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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굿바이 동물원]

태식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돌이켜 보면 부끄러울 정도로 보잘것없는 인생이었다. 괜히 돌이켜봤다는 후회마저 든다. 더 살아봤자 나아질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 길었던 인생극장도 어느덧 막바지다. 다음은 그 인생극장의 마지막 회. 오늘 분량이다. 조명이 꺼진다. 필름이 돌아간다.

 

[굿바이 동물원]은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자기 인생을 두고 돌이켜봐도 부끄러울 정도로 보잘것없고, 더 살아봤자 나아지지도 않으리라고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하는 이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김영수 씨다. 그는 몇 달 전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후 온갖 부업을 전전한다. 마늘 까기, 인형 눈 붙이기 등 값싸고 고전적인 일거리다. 집은 반지하로 옮겼고 아내는 마트 계산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잡은 일이 동물원이다. 영수 씨는 동물원이라기에 다른 부업에 비해 훨씬 그럴싸한 직장을 잡았다고 기뻐하지만, 알고 보니 사육사가 아니라 동물원의 동물이 되는 일이다. 하나같이 인간으로서 바닥을 달리는 일거리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도 달리 없다. 밖에서 인간답게 살기란 너무 힘들다. 차라리 동물이 되는 게 더 사람답다고 느껴질 정도로.

 

원래 사람을 동물이라고, 사람 사는 데를 동물원이라고 부르는 건 모욕적인 표현이다. 동물이란 사람에 비해 제 구실도 못하고 생각도 없고 당장의 필요에 충실한 존재다. 사람은 그 반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람 취급을 받을 때 이야기다. 김영수 씨도 참 먹고 살자고 별 짓을 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의 삶 역시 사람도 아니다.


예를 들면 김영수 씨의 동물 동료 하나는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이다. 대학도 이미 졸업했다. 고시원에 혼자 살면서 144:1을 뚫을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한창 나이인데도 맨날 무릎 나온 추리닝이나 입고 다닌다. 이 상태에서 나오는 말이 딱 그거다. 이게 사는 건가.

 

반면 동물 팔자는 상팔자다. 동물이라서 일하다 다쳐도 산재보험이 안 되긴 하지만, 대신 사회생활 따위 안 해도 된다. 집값도 밥값도 전기세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관람객)이 있고, 충실히 일하면 그에 따라 보상이 나온다. 동료들도 훨씬 인간미가 있다. 사람이기를 포기하기만 하면 따르는 혜택이다.

 

따라서 김영수 씨를 비롯한 동물들이 처한 상황은, 그 자체로 희극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랍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절묘한 비유가 된다. 한 동물 선배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 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랍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작품의 분위기는 꽤나 발랄하다. 인형 눈 붙이다가 본드에 취해서 슈퍼맨이랑 싸우는 것도 웃기고, 동물(로 취직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듣고 놀라 뒤집어지는 것도 웃긴다. 김영수 씨와 같은 팍팍한 처지만 아니라면야 피식피식 웃으면서 읽을 수 있다. 분명 칙칙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휙휙 읽힌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나 역시 찔끔 피식 웃으며 읽었지만, 한편으로는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 구실 못하는 잉여들이 줄곧 유쾌한 이유에 대한 구절이다.

 

이렇게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잉여로 칭한다. 오늘날 자신을 잉여로 분류하는 사람은 많다. 번듯한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른다. 이것은 포기, 항복, 깊은 절망감의 표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 누구도 시키지 않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이상한 일들을 행하기 시작한다. () 잉여들은 이상할 정도로 유쾌한데, 이 유쾌함은 사실 절망의 반작용이다. (53p)

 

앞날이 막막한 20, 김영수 씨처럼 중간에 미끄러진 30대에는 유독 사람 아닌 잉여가 많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스스로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두고 쓸모 없다는 생각에 젖는 이유는, 바깥에 이미 쓸모 있는 인생의 자격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이미 이상적인 삶, 성공한 삶이라는 모범 답안이 정해져 있다. 4년제 대학 졸업, 취업, 결혼, 아파트 마련, 사회적 지위 등, 허들을 넘으며 자기를 증명하지 못하면 그것은 쓸모 없는 삶이다. 마늘을 까거나 인형 눈을 붙이면서 사람다운 자존감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냥 웃을 수밖에.

