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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arthian Tales 어션 테일즈 No.1 - alone
김보영 외 지음 / 아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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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업이 이렇게 화려할 줄이야!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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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체파리의 비법 팁트리 주니어 걸작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이수현 옮김 / 아작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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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체체파리의 비법 꼭 보라는 이야기를 해서 또 그 얘기 하냐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근데 진짜 좋아요. 그리고 좋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수 있어서 진짜 기뻐요. 감탄할 만큼 강렬하고 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세련되고 절대로 한번에 속을 드러내지 않는 소설입니다. 많이 팔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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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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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니아』: 영웅신화는 전쟁 이야기일 수밖에 없을까?



"성모 르 귄이시여!"
- 찰스 유,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르귄의 신작

 어슐러 K. 르 귄(이하 르귄)이 어떤 사람인지 줄줄이 늘어놓는 것은 식상한 일일 것이다. 현재 SF를 읽는 세대에게는 '살아있는 전설'인 인물이며, 작고한 "성부 하인라인"과 달리 팔순을 넘긴 현재도 의욕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거장이기도 하다. 르귄에게 붙는 문구 중 하나는 "SF 작가 중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 1순위는 르귄"이라는 평이다. 그만큼 르귄의 작품이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르귄을 두고 'SF 작가'라고 해야 할지, '판타지 작가'라고 해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나, 장르를 뛰어넘어 SF, 판타지, 아동문학, 시 등등을 가리지 않고 다작하는 작가이기에, 그냥 '르귄'이라는 고유명사로 칭해도 될 듯싶다.

 그녀는 1960년대 초 데뷔한 뒤로 지금까지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1970년에 발표한 『어둠의 왼손』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각각 다섯 번쯤 수상했다. 『어둠의 왼손』(1970), 『빼앗긴 자들』(1974) 등을 포함하는 헤인 시리즈가 대표적인 SF 작품이며, 『어둠의 왼손』은 유명한 SF 클리셰 중 하나인, 거리에 상관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통신장치 "앤시블"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후 '앤시블'은 '워프'처럼 뜻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용어로 굳어졌다.)

 판타지 쪽으로는 『어스시의 마법사』(1968)로 시작해 『또다른 바람』(2001)으로 이어지는 어스시(땅바다) 시리즈가 대표작이다. 그리고 어스시 시리즈를 마친 후 들고 나온 서부해안 연대기 삼부작 『보이스』(2004), 『기프트』(2006), 『파워』(2007)가 있으며, 『파워』로 다섯 번째 네뷸러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두 차례 영화화된 『하늘의 물레』(1971), 동화 『날고양이들』(1988-1999) 등이 있다. 2000년에는 미국의 문화적 유산에 미친 현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국회 도서관에서 선정한 '살아있는 전설'(이런 칭호를 정말로 받았다!)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SF와 판타지 분야에 크게 기여한 사람을 선정하는 그랜드 마스터 상을 수상하였다. 장르문학 외부에서도 퓰리처상이나 전미도서상을 받는 등 널리 인정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드물게도 신작이 꼬박꼬박 번역 출간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건, 신작이 계속 나오고 있단 점이다. 굵직한 시리즈를 두 개나 내놓고는. 이제 이런 작품은 더는 나오지 않겠지 했는데, 얼마 전에는 서부 해안 연대기를 내놓아서 사람을 울리더니, 그 다음에는 대서사시 『라비니아』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라비니아』로 로커스상 수상도 5번째를 채웠다.



[아이네이스]와 아이네아스: 트로이 전쟁에서 로마 건국까지

 『라비니아』의 주인공은 라비니아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아이네아스의 아내로만 잠깐 등장했을 뿐이다. 그것도 정확히 말하면, 아내들 중 하나였다. 그럼 또 아이네아스는 누구인가? 책의 표현을 빌리면, "영웅적이면서 책임감도 있고, 공명정대하고, 성실한 남자,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고통을 당했으며 많은 실수를 범했고 그 모두에 대한 대가를 치른 남자. (중략) 자신의 도시가 배신당하고 불타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그 화재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구한 남자, 살아서 저승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온 남자, 역경을 헤치고 경건함을 배운 남자"다. 전형적인 그리스 쪽 고대 영웅이라 하겠다. 아이네아스는 라비니아와 만나기 전에 이미 전설을 여럿 만들었다.

