서 인간중심적인 사상을 부추기게 되었고
나아가 환경을 훼손하는 결과까지 초래한 지금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삶은 날로 풍요로워지고 있지만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 관계로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 간다.
이렇게 가다간 결국 영혼을 상실해가는 생명체로만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다움'을 큰 덕목으로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흘러가는 세상을 마주하는 경험이 반복되면
한편으로는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인간다움에 대한 냉소적 태도만 확장될 수밖에 없다.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인간다움에 대한 반발이 공존하며 대립하는 이 상황이
바로 인간다움에 대한 '인지부조화' 상태인 것이다.
현대인은 바로 이러한 인지부조화 상태에 놓여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서울대 철학과 김기현 교수가 <인간다움>에서 안내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훈서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우리의 열망을 담고 있는 '인간다움'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이 생각은 어떤 변화의 압력을 받아왔는지 시대순으로 조근조근 강연하듯 풀어놓았다.
인간다움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고
세상의 변화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서 겸손하게 의견을 제시한다.
인지부조화를 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남겨진 바로 그 '인간다움'보다 좋은 척도는 없다는 것이다.
짐승과 구분되는 인간의 어떤 품성을 '인간답다'고 말할 때
그 인간다움이라는 성품을 구성하는 3가지 재료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문명이 시작되기 전, 아주 오랜 과거에 형성된 공감,
기원전 7-8세기 경 세상의 이치를 스스로 파악하는 능력이자
이유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정당하다고 검증된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하는 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다움의 가장 어린 자산으로 14세기 무렵에 형성되었고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능력인 자유(자율)를 들 수 있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재료를 가리켜 인간다움 삶을 지탱하는 3가지 기준이라고 말한다.
공감과 이성, 그리고 자율성이 바탕을 이룬 인류의 자산이 있었기에
현재까지 인간다움, 즉 인간의 도리를 수호해왔다.
현재 그 인간다움에 대한 도전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인간다움에 대한 애착을 끌어올리기에 적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내용들을 입문에서 다룬 이 책은 그래서 버릴 문장이 없다.
그렇기에 필사하며 느리게 읽는 독자로서 완독하기까지 참 오래 걸린 책이기도 하다.
필사한 페이지가 지금까지 거의 넘버원 수준...^^;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이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독자들에게 좋은 각성제가 되어줄 것이라고 감히 추천해본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입문에서 이미 다 풀어놓았다고도 보는데
가장 유의미하게 읽을 대목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나 인간다움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었다.
타인의 즐거움과 고통에 공감하기.
타인의 삶 존중하기.
나의 만족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지 않기.
이런 최소한의 도덕성만 갖춰도 인간다울 수 있다는 것.
다른 동물에게서 찾을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와 같은 '인간다운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이어서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인간다움의 세 가지 재료들이 겪었던 나름의 고난과 역경,
그 변천사를 만나볼 수 있는 지점들이 흥미로웠다.
나아가 미래 인간다움까지 조망해본 전체 흐름을 간략히 짚어보려고 한다.
이 과정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부족한 나의 글을 보는 이들에게
유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지만 시작해보려 한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 노릇을 하며 다스리는 최고의 지위를 지닌 존재를 우리는 '영장'이라고 일컫는다.
원시부터 중세 사이에 이미 인간은 스스로를 지배자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불과 도구, 언어를 사용했으며 높은 지능과 손가락의 형태, 그리고 직립보행 방식이
인간이 지배자가 되는데 기여한 능력들로 나열한 지점이 놀라웠다.
채집생활을 하는 인간은 사실 물리적으로 야생동물들보다 힘이 약했음에도
선조들의 협동능력으로 생존경쟁에서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아 자연계의 영장이 되었다.
인류는 군집생활에 의해 가족 중심의 유대관계가 형성되었고
고대 도시국가 형태로 역사가 발전하게 된다.
이 역사적 발전은 조상에 대한 믿음이 신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종교적 의식을 치르며 신화가 형성되다가 신 중심 세상에서 인간을 주인공으로 끌어올려준 이성이 출현한다.
신의 명령에 따라 수동적이고 운명론적이었던 태도에서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원리를 파악하려는 방향으로 인간의 노력이 이어진다.
인간이 이성을 발휘하면 인간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확장되고 강화되어 간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들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성찰을 강조한 소크라테스의 유지가 인상적이었다.