 

웃음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뒤에 쓴 맛이 남는 종류의 웃음이다. 울 수 없어서 대신 웃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수 씨가 정리해고 당하던 날, 다시 말하면 동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날, 그는 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데 빈 칸이 없었다. () 그런 생각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어디선가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물체가 눌리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과육이 뭉개지고 과즙이 흘러나오는, 딱 그런 느낌의 소리였다. 소리는 작고 여리고 은밀하고 숨겨지길 원하고 있었다. 두 칸 다 그랬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고 싶은 사람들이 사용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울지 못하고, 울 수 없어서 소주를 마시며 웃는 사람들. 한두 사람 힘든 게 아니니 마땅히 울 자리도 없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입맛이 꽤 쓰다.

 

한겨레문학상 16회 수상작이었던 장강명의 [표백]도 젊은 사람들의 무기력한 체념이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안다. 김영하의 [퀴즈쇼]도 답 없고 돈 없는 늦깎이 청춘의 이야기였다. 이런 모습이 딱 지금 사회의 사람들이 겪는 삶의 형태이기 때문에 계속 소설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굿바이 동물원]의 끝은 희망차다. 아쉽게도 문제의 답이 되는 희망은 아니고 그래서 무책임한 회피라는 느낌도 들지만, 하나의 소소한 소설로는 뭐 나쁘지 않다. 그리고 분명 희망적인 결말에서 위안을 받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은 보다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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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가 있던 자리
웬디 매스 지음, 정소연 옮김 / 궁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망고가 있던 자리]는 만화화된 작품을 먼저 접했다. 만화로도 인상적이었는데, 책으로 읽으니 책이 더 좋았다. 만화에서는 다루지 않은 보다 자세한 내용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소녀 미아가 공감각자라는 걸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까지의 갈등이 기억에 남는다.

 

미아는 글자에 색이 보이는 공감각자다. 숫자에도 하나하나 색깔이 입혀져 보이기 때문에 수학 시간에는 집중하기가 힘들다. 상담 선생님이나 어른들은 미아가 가운데 아이 증후군이라고 말한다. 가운데인 둘째 아이는 첫째나 막내나 달리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기 때문에 부모의 관심을 끌어보고자 특이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미아 입장에서는 진짜이고 진심인데, 다른 사람들은 진지하게 듣지 않고 헛소리로 치부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내가 다 억울했다. 공감각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아는 입장에서 보면 가운데 아이 증후군이니 하는 건 어리석은 해석으로 들리기도 한다. 문제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제 깜냥으로 재단하려 들거나, 손쉽게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자폐아를 다룬 만화 [사랑하는 내 아들아]의 첫 부분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온다. 막 결혼한 신혼 부부는 행복한 미래를 예감한다. 첫 아이도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거나, 웃지 않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자폐아의 전형적인 증상이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다들 엄마가 잘못 키워서 그런다고 수군거리고, 남편조차 엄마가 똑바로 못 하니까 애가 이상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성질을 부린다. 이런 오해는 병원을 찾아가고 나서야 바로잡힌다. 자폐는 선천적 결함이고 엄마의 양육 방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엄마가 잘 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잘 못 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라고, 의사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설명해준다. 그때서야 이 초보 엄마는 안도의 눈물을 흘린다.

 

다른 아이를 기르는 건 어렵다. 아이가 남 앞에서 특이한 행동을 하면 남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람 마음이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고깝게 보는 시선도, 다른 사람들의 아무 생각 없는 말도 마음이 아프다. 그게 거듭되면 우리 아이는 왜 평범하게 행동하지 않을까 내심 원망스러운 마음도 든다. 주인공 미아가 다른 공감각자 아이를 만났을 때, 그 아이의 부모도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들은 아무리 다그쳐도 아이가 색을 보는 일을 막을 수 없으니까, 대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혼을 낸다. 그들은 난처함, 부끄러움, 부모로서 부족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상태였을 것이다. 미아의 부모도 처음부터 미아를 지지해준 것은 아니었다. 남들과 다른 것에 자신감을 갖기까지는 미아만큼 많은 경험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매우 난폭하다. 눈에 띄기 전까지는 없는 것이고, 눈에 띄면 기분 나쁜 것이다. 공감각, 자폐아, 문제행동, 모두 분명히 실재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맞닥뜨리기 전까지 자기와는 관계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문제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모른 척 하고 살았을 뿐이라는 걸 안다. 통계적으로 공감각자는 2천 명에 한 명꼴로 나타나고, 자폐 행동을 보이는 아이는 만 명당 15-20명 정도라고 한다. 한국 국민 수를 5천만으로 잡으면 각각 2 5천 명씩이다. 계산해 보면 전교에 한두 명은 있다는 말이고, --고를 거치면서 안 만나기가 더 힘든 비율이다. 당장 자기 옆 사람의 현실이어도 이상하지 않다. 평범함에서 이를 배제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너는 특별해. 너 자신은 그 자체로 소중하단다. 그런 말이 정답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리고 정답은 쉬운 답이 아니다. 정말로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정말로 신경을 써야 한다. 정확한 지식, 그걸 수용할 수 있는 열린 태도, 사려 깊음, 관심과 애정,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사람인 이상 실천하기는 당연히 힘들다.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할 수는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라는 문제로 고민해본 사람은 다른 사건에도 무관심하지 않은 걸 거다. 다른 소수자에게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감수성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주하게 되는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난 다음엔, “사람은 누구나 특별하고,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작중 미아가 보는 색채의 세계는 참 아름답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의 단어를 간직하는 것처럼, 알록달록한 단어를 간직하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한다. 원제가 [A Mango-shaped Space]던데, 고양이 모양의 망고색 흔적은 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귀여울 거라 생각한다. 그런 걸 본다는 게 조금 부럽다. 미아의 입장에서 나온 책을 보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편견 때문에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제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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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별을 스치는 바람 1, 2]

