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경술국치 100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로부터 100년이 흘렀다. 제대로 사과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배상의 길까지 막혀버린 이 울분을 우리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독도를 내 놓으라고 한다.
북한은 협정이나 배상을 받지 않았으니 북한이 배상을 요구하면 배상을 해줄 것인가?
과거사의 상흔을 묻고 미래를 바라보며 일제가 우리에게 입힌 죄악상을 묻어두자고 하는 사람들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어진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더더욱. 일제강점기가 한반도의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국외추방을 해야 할 것이다. 뼈속깊이 친미파, 친일파가 득세하는 나라 대한민국, 죽어서도 제대로된 묘비명을 세우지 못하고 후손들마저 찾지 않는 그분들에게 한없이 죄스럽다.

 

박정희, 김종필의 망국적 한일협정!! 배상도 못해준다고, 독도도 내놓으라 한다.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원수의 돈은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돈으로 독재자가 경제성장의 밑천으로 삼아 우리 이만큼 되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는가? 혈서를 쓴 다카키 마사오와 김종필이 맺은 한일협정이 독도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보상문제를 원천봉새하고 있으니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까

한국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 에 따른 해석상의 분쟁 해결을 일본정부에 제안했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대해 일본정부는 15일 야마구치 쓰요시 외무성 부대신의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청구권 협의 제안과 관련 1965년 국교정상화 당시 해결이 끝났다” 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고수하며 한국 정부의 협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반발하여 '한일협정 무효화를 위한 국민행동 준비위원회'는 16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발족식을 열고 1910년 한일합병 국치조약과 1965년 한일협정을 무효로 하기 위한 실천에 나선다고 밝혔다.
준비위는 성명에서 "박정희 정권이 대일 굴욕외교 끝에 체결한 한일 기본조약과 여러 협정은 일본의 후안무치한 역사 왜곡을 묵인하고 방조한 결과"라며 "군부독재의 모욕적 유산인 한일협정을 무효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준비위는 "1965년 한일협정 무효화를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 시민의 투표를 통해 반영해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뉴스보도중에서)

 

과거의 역사를 묻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만들어가자며 일제강점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친일망국적 역사관을 가진 이들이 횡행하는 한반도. 아직도 친일잔재, 친일파 청산이 되지 않았으니 그들이 우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일본. 독일만 가해자가 아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도 가해자다.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미국은 제국주의 침략기에 약소국을 침탈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총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독일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배상을 지금도 하고 있지만 일본은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미국의 묵인하에 전범 처벌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전범 처벌을 받은 경우도 많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로 입은 피해를 과대포장하고 있다.
제국주의 정책으로 막대한 이득을 본 2차대전 패전국만이 아니라 승전국도 피해를 입힌 나라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런 목소리는 너무나도 낮다.


저자는 필생의 업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피와 한이 서려있는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현지를 답사하며 사진으로 담아 오고 있으며 이 책은 무려 15년간에 걸쳐 집필했다고 한다.

 

나라 잃은 민족은 살아도 사람으로 산것이 아니다.
재일 사학자인 박경식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1939년부터 1945년에만 약 100만명이 넘는 우리 동포를 강제 연행했고 군속으로 37만명을 전선에 동원했다. 조선 국내에서 동원한 485만명과 합하면 실제로 6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연행된 셈이다. 후쿠오카 지역 41개 광업소에 배치돼 강제 노역에 시달린 사람은 약 11만 명인데 그 가운데서도 아소탄광은 조선인 징용자에 대한 노동 착취가 가장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3p(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의 증조부가 창업주인 탄광이다.)