 아이네아스의 역사는 트로이 전쟁부터 시작한다. 트로이의 목마, 황금 사과, 헬레네 등이 등장하는 그 트로이 전쟁 말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트로이 전쟁은 세계 최고 미녀라는 헬레네를 그에 한눈에 반한 파리스라는 트로이 왕자 놈이 냉큼 납치하면서 시작된다. 헬레네가 스파르타의 왕비였기 때문에 이는 그리스 연맹과 트로이의 전쟁으로 발전한다. 남편이자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메넬라오스는 트로이를 치기 위해 동료를 모은다. 동료들은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그의 명예를 수복하기 위해 모여든다. 이 전쟁은 십 년이나 계속되며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양쪽에 수많은 사상자를 낸다.

 트로이 전쟁은 당대 영웅과 신화의 집결장이었다. 그리스 측 영웅만 해도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오딧세이아』의 주인공이며 아테네의 지원을 받은 오딧세우스, 메넬라오스의 형이자 미케네 코린토스 등지의 왕 아가멤논, 아킬레스건의 어원이 된 영웅 아킬레우스 등이 있다.

 그리스는 연합군이었지만 트로이 측은 트로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헥토르, 파리스 등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들이다. 예언의 힘을 지녔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으리란 저주를 받은 카산드라 역시 프리아모스의 자녀이자 트로이의 공주였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왕족 잉카네스와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의 아들이고, 프리아모스의 다른 딸 크레우사와 결혼했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의 왕위계승자는 아니었지만, 트로이는 그의 도시였고 트로이 사람들은 그의 사람들이었다.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의 패배로 끝난다. 오딧세우스가 고안한 트로이의 목마는 십 년간 지지부진하던 전쟁의 승패를 단숨에 결정지었다. 아이네아스는 불타는 트로이를 뒤로 하고 남은 이들을 이끌어 떠난다. 절름발이 아버지 잉카네스와 어린 아들 아스카니우스를 데리고, 아내는 잃어버린 채, 그는 유민들의 지도자가 된다. 그는 트로이 유민이 정착할 다른 땅을 찾아 떠난다. 이것이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 전반부의 내용이다.
 
 『아이네이스』는 로마 최고의 시인이며 시성이라 불렸던 베르길리우스가 황제의 명에 따라 집필하기 시작한 대서사시다. 그는 아이네아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로마 건국사를 서술한다. 그에게 저술을 권한 것은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생전엔 옥타비아누스)였다. 베르길리우스는 황제의 가문 율리우스가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이울루스, Iulus)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고 해서 아이네아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라 알려져 있다.



예언의 땅 라티움: 아이네아스와 라비니아

 트로이를 떠난 이후 아이네아스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거쳐 이탈리아의 라틴 땅에 도달한다. 그는 이미 저승으로의 여행을 통해 그가 미래에 통치할 곳에 대해 예언을 받았으며, 라티움이 그 약속의 땅이라고 확신한다. 라티움의 왕 라티누스(Latinus)는 아이네아스가 부하들을 이끌고 왔을 때, 자신이 받은 신탁에 따라 이 이방인들에게 왕위와 그의 딸 라비니아를 내주고자 했다. 그러나 라비니아의 약혼자라 자처하고 있던 투르누스는 이에 반발하여 주변 부족들을 모아 그를 공격한다. 이렇게 트로이의 이방인들과 라틴 족 연합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영웅들이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과 달리, 라틴에서의 전쟁의 주역은 생소한 인물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이 모였던 트로이 전쟁에 비하면 라틴에서의 전쟁은 보잘것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변함없이 뛰어난 언변으로 라틴 땅의 전쟁을 서술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에우뤼알루스가 죽어 나뒹굴며 아름다운 사지 위로
피가 흘러내렸고, 목덜미는 어깨위로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은 자줏빛 꽃이 쟁기날에 잘려 나가며 시들어지거나,
아니면 양귀비꽃들이 소나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목덜미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일 때와도 같았다."


 다른 부족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아이네아스와 투르누스가 일대일 대결을 벌이게 된다. 라비니아의 결혼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고,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것은 결혼 상대자였던 두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결에서 완전히 패배한 투르누스는 항복하며 아이네아스에게 뜻대로 하라 말한다. 아이네아스는 항복을 받아들이며 그를 놓아주려다가, 그의 어린 동료 팔라스의 황금 검대를 투르누스가 두르고 있는 것을 본다. 투르누스는 그 소년을 죽인 후 검대를 그 전리품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이네아스는 분노에 차서 그를 죽여버린다.