이정명 지음, 은행나무 펴냄, 2012

 

 

이 책은 2차대전 때 징집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간수병으로 살았던 어린 청년 와타나베 유이치의 기록이다. 그런 형태를 한 소설이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를 기록하고자 한 소설이다. ‘바람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별과 바람의 시인을 다룬다. 그런 의도를 고려하지 않으면 소설 내용만으로는 누가 주인공이라고 꼽기 어렵다. 화자인 유이치가 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의 기록은 형무소에서 살해당한 검열관 스기야마 도잔의 생애를 훑어나가는 작업이다. 윤동주, 일본명 히라누마 도주는 그 뒤에 부차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과감하게 나누면 1권은 스기야마 도잔, 2권은 윤동주를 파고든다고 볼 수 있다.

 

유이치는 선임 간수 스기야마 도잔 살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임무를 받는다. 어떤 놈이 왜 그를 죽였는지 밝혀서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이다. 그는 얼마 전에야 3 수용동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죽은 간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스기야마는 3 수용동의 검열관이었고, 누군가의 말로는 잔학한 짐승이었고 누군가의 말로는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또 누군가는 스기야마를 두고 일본어만 겨우 익힌 까막눈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를 책벌레라고 한다.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기록들을 조사해야 한다. 대조되는 기록을 비교 대차하며 생각하는 것이다. 유이치는 문장을 통해 진상을 더듬어나간다.

 

문장에는 힘이 있다. 사형집행서는 사람을 죽인다. 죽는 모습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형수의 죽음을 증거하는 것은 사형집행서다. 흉기를 지닐 수 없는 형무소에서는 문장이 흉기다. 검열관이 하는 일은 불온한 문장을 불태우는 것이다. 편지, 서적, 기록을 철저히 검사해 반란의 씨앗을 제거하는 일이다. 한글로 쓰인 글은 무조건 소각 대상이다. 문학 작품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렇게 충실하게 일하던 검열관 스기야마는, 그리고 그의 작업을 역추적하던 유이치는, 형무소의 문장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장을 만난다. 잔인한 짐승에게도 인간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문장, 바로 윤동주의 시다.

 

 

 

작중에서 윤동주는 한번도 의 입장이 되지 않는다. 시인의 세계는 재구성할 수 있지만 시인의 내면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와 대화한 사람들의 변화에서 간접적으로만 읽을 수 있다. 스기야마나 유이치가 조사하고 심문하고 관찰한 윤동주의 모습이 윤동주를 구성한다. 그리고 둘 다 문학에 감화된 인물이다. 이들은 윤동주와 함께 아름다운 문구를 거듭 주고받는다. 이 소설이 택한 표현방법이다.

 

작품 자체가 시에 푹 빠져있다 보니, 시를 자아내는 시인에 대한 묘사도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작중의 윤동주는 입에는 그린 듯한 미소가 항상 걸려있고 빛나는 눈에 곧은 코를 지닌 아름다운 청년이다. 온갖 인용구를 막힘 없이 읊는 기억력을 가졌고, 시의 화신 같은 문장력을 보여준다. 그에겐 간수마저 존댓말을 쓰게 만드는 위대함이 있다. 윤동주가 슬퍼하거나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는 아름답고 희망찬 위대한모습을 보인다.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공감하기는 힘들다. 진짜 주인공은 아름다운 청년 윤동주가 아니라 그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아름다운 시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다. 시에는 실제로 그만한 위력이 있으니까.