"좋은 삶은 성찰을 통해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이 문장은 <인간다움>에 대한 나의 책리뷰의 결말과도 일맥상통하다는 지점이 개인적으로도 소름!
고대 그리스 철학은 본능적 욕망과 이성을 선악으로 구분하며 이성 중심주의를 취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체론적 세계관이 관념의 또 다른 축을 이루며
개인의 사적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채로 중세로 넘어간다.
현대까지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인간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어주긴 하지만
자율과 자유를 갖는 개인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 점을 감안하고 볼 때 중세시대에 '개인'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기에는 여전히 요원한 일일 것이다.
'개인'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 공동체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해야 하는 수단에 불과했고
그저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그러하니 당연히 개인적 욕망과 쾌락같은 사적인 것은 사회 평화와 안정에 장애요소가 될 뿐이고
인간다움으로 가는 길에 사적 영역은 불온한 것으로 비춰지게 된다.
중세 시대에 인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그래서
유기체론적, 나아가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개인'이 형성되어야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상적인 배경을 안고 당시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30년 동안 치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그리스는 지역의 주도권을 상실하며 결국 패하게 된다.
그 즈음 그리스 북동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국력이 커지면서 알렉산더에 의해 제국이 건설되고
이어 그리스와 아시아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가 쇠락할 무렵에는 로마 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세력을 키우게 되고
두 제국간 전쟁으로 혼란의 시대가 지속된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다 보면 인간은 종교를 통해 심신이 편안한 세계를 동경하게 되고
반작용으로 이성의 역할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이 때 배타적인 민족 종교였던 유대교가 예수의 출현으로
율법보다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핵심이 되면서
모든 인간을 위한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보편 종교로 전환,
유대교도 기독교로 발전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 의해 313년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고
기독교와 그리스도가 유럽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후 1000년에 걸쳐서 평등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근대의 존엄한 개인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성은 사실 고대에 잉태되었지만 중세의 유기체론적 세계관에 막혀
개인의 평등한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중세에 묻혀 있던 평등 의식과 개인의 내면 세계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색, 휴머니즘, 인본주의 운동이
인간다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는 존재라는 걸 인식하게 해준 르네상스,
기존의 가톨릭에 대한 도전과 인간의 저항을 보여준 종교개혁,
14세기 왕권에 밀린 교황청이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져
70년간 유폐된 사건 아비뇽 유수는 모두
교회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가는 결정적인 역사적 고리를 이룬다.
부패하고 비도덕적인 사제들이 개인을 구원해준다는 믿음에서 불신으로 바뀌었고
전통과 계급주의적 권위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던 고정관념으로부터
세계에 대한 지식을 해방시킴으로써
개인의 판단력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이 커져간다.
이러한 근대에 등장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과 르네 데카르트의 인식론은
방법의 차이일 뿐 권위주의를 배격한 개인주의 선언이었다.
나아가 개인주의에서 출발해 새로운 사회적 규범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존 로크의 사상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16-18세기에 걸쳐 평등하고 자유로운 계몽 시대 속에서 이성에 대한 반발로
쾌락과 욕망을 아우르는 정념이 이성보다 더 우월하다고 강조하는 데이비드 흄과
더 나아가 욕망의 영역이 도덕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공리주의까지
공감에 주목한 철학자들의 주장이 등장하면서
이성과 신앙에 의해 통제되었던 당시로서는 '악의 축' 같았던 욕망의 영역이
근대에 들어와 죄의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줌으로써
이성과의 위상에 도전장을 던졌던 근대를 지나간다.
근대에 들어와 개인이 탄생하면서 공감, 이성, 자율이 어우러져 주목을 받게 된다.
인간다움의 개념이 모습을 갖추어가게 되었지만
18세기 후반 다시 이성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과학적으로 발전하면서 산업사회를 이루었지만
일부의 개인은 가난해져서 그 이전시대보다 더 살기 어려운
인간성 상실의 시대, 인간의 존엄성 붕괴의 시대를 살아야했다.
과학 발전으로 모두가 행복할 거라는 계몽 시대의 꿈은 빛이 바래지고
이성이 가져다준 과학과 산업에 대한 회의감만 깊어진다.