 전쟁은 트로이 인의 승리로 끝난다. 그들은 이방인에서 아버지 왕이 된다.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알바 롱가를 건설하는데, 이 도시가 로마의 전형이 된다고 한다. 로마의 조상이기에 그들은 고결하고, 영웅적이며, 시로 찬미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네이스』는 투르누스의 죽음으로 끝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서사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라비니아』의 라비니아


"…내 어머니는 미쳤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늙었지만, 나는 젊었다. 스파르타의 헬레네처럼, 나는 전쟁을 초래했다. 헬레네는 그녀를 원한 남자들이 그녀를 갖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전쟁을 초래했다. 나는 남에게 주어지거나 남이 갖도록 하지 않고 나의 남자와 내 운명을 택하려 했기에 전쟁을 초래했다. 그 남자는 유명했으나, 내 운명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쁜 균형은 아니다." (12p)
 
 
 라비니아는 기록에 거의 남지 않았다. 시인이 찬양한 것은 영웅이었다. 라비니아는 그의 서사시에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이네아스는 라비니아와 결혼한 지 3년 만에 죽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라비니아에게 "납필에 그린 듯한 흐릿한 인상" 이상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은 트로이 인들이 자리잡기 위한 조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네아스가 죽은 후에도 전쟁을 견디며 살아남았다. 르귄은 라비니아를 위해 새로운 서사시를 쓴다. 라비니아의 말을 빌려 시인은 그녀에게 사과를 전한다.

 라비니아는 강한 인물이다. 그리고 현명하다. '경건함'은 작중 되풀이되어 나오는 단어인데, 이 경건함은 라비니아가 일상 속에서 기록하는 제례와 상징을 통해 형상화된다. 르귄이 신화를 풀어내는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우리는 그 신을 전혀 믿지 않으며 이름조차도 낯설지만, 등장인물들의 행동으로 인해 그 안에는 경건함이 깃들게 된다. 그녀가 남자였다면 신성한 소금을 정결히 하는 일이나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을 기록하는 대신 싸움과 경쟁으로 지면을 채웠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아이네아스의 경건함이 전쟁과 승리로 향했던 것처럼, 이름만 다른 영웅신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제이자 공주였고, 여왕, 피보호자, 어머니였다. 장대 끝에 묶인 비둘기였고, 새끼를 기르는 암늑대였다. 남자의 전쟁은 적의 목을 베고 칼을 찔러넣는 것이지만, 라비니아가 겪은 전쟁은 훨씬 폭이 넓다. 전쟁이 벌어지면, 평원에 나가 창을 던지고 고함을 지르는 대신 도시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는 게 여자의 역할이었다. 그녀는 전쟁의 열기에 감화되지 않았다. 부상자를 맞으며 무기가 인간에게 하는 짓을 보았다. 남자들은 그들에게 당장 중요한 것만 보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들은 운명적인 싸움을 벌였지만, 라비니아는 더 오래 살았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수 없다. (…) 시인은 나에 대하여 죽기에 충분한 삶을 노래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불멸을 부여했을 뿐이다." (430p)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를 끝내지 못했다. 그는 그 시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끝맺지 못한 채 죽었다. 미완성의 한 끝은 라비니아에게 있다. 그는 라비니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는 전쟁과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것은 라비니아에게는 끝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난 지금, 라비니아는 진실 속의 반란, 역방향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암시로 기능한다.

 그녀는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아는 그녀는 담담하고도 단호하게 선언한다. "아버지,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알아요. 그리고 할 거에요. 어머니는 저를 막지 못할 것이고 전쟁을 위해 소리치는 왕국의 모든 사람들도 저를 막지 못할 거에요."(209p) 그 전쟁은 아이네아스의 전쟁과는 다른 양상의 것이다.



영웅과 살인마: 전쟁에 대한 의문


"그 영웅이 누구죠?"
"당신은 그 영웅이 누구인지 알잖아요."
"그는 도살자처럼 사람을 살해해요. 그가 왜 영웅인가요?"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기 때문이지요."
"왜 그가 무력한 인간을 죽여야 하지요?"
"그것이 제국의 기초가 세워지는 방식이니까요." (149p)


 베르길리우스의 시는 아이네아스의 경건함, 영웅적 승리, 그 위대함에 의문을 제기하는 듯한 장면에서 갑작스럽게 끝난다. 시가 쓰여진 애초의 목적이 역사를 구성하기 위함이었던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영광된 이름을 받은 황제에게 그의 국가가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전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역사는 전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은 죽음과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르길리우스가 연달아 일어나는 무수한 죽음을 서술하는 솜씨는 실로 훌륭하다. 그러나 시인은 서사시의 막바지에서 회의에 빠졌던 듯하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 시는 살인으로 끝납니다. 투르누스의 죽음으로요. 무얼 위해서 그랬을까요? 투르누스에 대해서 누가 신경쓴다고? 세상은 죽고 죽이는 데 열중한 잘생기고 겁 없는 젊은 사내들로 가득 차 있어요. 어떤 전쟁이라도 그런 이들이 모자라는 법은 없지요."(106p)


