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김용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대왕이 아니라 태왕
동창이 고교시절 본인의 이름이 호태라는 빌미로 책마다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알던 광개토왕, 광개토대왕이란 칭호와 너무 달랐기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國岡上)은 광개토태왕이 묻힌 지역,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나라의 영토를 넓힌 광개토태왕의 업적, 평안(平安)은 백성을 편안하게 한 치세를 표현, 호(好)는 왕을 아름답게 부르는 미칭,  太王은 일국의 왕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를 의미한다. 영락(永樂)이란 독자연호를 최초로 사용했고 장수왕은 건흥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신라는 법흥왕대에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진덕왕 2년 이후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이는 조선에도 이어지다가 대한제국에야 독자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우리에겐 광개토대왕이란 명칭이 익숙하나 이보다는 광개토태왕이 맞는 칭호이며 모두루의 묘지석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신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엔 국강상 강개토지호태왕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태왕대에 고구려는 일개의 국가가 아니라 신라, 백제, 가야, 북여, 거란, 말갈, 숙신 등을 속민으로 거느린 제국이 되었고 왕의 호칭이 대왕이 아니라 태왕으로 부르게 된다.



광개토태왕비에 담긴 의미
초가집보다 키가 큰 높이 6.39m, 무게 37톤, 총 1775자의 글자가 새겨진 비문, 그중 일부는 해독이 불가하여 갖은 억측이 난무하고 더구나 1883년 최초 발견 탁본자가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코 가게아키인지라 사서답지 못한 일본서기의 기록에 짜맞추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시키는 사료로 인용되기도 하나 이 책을 읽고 보면 비문이란 사서와 달리 주인공의 입장에서 읽어야 제대로 해독이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터무니 없는 억측이요 주장이다. 더구나 일본 날조설도 제기된바에야 일러 무엇하랴

 

장수태왕은 광개토태왕의 비를 세운 이유가  후연과 백제에 대한 복수를 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고 고구려제국을 연 아버지의 위업을 높이고 천손인 고구려 왕실의 기개를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다면 일본에 유리한, 고구려에 불리한 기록은 비문에 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비문은 추모왕의 건국신화, 광개토태왕의 업적, 묘지기에 대한 규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광개토태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는 것이 드물어 조선시대엔 잊혀진 왕이었다가 근래 들어 태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이란 저자의 분석이 씁쓰레하다. 삼국사기와 비문의 연도가 1년차이가 나는 것은 비문이 옳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18세에 즉위하여 22년간 치세를 한 태왕, 그가 벌린 정복전쟁, 신라 구원전쟁,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나 제도에 대한 기록이 일천하여 더 많은 사료가 발굴되기를 기다려야 그분의 위업을 제대로 알수 있을 것이라니 안타깝다.

 

Faction보다 Fiction이 강한 사극
삼국시대와 그 이전의 기록이 일천하여 역사적 기록만으론 그 시대를 복원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대하 드라마는 팩션보다 픽션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바램이 있다면 부록이든 자막으로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여 시청자들에게 가이드를 제공하여 혼선을 줄여주었으면 한다. 수사반장에서 범인은 언제나 흉악하게 생기고 무식쟁이든 우리 적국의 인사들을 모두 그렇게 그리는 것도 썩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독도에 때한 깡짜 등의 이유로 사극이 인기절정이다. 계백, 무사 백동수, 공주의 남자, 광개토태왕..공주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영웅을 다룬 이전의 사극의 판박이를 보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영웅은 극한 시련을 극복(장보고, 대조영, 대무신왕, 연개소문..), 반대파와의 극한의 암투에 이르고 보면 어디선가 본듯한 장면처럼 보여 아쉽다.


사극의 고정 패턴을 따라하는 것이 잦으면 찬물을 끼얹게 된다는 kbs의 사극에 대한 평가가 담긴 시사프로그램을 보고 바로 긍정하게 된 연유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이 책을 읽고 보니 드라마의 픽션이 더 도드라지게 들어온다. 근초고왕이란 드라마에 나왔던 전연의 황제 모용황(이를 연기한 송용태씨가 광개토태왕에선 고국양왕을 연기)의 다섯째 아들 모용수가 후연을 개창하여 광개토태왕의 적수로 등장한다. 선비족이 모용선비, 우문선비 등으로 갈래가 나누어진다
국상의 아들이자 상인으로 등장하는 고운은 훗날 풍발(후연의 장수)의 지원으로 북연의 왕이 된다고 한다. 유주자사 진의 무덤으로 알려진 덕흥리 고분의 묵서, 모두루고분 등의 사료를 기준으로 봐도 광개토태왕과 함께 싸운 장수나 신하의 이름은 오리무중이다.

 

거란, 백제, 후연, 신라, 가야, 왜, 그리고 부여
후연은 고구려 황제의 능을 도굴해가고 근초고왕과 근구수와의 싸움에서 고국원왕은 숨을 거둔 원한. 소수림왕과 그의 아우 고국양왕은 외치보다는 내치로 광개토왕이 할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었다.
태왕은 후연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으로 후연을 바로 공격하지 않고 북쪽의 거란을 정복하여 배후를 튼튼히 하고 내물왕의 요청으로 가야와 백제 왜의 세력을 물리치나 후연의 침입으로 군대를 북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고. 백제를 공격하여 수많은 성을 빼앗아 항복을 받았음에도 완전 지배하지는 못했다.
후연과의 일전을 벌일때 백제의 사주를 받은 왜가 침입하여 다시 눈물을 머금고 회군을 해야 했다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동부여를 아룰러 그의 정복사업은 막을 내린다.

 

평양천도 이유.
광개토태왕부터 추진된 평양천도는 국내성은 수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엔 부족한 도읍지, 5부족으로 나뉘어진 귀족이 좌지우지 하는 나라(드라마만 보면)였기에 왕권강화를 위해 평양으로 천도한 것이지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이 이유가 아니라는 소리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광활한 대륙을 누볐던 영웅 광개토대왕, 정복군주라서 영웅이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백성을 평안케 한 점을 더 높이 사 호태왕이란 미칭을 얻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고구려의 고분들, 아직도 발굴되지 않는 사적지를 남북한이 함께 투자하여 발굴해 나간다면 광개토태왕의 위업, 고구려제국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 나아가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하시라도 빨리 밝혀져 일본의 강짜와 중국의 억지가 백일하에 들어났으면 좋겠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을 선조로 둔 우리는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도 충분하며 거란, 말갈, 선비, 숙신, 백제, 가야, 신라인을 아우루는 제국을 분열이 아니라 통합으로 일군 태왕의 정신을 다문화되어가는 대한민국이 따라 배워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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