 

다만 이 소설에 삽입된 시가 그 위력을 보여주는지는 의문이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윤동주의 시를 인용할 때 무조건 전문을 삽입한다. 그 뒤 화자가 그 시어를 해석하고 시의 느낌을 묘사하는 것으로 처리한다. 동의는 하지만 감동하기는 힘들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시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어보고 들어보고 자잘한 해석 방법까지 배우는 시니까. 윤동주 시를 처음 접한 등장인물이 어떻게 이런 시가!” 하고 감동에 젖더라도, 이미 알던 사람 입장에선 그렇다더라, 이제 알았니.” 하는 심드렁함을 떨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 아쉽다. 교과서와 시험의 기억에서 벗어나 시 자체에 순수하게 빠져들 수 있도록 제시됐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예전에 다른 소설에 삽입된 시를 보며 펑펑 울었던 적이 있다. 누가 따로 해석해주지 않아도, 소설 속 맥락에 빠져들고 나니 시가 나에게도 의미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시는 산문보다 함축적이기 때문에, 소설이 배경으로 고조되어야 그 안에 삽입된 시가 무게를 갖는 것 같다. “시가 내게로 왔다를 삶에서 경험하는 게 아니라 소설 속의 삶으로 대리 체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야 그 구절이 소중해지고, 읽는 사람도 다시 한번 되뇌이게 되는 듯 하다. [별을 스치는 바람]의 방식으로는, 시 읽기 단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감흥을 얻기는 좀 힘들 거라 보인다.

 

 

 

대신 인용구의 아름다움은 확실하다. 구절이나 문단 단위로 삽입된 문장들은 참 좋았다. 여기엔 화자인 유이치가 문학청년이라는 점도 한몫 한다. 그는 징집되기 전까지 헌책방 집 아들로서 책에 푹 빠져 살았다. 그는 가게에 들어온 고흐 화집의 아름다움에 반해 구석에서 순수하게 취하곤 하던 인물이다. 어느 날 그 화집을 사러 온 사람에게, 비싸게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물자를 구해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거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배부름보다 예술에 대한 욕심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들의 세계에서 자라다가 전쟁에 내던져진 것이다.

 

그가 윤동주를 만나고 그의 시에 정신이 멍해진 뒤 접하는 책은, 어릴 때 보던 것과는 또 다를 것이다. 릴케가 쓴 [말테의 수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는 아무 뜻도 없는 짤막한 허위의 첫 문장을 쓰기까지 평생이 걸린다는 것을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다.”

 

유이치가 이 구절을 다시 만나는 건 윤동주에게 책을 건네줄 때다. 형무소에 보관되어 있던 [말테의 수기]는 유이치가 밑줄을 치며 읽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그리고 책을 유이치네 헌책방에 맡겼던 사람은 윤동주였을 것이다. 둘은 같은 책을 사랑했고 같은 시인을 사랑했다. 흘러 흘러 하필 그곳까지 도달한, 윤동주와 유이치를 이어주는 책. 그걸 보면 누구라도 운명 같은 걸 느끼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희망, 영혼이라는 이름의 운명 말이다.

 

유이치는 입영 영장을 받은 날 고흐 화집을 사러 왔던 사람을 찾아간다. 그리고 화집을 넘긴다. 고흐는 그의 영혼의 일부였다. 윤동주는 그에게 고흐의 이야기를 한다. 별의 화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다.

 

지도를 볼 때 도시나 마을을 표시한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단다. 그럴 때 난 묻곤 하지.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 가듯 왜 하늘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는 갈 수 없을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두 문학청년이 나누는 시인의 이야기에는 반짝임이 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더 가치롭게 느껴지는 작은 반짝임이다. <별 헤는 밤>에서, 별을 보면서 불러보는 시인들의 이름이 왜 그리 절절하고 아름다운 말인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시를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마음 속 깊은 곳에 시를 간직할 수 있는지도. 고흐가 별의 화가라면 윤동주는 별의 시인이다.

 

 

 

서문이나 주석을 참고하면, 저자는 소설을 통해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록을 하고 싶었던 듯 하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역사가가 사료에 해설을 달듯 주석을 적었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다. 윤동주가 자신의 육필 원고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으며, 하지만 자기조차 지키지 못한 원고를 누가 간수할 수 있겠냐는 말을 하는 장면이다. 저자는 여기에 친절하게도 소설 밖의 사실을 끌어온다. 이 부분의 주석에는 윤동주의 원고를 받은 친구 정병욱은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켜냈으며 결국 해방 후 시집을 출간했다는 첨언이 붙어있다.