 영웅은 고결한 이였다. 시인이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었다. 『라비니아』의 아이네아스는 고결함 자체에 의문을 갖는다. 트로이부터 아프리카까지, 저승에서 라티움까지, 그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아는 남자였고, 그의 운명은 전쟁과 죽음의 옆을 걸었다. 싸워야 할 때가 되면 그는 분노에 취해 누구보다도 날뛰었다. 우리의 안내인 라비니아는 그의 갈등을 숨기거나 찬미하지 않고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만약 그가 전투의 분노를 그의 경건함의 적으로, 그의 보다 나은 자아를 압도하는 순간적인 분노로 볼 수 없다면, 만약 그가 투르누스를 죽인 것을 치명적인 한 순간의 마음의 혼란으로 볼 수 없다면, 그 분노를 자신의 참된 본성의 일부, 사물의 바른 질서의 일부로 보아야 했다. 그가 지지하고 봉사하고 지키기 위해 인생을 바쳐 온 질서 말이다. 그가 투르누스를 죽인 것을 그 질서가 옳은 행동이라고 받쳐 준다면, 질서 자체는 옳은 것일까? 투르누스의 죽음은 아이네아스의 대의의 승리를 확실하게 해 주었지만, 인간 아이네아스에게는 치명적인 패배였다. 투르누스를 칼로 찌르며 아이네아스는 그 살해를 희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무엇의,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303p)


 한 명을 죽이면 살인이고, 천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 했다. 그렇다면 영웅 아이네아스의 위대함은 살인의 반복일 뿐이라고 해체할 수 있다. 그에겐 대의가 있었고 정의가 있었으나, 그가 죽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투르누스를 살려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투르누스를 죽였고, 그 행위는 정의와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그렇다면 아이네아스가 따르던 질서란 경건함이란 상당히 자의적인 것이다. 경건함에 대한 회의는 여기서 온다. 그러나 경건함은 그의 삶의 목표이자 궤적이었고, 아이네아스 자신의 역사였다. 아이네아스는 시인의 입을 빌려 말한다. "내가 지금의 나인 것은 내가 죽인 사내들 때문인가? 내가 투르누스를 죽였기 때문에 아이네아스인 것인가?"(347p)

 이 고민은 전달자가 아이네아스 아닌 라비니아이기에 『아이네이스』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베르길리우스에게는 영웅과 전쟁이 역사였고, 죽음에 회의를 품자 그는 더 나가지 못했다. 아이네아스의 의문에 해답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시는 미완성이다. 르귄의 라비니아에게는 전쟁과는 다른 종류의 역사가 있다. 『라비니아』는 베르길리우스의 역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서술되지 않은 틈새를 메우며 역사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이 이야기는 전혀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바꾸거나 끝맺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 부수적인 등장인물이 제안하는 사색적인 해석, 즉 어떤 암시의 전개이다." 

 해답은 여전히 없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이 다시 쓰기는 충분히 전복적이다. 『라비니아』를 읽는 것은 『아이네이스』 다시 읽기이기도 하다.



이야기: 재구성된 진실


"사물의 진실이란 여러 세기에 걸쳐 꾸준히 형성된 것이다. 진실은 결코 단순한 사실적 경험이 아니며, 모든 경험들 중에서 가장 역사적인 것이다. 과거에 시인이나 역사가들이 각 군주의 이름과 족보가 잘 갖춰진 왕조의 역사를 온통 상상으로 꾸며낸 때가 있었다. 그들은 위조자도 아니었고 무슨 불온한 신념에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아주 정상적인 방식에 따라 진실에 도달하려고 했을 따름이다."
 
-폴 벤느,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시인의 이야기는 시이기도 하지만 역사이기도 했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마치 기자가 자신이 이해한 현실을 글로 써내려가듯 역사를 서술했다. 역사가들은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자료를 수집했고, 출처를 표시하는 대신 해석 과정을 거쳤다. 자신이 이해한 바에 대해 전문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서술했다. 사실이 지배하는 시대는 이야기가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지만. 고대에는 이야기가 진실의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가 아는 트로이 전쟁은 역사가 아니라 겹겹이 쓰여진 이야기로 형성된 것처럼 말이다. 『아이네이스』가 로마 건국 이전의 이야기/역사라면, 『라비니아』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비니아』에 등장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실존인물 베르길리우스가 아니다. 로마의 그 위대한 시인은 『신곡』에 등장해 단테를 안내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곡』의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재구성한 인물이다. 르귄은 라비니아와의 대화 중에 그가 단테의 안내인 역할을 했음을 천연덕스럽게도 끼워넣는다. 이를 통해 말하는 것은, 사실을 주춧돌로 삼아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바로 우리가 아는 이야기다.

