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다 살아났습니다요
무라카미 다케오 글.그림, 장은선 옮김 / 네오카툰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1.

간병을 해본 적이 있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를 위한 거였다. 처음에 할머니는 손을 다쳤다. 백숙을 만들려던 차였다. 닭을 내려치려던 칼이 할머니의 엄지손가락을 쳤다. 피가 흐르는 손을 붙들고 함께 신경외과를 찾았다. 봉합수술을 했다. 지병으로 당뇨를 앓고 있던 할머니는 쉽게 손이 낫지 않았고, 이후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날씨가 오늘처럼 쌀쌀하던 어느 날, 결국 혈압이 계속 좋지 않았던 할머니가 쓰러졌다. 당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어딘가 전화를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집에 먼저 돌아온 동생이 할머니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어디에 있었더라. 하기 싫은 공부를 하고 있었겠지. 뇌출혈 수술을 받은 할머니는 한동안 의식이 없었다가 약간씩 호전되는 듯했다. 나는 가끔 찾아가 할머니 곁에서 간병 비슷한 걸 했다.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할머니의 하얀 머리를 보았다. 할머니는 염색하고 외출하는 걸 좋아했는데. 가끔 정신을 차린 할머니는 웃으며 언능 나아서 돌아갈꾸마하고 말했다. 나는 그때도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손을 잡았던가. 하지만 당뇨가 심했던 할머니는 수술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뇌출혈은 칠순을 넘긴 환자에게 그렇게 쉽게 호전되는 병이 아니었다. 날씨가 점점 무더워지던 어느 날 새벽, 지나치게 일찍 나를 깨운 엄마가 할머니 돌아가셨다하고 정직하게 발음하는 걸 들었다. 그 이후로는 너무 정신이 없었다.

 

2.

그렇게 쭉 정신없이 지냈던 것 같다. 다만 병원이라는 공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다행히 아직까지 병원에 며칠씩 누워있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병원 생활이라거나 죽음이라는 걸 제대로 실감한 적이 없다. 하얀 시트 위에서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죽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일은 어떤 기분일까. 그런 일이 한순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이 벌어진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인과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그러고도 네가 의사야!” 같은 비약적인 대화가 아무렇지 않게 오고가는 공간. “좀 더 살아주길 바랐는데”(17~18)죽으면 되지 뭐”(101)가 교차하는 공간. 어쨌든 나는 투병이 아니라 간병의 입장에서 병원을 경험해 왔고, 그래서인지 무라카미 다케오의 <죽다 살아났습니다요>를 좀 다르게 읽었던 것 같다. 상투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항상 죽어가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인과율이 무너지는 병원이라는 공간에 소속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한다. 죽음의 당사자가 되어서야.

 

3.

스스로 선택한 일인데 왜 이렇게 힘들까.”(97)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지금 하고 있는 힘든 일에 대해서 정당성과 당위를 부여한다. 내가 힘든 건 그래서 내 탓이리라. 하지만 우리에게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면? 선택지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누군가 이미 날조해 놓은 정답지였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나는 애초에 네가 잘했으면 될 것 아니냐라는 말을 혐오하는 편이다. 그런 말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 말들은 애초로 항상 환원된다. 그리고 결코 그 애초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인 다케오가 처했던 상황도 그와 같다. 그는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고, 제때 밥을 먹으면서, 과로하지 않고 건강을 챙길 줄도 알았을 것이다. 분명 그렇다. 하지만 누구든 이러한 애초에서의 선택이 올바르지 않았다고 해서 독박을 쓸 이유는 없다. 그가 선택해 온(혹은 선택해왔다고 믿는) 삶은, 그가 치유되는 과정처럼 결코 홀로 만들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이 직조되고 날조되고 파국으로 치닫는 순간은 결코 개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4.

죽다가, 살아나기. 이 말처럼 동어반복인 말은 없다. 우리는 항상 죽고 있고, 동시에 살아나고 있다. 그러므로 죽기-살기라는 말은 개념의 껍질(기표)이 가진 차이 속에서 기실 그 알맹이(기의)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나는 요즘 대부분의 개인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죽어가는 것이 살아지는것보다는 낫다. 좀비의 삶, 마치 -죽음의 상태로 삶을 지속하는 이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어쨌든 그래도 모두 살아나기를, 살아가기를 바란다. 모두 흰 시트에 누워 자신의 지나온 삶을 반추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을 필요는 없고, 그저 우리 모두 죽지 않기 위해발버둥치고 있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지금 거울 앞에서 한 번쯤 상기해보면 된다. 우리는 그 발버둥을 희망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곤 하니까.

 

5.

지난주에 나는 할머니의 무덤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할머니에게 낯 두껍게 덕담을 청했다. “밖에 나와 보니,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151)는 다케오의 말처럼, 다시 할머니가 쓰러졌던 쌀쌀한 계절이다. 지금 문밖에는 눈이 펑펑 온다. 할머니의 하얀 머리처럼, 누가 그려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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