 

소설은 어차피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이상 정확한 내용을 포함해도 전부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의 생애를 다룰 때마다 나오는 주석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이야기 구조부터도 윤동주 하나에 초점을 맞춘 구조가 아니다. 윤동주의 공식적발언마다 굳이 “-에 기초했다는 주석을 끼워 넣는 건 되려 흥을 깬다. 다른 부분의 허구성을 더 두드러지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주석이 있다고 소설 속 윤동주가 더 굳건해지는 것도 아닌 듯 하다. 그를 형상화하는 질료는 말과 행동의 묘사이지, 본문 밖의 주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석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소설이 야기할 수 있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부연설명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주석을 넣는다면 미주나 작가의 말을 통해 맨 뒤로 빼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페이지마다 각주로 넣은 이유는 뭔지 모르겠다. 본문의 완성도를 추구한다면 말이다.

 



철저히 윤동주 하나만을 따라가는 구조였다면 이런 열성은 별로 거슬리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여러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취하는 장점이 더 크다. 개성을 가진 인물들의 결합을 통해 이 책은 내면적으로 풍요로워진다. 윤동주 주변에 배치한 인물들을 통해 그가 상징하는 가치를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덕분에 윤동주 자체는 비인간적인 느낌이 나지만, 그가 말하는 시는 아름답다.


화자인 를 관찰자로 정한 것도 장점으로 보인다. 소설의 시작이었던 스기야마 도잔 살인사건의 진상, 문학청년의 갈등, ‘악독하고 쓸모없는조선인 죄수들이 공유하던 비밀 등을 모두 다루는 구조다. 형무소 안에 숨겨진 여러 겹의, 그리고 여러 군데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수용소에서 자행되던 인체 실험 때문에 윤동주가 단명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 시기가 종전 6개월 전이라는 것도 유명하다. 그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에, 반일감정에 불타 읽으면 앞서의 감상과는 다른 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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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1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의 힘]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2012, 황금가지.


 

1.

 

[개의 힘]에는 정도가 지나친 폭력이 굉장히 자주 나온다. 한 살인 장면은 이렇다. 그는 남자의 이마를 칼로 짧고 날카롭게 베었다. 그리고 피부를 잡고 아래로 벗겨 내렸다. 바나나 껍질처럼 가슴께까지 얼굴 껍질이 벗겨지는 동안 남자는 필사적으로 발을 굴렀다. 그는 발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자의 입에 총을 넣고 쏘았다. 배신자는 뒤통수를 쏘고 밀고자는 입 안을 쏜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폭력은 만성이다. 언제나 새로운 폭력이 있다.

 

폭력은 멕시코의 광경이다. 미국인이 살해당하면 전쟁이 벌어지지만, 멕시코인이 학살당하는 것은 언론보도에서도 묻힐 수 있다. 같은 중앙아메리카지만 멕시코는 가난하고 혼란한 나라다. 마약, 살인, 총과 화약, 범죄는 전부 아랫나라 멕시코에서 일어난다. 미국인은 휴가차 혹은 업무차 아래로 방문한다. 멕시코인은 살기 위해 혹은 일자리를 찾아서 국경선을 넘어 달린다. 멕시코에서 미국, 혹은 미국으로의 여정을 뜻하는 말은 엘 노르테(북쪽)’. 마약은 정제되어 북으로 올라간다. 검은 돈은 남으로 내려간다. 돈이 흘러가는 곳은 멕시코 정부가 아니라 그곳의 마피아들, 마약왕의 주머니다. 마약과 돈을 가진 자들에게 멕시코는 거대한 노름판이다. 영화 <대부>를 떠올려도 좋다. 다른 점은 더 현대적이라는 것과 더 대규모라는 것이다.

 

2.

 

이 책은 1975년부터 2003년까지 30년 정도의 마약전쟁을 기록한다. 멕시코의 티후아나, 과달라하라,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가 무대다. 주인공은 따로 없지만, 꼽아보자면 마약수사관 아트 켈러가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그가 마약전쟁에서 활동한 경력과 때를 같이 한다. 그는 CIA 출신이지만 마약 단속국으로 옮겨 경찰에서 활동한다. 쉽진 않다. 팀장은 CIA 출신인 그를 고깝게 여겨 현장에 홀로 버려둔다. CIA 수장은 착한 사람이 아니고, 믿어도 될 사람도 아니다. 멕시코 연방경찰은 마피아의 수하다. 그들에게 즉시 출격을 목적으로 증거와 증인을 들이대면, 이런 말이 돌아온다. “여기는 멕시코입니다. 세뇨르, 이 일들은 시간이 걸립니다.” 옆동네 온두라스의 마약 단속국 사무소는 사건 부족을 이유로 폐쇄되었다. 아트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힘이 필요하다.