조정래의 한강을 보면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목욕하는 순서중 꼬래비가 조선인 노동자였다고 한다. 필리핀 다음으로..나라 잃은 민족이니 사람대접도 제대로 못받았다.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
강제 징용의 현장이 이 네 지역뿐이랴, 사할린에서 홋가이도 일본 전역에 걸쳐 조선인의 피와 땀, 한이 서리지 않은 지역이 없고 일제강점기로 인해 만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일장기를 달고 전쟁에 참여해야 했던 사람들의 원혼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음이다. 우로토로 비슷한 곳이

후쿠오카현 미이케 탄광,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사가현 이마리 가와나미 조선소, 사카가 우토로 마을, 제2의 우토로 오사카 아파치 마을, 히로시마 야스노 발전소,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 수도 없이 많은 탄광과 무기공장, 비행장, 방공용 터널,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았지만 동경의 지하철 공사현장에도 관동대지진시 참혹하게 숨져간 수많은 우리 민족의 한과 눈물이 서린 저주받은 일본땅, 우리 국민들중 일부는 일본은 더 센 지진으로 사라져야 할 나라라고 더 센 쓰나미로 천벌을 받아야 할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아소 타로 가문은 물론이고 일본 굴지의 대기업인 미쓰이나 미쯔비씨 역시 강제 징용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를 일구었음에도 그들은 강제 징용 피해보상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고 보상한 것 역시 그당시의 금액으로 지불할 정도로 뻔뻔스럽기 그지없다.

 

 

 그들은  강제징용의 현장을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한다고 한다. 히로시마의 평화공원은 물론이고 그 어느 현장이고 공식적으로 강제징용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조선인들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한적한 곳에 세운 위령탑에서나마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남아 있는 강점기 역사의 현장, 일본은 물론이고 북한, 중국, 하와이 등에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우리 모두가 발로 찾아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그 역사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한일협정으로 챙긴 돈으로 경제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독재자를 미화하고 그 딸이 가장 강력한 대권주자인 나라 대한민국. 그래서 일본은 민주당이고 자민당이고 모두 일제강점기에 대한 반성은 커녕 신사참배를 8월 15일이면 강행하는 정치인이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우리안에 남은 친일의 잔재, 그릇된 역사관으로 우리 역사책을 더럽히는 그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일본에게 진정어린 사과와 배상을 톡톡히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은 전국의 모든 도서관은 물론이고 각급 학교에 필독서로 비치하여 널리 읽혀야 할 책이다.


신세타령가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숯 파러 왔느냐
일본 땅 좋다고 누가 말했느냐 일본 땅 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숲을 팔 때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 말만 하면은 몽두리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소! 고향에 가고 싶소!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썼네
어머니 장에서 쌀가루 부쳐 왔네 쌀가루 받아 들고 눈물만 흘렸네
보따리 풀어서 쌀가루 집어먹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 불러 봤네
어미니 소리도 크게 못 부르고 감독 놈 겁이 난서 가만히 불러 봤네

 

'대일본제국 군인은 전쟁터에서
3일이나 4일 밥도 안 먹으면서 적들과 싸우고 있다!


너희들은 세 끼니 꼬박꼬박 밥을 먹고 있지 않느냐!'

 

십오 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라다가 두드려 맞았네
몽두리 맞고서 굴 안에 끌려와서 천장이 떨어져서 이 세상 이별했네
죽은 이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면 서 이름만 불러 봤네
감독 놈은 몽두리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숯 담아내라 하네

 

'대일본제국 군인은 전쟁터에서
3일이나 4일 밥도 안 먹으면서 적들과 싸우고 있다!
너희들은 세 끼니 꼬박꼬박 밥을 먹고 있지 않느냐!'

 

이 말을 듣고서 복장을 두들리면서 나라 뺏긴 민족은 이렇게 서러움 받나
몽두리 맞을 각오는 같이 맞지 하며 하꼬를 제쳐서 숱을 부어 냈네
하꼬를 일 바다서 죽은 사람 실어 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천장만 쳐다봤네
여기저기에서 죽은 사람 많았는데, 초상 치르는 것은 한번도 못 봤네.

 

-사진만엽록 10권중 9권 아리랑 고개에서 인용

 

* 당시에는 조선인이 광산에서 강제 노역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을지라도 장례식을 치를 수 없었다고 한다. 밤늦은 시간에야 동료들에 불에 태운 유골을 수습하여 근처 일본인들이 묻힌 묘지 근처에 몰래 묻고, 가지고 간 폐광석(보타이시)으로 조선인의 묘지를 표시했다고 한다. 조선인의 묘지라는 것이 알려지면 가만 두지 않기 때문에 묘지를 세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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