이쯤에서 인간은 특별할 것이 없으며 이성에 대한 의심을 강화시켜준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니체는 이성을 부정적으로 것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도 늘 관심이 많지만 여기서는 언급만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다만, 현대에 와서 새로운 사상적 패러다임을 만든 이론으로
다윈의 진화론과 니체의 사상,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짚고 간다.
니체는 일반적 원리나 보편성이라는 틀에 인간의 고유함을 묶어두는 것에 반대하며
이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삶은 근원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고통을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니체의 사상에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동의했던 바이기도 하다.
고통과 갈등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괴로워한다.
절대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 인간은 모두 고통을 느끼지만
니체는 이러한 고통이 때로는 인간을 성장시키고 개인을 탁월하게 인도하는
긍정의 디오니소스적 입장이라라는 점에 개인적으로 한번 더 주목하게 된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러한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사랑하라고까지 했었다.
Amor Fati!
(나의 신용카드에 새겨진 문구이기도.)
고통에 굴하지 않고 도리어 힘을 키워나간다?
평범한 인간으로선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도덕과 계율을 넘어서면
위버멘쉬, 초인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하였다.
문득 이러한 궁극의 인간, 탁월한 인간을 내 주변에서 과연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니체는 기존의 고정관념과 도덕 체계에 그야말로 망치를 든 철학자가 아닐 수 없다.
이성에 대한 반발로 프로이트 또한 인간 행위와 삶을 지배하는 동력으로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과 성적 본능에서 찾았고
마르크스는 도덕과 이념의 근원을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경제적 구조에서 찾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유가 모든 개인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아 자유롭다고 환상을 가질 뿐이라고 말한 지점에서
그의 통찰력이 이 정도였구나 사실 개인적으로 감탄하면서 읽었다.
실제로는 부정의한 사회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노동자)은
부르주아와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간섭이 없는 소극적 자유만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자본을 가진 유산계급만 시장을 독점하게 될 것이고
노동자 대중은 그저 부르주아 생산자들에 의해 노예화되어
급기야는 삶이 비참해질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너무 정확한 거 아닌가...ㅠㅠ)
<자본론>을 편집했던 엥겔스 역시 개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소극적 자유를 강조하다 보면 자본주의만 강화시키게 되고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다고도 했었다.
현재를 살면서 주변을 둘러 보니 이들의 예언에 부동의할 수 있는 '용자(용기있는 자)'가 있을까 싶다.
부르주아는 이기적인 계산만 할 뿐이고 인간과 노동의 가치는
인격적인 것에서 멀어지며 교환의 가치로 전락되었음을 목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 즉 적극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사회주의를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도 나의 영원한 관심사였는데
김기현 교수의 <인간다움>이 불을 지폈다...!
이 책 끝내고 나서 조만간 내 책장에 있는 마르크스 관련 책들을 모조리 소환해야겠다.
이성, 공감, 자유가 이렇게 현대에 와서 다윈,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통해
다방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고 현재는 인간다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
우리 모두가 인지부조화 상황으로 몰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무한 경쟁, 탐욕주의, 물질의 노예, 인간성 상실, 지배에 종속된 인간...!
모두 자본주의의 폐해로 언급되는 키워드들이다.
지금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모습들이어서 여전히 마르크스의 비판이 울림을 주나보다.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사회구조의 부조리는 여전하고
실체는 점점 교묘하게 뒤에 숨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떠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까?
개개인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야기하면서 이 책은 끝난다.
인간다움을 보존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How.
타인도 나만큼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연대하는 가치를 인식하고 강화하는 것.
그래서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인지부조화를 넘어서는 방법은 존중의 태도, 역지사지의 태도로 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질문에 대한 답은 책 속에 있는 이 두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 스스로가 자율적 성찰을 통해 이성을 발현함으로써 공존의 윤리에 도달해야 한다.
인간다움은 그럴 때만 이루어진다.
누가 시켜서 하는 성찰이 아니라 '자율적'이어야 한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내면과 주변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인간다움의 세 가지 재료는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발휘될 수 있게 깨우느냐, 잠들게 내버려두느냐의 차이이지 않을까.
2024년 연초부터 올해 최고의 책이 될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 본다!
서가명강 서포터즈가 되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이었다.
앞으로 김기현 교수의 신간도 주목할 것이고
지인들에게 선물하기에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단연코 나는 <인간다움> 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