 

전쟁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아트와 쌍을 이루는 적군은 바레라 가문, 그 중에서도 아트의 후견인 노릇을 했던 티오 바레라와 친구였던 아단 바레라이다. ‘바레라들의 이름은 멕시코에서 왕과 같다. 아니면 재앙이거나. 사람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입을 다물어버린다. 멕시코에서 마피아들에 관해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정말로 한순간에 비명횡사하기 때문이다. 마피아는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함과 행동력을 보이지 않으면 동료나 부하에게 제거당할 수 있다. 그들은 거의 항상 전쟁 중이다. 남들보다 빨리 뛰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 그렇게 뛰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이 작품을 영상으로 만든다면 장편 드라마가 아니고선 힘들 것이다. 30년 분량의 기록에, 방대한 내용만큼 등장인물도 매우 많다. 각 조직의 거물이나 보스, 운전사, 신입 조직원, 경찰, 용병, 매춘부, 정치인, 그리고 중요한 이름이 될 만큼 살아남지 못한 포로들, 주민들, 젊은이들. 영상과 달리 제약이 없는 책이기에 담아낼 수 있는 방대한 세계다. (그리고 혹시 누가 누군지 까먹었다면, 책에 첨부된 주요 인물 및 단체 목록을 참고하시길.)

 

개중에는 실존인물과 사건이 뒤섞여 존재한다. 이들은 중요 인물이지만 작품 내에서는 보통 주변인이다. 하지만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 두어 명이 선거 전에 사망했다, 마피아의 짓이다. 선거 득표수를 세던 컴퓨터가 갑자기 정지하고 관리자들이 사망했다. 마피아의 짓이다. 국가기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수근댈 법한 음모론이 여기서는 사실이다. 정확히는, 사실로 보인다.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악당들은 진상을 밝히지 않고, 이 일을 알 정도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추적자 노릇을 하지 않는 법이니까.

 

3.

 

폭력을 주재하는 것은 악이다. 폭력 상황에서는 어김없이 개의 힘이 느껴진다. 이 힘을 쥐면 복수를 하거나 돈을 벌 수 있다. 마피아의 대부분이 악에 발을 담그다 못해 머리까지 빠진 사람들이다. 한번 들어서면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악은 추진력이 있어서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었다. 물리학의 법칙이다. 잠들어 있는 몸은 계속 잠들어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고 있는 몸은 계속 움직이려고 했다. / 뭔가가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친구를 구하기 위해 총을 쏜 젊은이 칼란의 경우, 정말 오랫동안 조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발을 내딛을수록 중심 인물이 되었고, 빠지고 싶어졌을 때는 너무 유명해진 다음이었다. 혹은, 휘두를 때는 사소했던 악이 길고 거대한 복수를 불러오곤 한다. 아트는 동료의 죽음을 보상하기 위해 또다른 악인이 된다. 그러는 동안 개는 침을 흘리며 주위를 맴돈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악을 선택하는 위치에 있지만 실질적인 선택권은 없다. “충분한 힘으로 거대한 악을 활동하게 한 사람이라도 일단 악이 활동을 시작하고 나면 그 움직임을 멈출 힘이 없다는 사실을 티오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악과 결탁하기를 멀리하는 일이며 지속하다가 멈추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 시작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살기 위해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악에 휘둘린다. 악이 거대한 밀물처럼 밀려오는 세상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다. 악의 힘을 휘두르며 살려고 달려나가는 것, 그러다 고꾸라지는 것, 아니면 정원을 돌보고 신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뿐이다. 반대되는 모든 증거에 대항하며.

 

4.

 

마약전쟁은 2003년에 접어들면 일단락된다. 그런데 무엇과 싸우는 전쟁인가?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을까? 전쟁의 선두에 섰던 아트 켈러는 결과에 만족했을까? “미국 내 비 마약위반사범의 3분의 2가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해법은 똑같이 무익한 비 해법이다. 그 질병은 무시한 채, 더 많은 감옥을 짓고 더 많은 경찰을 고용하며 증상을 치료와 관계없는 일에만 수십억 달러를 썼다. 내 관할 구역에는 마약을 끊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량 건강 보험이 없으면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며, 그런 보험에 든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조금을 받아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대기자 명단이 6개월에서 2년 정도 밀려 있었다. 코카인 농작물을 못 쓰게 만들고 아이들을 유독물질에 중독시키는 데에 거의 20억 달러를 쓰고 있으면서, 마약을 끊고 싶지만 돈이 없는 사람을 도울 돈은 없었다. 미친 짓이었다. / 아트는 마약 전쟁이 외설스런 부조리인지, 부조리한 외설 행위인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두 경우 모두 피로 더럽혀진 비참한 광대극이었다.”