 라비니아가 정말로 어떤 인물이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실제 그녀는 라틴어로 말하고 청동기 사람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이천 년도 훨씬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마 이전의 라비니아, 베르길리우스의 흐릿한 라비니아, 르귄이 다시 쓴 현대의 라비니아는 시대를 무시하고 혼용된다. 겹겹이 중복되는 서술을 통해 라비니아는 불멸의 모호한 존재가 된다. 이 인물이 실제 역사와 동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라비니아는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지만, 지금도 충분한 호소력을 지닌 화자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죽음을 초월한다. "이해하는 것은 죽어 있는 것과 상관없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도록 해 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시이다." 이야기는 불멸이다. 그것은 모호하기에 언제나 다시 쓰여질 여지가 있고, 기회를 얻을 때마다 거듭 되살아난다. 라비니아는 훌륭한 안내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말을 전한다.


"우리 모두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적개심은 어리석고 옹졸하며, 분노조차 부적당하다. 나는 바다 표면에 하나의 빛나는 점일 뿐이며, 샛별에서 뻗어 나오는 어렴풋한 반짝임일 뿐이다. 나는 경외감 속에서 산다. 내가 살아 있지 않다면, 그래도 나는 바람을 타는 말없는 날개, 알부네아 숲 속에 형체 없는 목소리이다. 나는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가라, 계속 가라."(116p)

 


* 이 글은 웹진 <판타스틱> 기획기사로 작성되었습니다.

http://cafe.naver.com/nfantastique/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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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영희 씨 창비청소년문학 70
정소연 지음 / 창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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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내에 SF를 쓴다는 자각을 갖고 SF를 지향하는 작가는 한줌이다. 그리고 하나하나가 뿌듯한 이름이니 모든 이름을 외워둘 필요가 있다. 한줌이라는 말은 비하가 아니라 사실이다. 국내 SF 역사는 한 백 년쯤 되지만 매번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80년대에는 〈스포츠 서울〉에서 신춘문예 SF 부문을 마련했지만 지속되지 못했다. 90년대에는 PC통신에 힘입어 '등단' 없이도 신인 작가들 책이 출간됐지만 현재까지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는 듀나 뿐이다. 2000년대에는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이 열렸지만 3회에 그쳤다. 현재는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에서 주관하는 웹진 크로스로드나 국내 최대의 장르 작가집단일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있는데, 언제나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어디 가서 자랑해도 좋을 작품이 발표되곤 한다. SF를 읽지 않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 SF를 읽는 사람들마저 잘 모르기도 하지만, 다시 장담컨대 국내에도 SF 작가들이 있고 이는 하나하나가 뿌듯한 이름이니 외워둘 필요가 있다. 정소연은 그 한줌에 들어가는 이름이다.


단편집 『옆집의 영희 씨』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정서는 초연함이다. 등장인물들은 나름대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우주비행사가 되려고 평생 노력했는데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경우, 중요한 시험을 치는 중에 곤경에 빠진 사람을 만났는데 도울 사람이 자기밖에 없는 경우, 자기 일을 완수하기 위해 남의 꿈을 끝내야 하는 경우 등, 정답이 없고 피할 수 없는 갈림길이다. 각 인물은 목표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원하던 궤적에서 빗나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 앎에 으레 따라붙는 불안, 공포, 회의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기 발 디딘 자리에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할 자유를 누린다. 『옆집의 영희 씨』에 실린 단편들이 무력감이나 자포자기가 아니라 초연함으로 나아가는 이유다. 


정소연은 장애, 청소년, 성정체성에 관심을 갖고 이런 주제를 다루는 소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는 번역자이기도 하다. 『옆집의 영희 씨』에서도 젠더는 빈번히 암시되는 주제다. 이는 등장인물의 성적 지향이 특이하게 취급되지 않는다든가, 여성 화자가 자신이 여성이라는 데 천착하지 않는 방식으로 암시된다. 작가가 차별과 편견에 무지하기 때문에 생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언급 없음', '주목 없음'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본연의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는 최선의 상태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 이 리뷰는 <다른 시대, 다른 세상의 여자들: 여성주의와 장르소설의 상호작용>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의 일부로, 여러 책을 다룬 글은 각 책으로 연결할 수 없어서 권마다 분리해서 올립니다. 전체 글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lakinan.tistory.com/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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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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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 관한 책이고, 그래서 이론, 역사, 지식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저를 순식간에 끌어들였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되돌아간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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