 

미국은 멕시코 마약을 소탕하기 위해 거대 농장에 대량의 고엽제를 살포한다. 붉은 양귀비 꽃은 전부 불타오르고, 고엽제는 사방으로 날린다. 그렇게 살해된 지역은 어떤 농작물도 자라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된다. ‘개의 힘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거대한 부당함에 맞서기 위해서는 다른 악의 힘이 필요하다. 아니면 그저 신을 희망하거나.


어느 쪽이건,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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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끌림]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2012, 열린책들.

 

욕망은 결핍에서 나온다. 끌림은 갈망에서 나온다. [끌림] 안에는, 인간의 갈망과 그로 인한 약함이 담겨 있다. 인간의 가장 연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은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어머니, 가족, 연인, 이해자, 그런 관계들이 사람을 에워싸고 지배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가슴 떨리고 갈망을 한다. 이 책은 연애소설치고 달콤한 로맨스는 없지만, 대신 관계에 대한 갈망과 연약함이 어떻게 사람을 뒤흔들고 끌어당기는지가 나타난다.

 

[끌림]의 소재는 감옥, 여자, 빅토리아 시대다. 밀뱅크 여자 교도소와 그 죄수들, 책의 화자인 두 명의 여자,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사회와 관습이 소설의 뼈대를 이룬다. 처음 봤을 때는 참, 퓨전 요리처럼 낯선 조합의 재료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 셋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예를 들어, 가장 좋았던 부분은 밀뱅크라는 실제의 감옥과 빅토리아 시대라는 사회적인 감옥이 등치되면서 어우러지는 부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미혼 여자라면, 그것도 노처녀라면, 게다가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어두운 열정을 품고 있다면, 사는 게 감옥의 죄수와 같다고 느끼지 않겠는가? 화자인 마거릿이 그런 사람이다. 그녀는 감옥 방문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갇힌 감옥을 자각한다.

 

이야기는 마거릿과 셀리나 두 여자의 일기로 교차 진행된다. 마거릿은 숙녀출신이고, 우울증을 겪고 있다. 친밀하게 지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큰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친구분이었던 살리토 씨는 그녀에게 감옥에 여죄수들을 교화하러 방문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한다. 죄수들에게는 숙녀의 모범과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거릿은 무슨 일이라도 할 일이 필요했기에 제안을 받아들인다. 셀리나는 감옥에서 만난 영매다. 젊고 아름답고 차분하며, 다른 죄수들과는 무언가 다르다. 그녀는 강령회 중 한 사람을 다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놀래켜 죽게 만들었기에 감옥에 갇혔다. 죽은 사람은 그녀의 후원자였다. 책의 첫 장면은 바로 이 사건부터 시작한다. 법정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못은 그녀가 불러낸 영혼이 했지만, 영혼의 죄를 입증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셀리나가 갇힌다. 이후 마거릿의 일기에서는 밀뱅크에서 둘이 만나게 된 후의 이야기가, 셀리나의 일기에서는 사건이 있기 전 셀리나가 영매로 생활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둘의 이야기는 동등한 것 같지만, 독자는 마거릿의 시점에 더 잘 이입한다. 마거릿의 일기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그녀는 밀뱅크 감옥의 면면을 묘사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는다. 걱정거리나 흔들림, 고민, 추측 또한 솔직히 기록한다.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것도 그녀다. 반면 셀리나의 일기에는 내면의 고민이나 고백은 없다. 일기 아닌 사무적인 일과의 기록도 종종 섞여있을 정도다. 어쨌거나 셀리나의 일기는 과거의 기록이기에 현재 마거릿과의 사랑에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독자가 따라가기에는 마거릿의 시점이 보다 우세하다.

 

마거릿에게는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인지 중반까지 결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짐작하기는 쉽다. 그녀는 우울증을 겪고 여자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 자살은 죄이며, 자살미수자는 감옥에 갇힌다. 마거릿은 높은 집안 출신의 숙녀라는 이유로 감옥의 여자들과는 다른 처우를 받는다. 죄수가 되는 대신 약을 처방 받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자신이 다른 여자들과는 이질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더불어 그렇기에 다른 여자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강박을 죄책감처럼 품고 있다. 결혼식 때 쓸 천의 무늬로 꺅꺅거리며 수다를 떨거나, 어머니 말에 순종하며 집안에서 조신하게 지내야 한다. 이것이 그녀의 삶을 지배하는 굴레다. 이에 순종하는 마거릿의 미래는 늙어가는 어머니 옆에 진흙색 드레스를 입고 노처녀인 채로 굳어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마거릿은 여전히 어머니에게 순종할 수가 없다. 아버지 없는 집안에 있는 것도 힘들고, 감옥에 가는 것을 그만둘 수도 없다. 그녀는 밀뱅크 감옥의 척박함을 묘사하면서, 잔인하지만 눈을 뗄 수 없다고, 기묘한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처음엔 그로테스크한 예술이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과 비슷한 줄 알았다. 아니면 밀뱅크의 비일상적인 척박함이 오싹하지만 좋은 구경거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마거릿이 감옥 방문을 그만두지 못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녀는 죄수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자기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고. 그녀의 마음 속에는 자기가 저지른 ’(혹은 문제”)에 대해 마땅한 처벌을 받고 있지 않다는, 스스로라도 자신을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집에 있으면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꺼끌한 사실을 되씹는 것보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이 편안하다. 마거릿은 자신 역시 죄수들이나 교도관들처럼 밀뱅크에 사로잡혔다고 느낀다.

 

셀리나. 그녀와 친밀해지면서, 마거릿이 감옥을 방문하는 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한 것으로 변한다. 셀리나가 영매라는 점은 셀리나와 마거릿의 삶에 새로운 차원의 감옥을 더한다. 영혼을 보는 영매가 된다는 것은 빨간색을 보지 못하는 색맹들 사이에서 홀로 색을 보는 것과 같다. 화려한 색채들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이해 받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한번 보기 시작한 것을 잊어버릴 수도 없다. 마거릿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고 공감한다. 힘들 게 뭐 있을까, 그녀의 삶이 바로 그렇게 외톨이였는데. 그리고 셀리나의 설명에 이끌려 이라는 두 번째 감옥을 느낀다. 우리는 의복이나 육체에 얽매여 살지만, 영혼 상태가 되어 자유로워지면 몸이나 성별 따위는 소용이 없다. 그것이 영혼과 영매의 시점이다.

 

이제 감옥은 마거릿 개인의 몸으로 옮겨온다. 셀리나가 그녀의 인식을 확장시킬수록 마거릿의 감옥은 견고해진다. 대신 이는 자유를 약속하는 감옥이다. 몸을 감옥으로 느끼기 시작하면, 그에 따른 성별, 나이, 체면, 그런 것들은 모두 벗어버릴 수 있는 대상으로 변한다. 마거릿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셀리나와 같은 종류의 감옥에 갇혀 있음을 느낀다. 밀뱅크 감옥에 가지 않아도 마음이 충분히 편안하다. 그 동안 답답했던 이유는 자신이 갇혀 있었기 때문임을 깨달았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갇혔으니까. 탈출은 지상명제고, 기다리는 것은 해방이다.

 

그리고 반전이 있다.

 

영혼, 영매, 죽은 사람이 저승에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이야기. 이게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모른다. 다만 이런 이야기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 끌린다는 점은 확실하다. 끌림은 갈망에서, 갈망은 연약함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책의 여자들은 모두 귀퉁이가 짓무른 잎사귀처럼 마음 한 켠에 연약함이 존재한다. 멀쩡히 건강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렇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살살 건드리고 달래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상대방도 동일한 약점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영혼 이야기는 배경이 빅토리아 시대이기에 어울리는 소재다. 덜컹거리는 테이블이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손자국 같은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패티코트나 양복을 입은 유럽인들이어야 할 것 같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여자로서, 혹은 사람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갇혀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관계가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우리는 그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발 더 나아가, 지금 쥐고 있는 한 줌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연애를 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관계의 어긋남에 대한 날카로운 공감을 느낄 것이다.

 

좋은 반전이 그렇듯, 이 책도 다 읽은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색다른 시선으로 읽힌다. 책을 다 보고 나면 첫 장면으로 돌아가보기를 권한다. 셀리나가 감옥에 들어가는 이유가 되는 사건 말이다. 그 장면에서 셀리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읽고 영매의 현실을 알게 되면, 현실 세계에 그녀가 어떻게 발 디디고 서있는지가 보인다. 거기에 그녀의 약점이, 홀로 내던져진 불쌍한 소녀가 갖게 되는 약점이 있다. 이를 통해 글 안에서는 뚜렷이 표현되지 않은 그녀의 연약함과 갈망을 추측해볼 수 있다. 셀리나는 이야기의 반을 담당하는 인물인데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기에 놓치기 쉽다. 마거릿에 대해 생각하는 만큼 셀리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길. 책을 읽은 후의 여운이 훨씬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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