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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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신작이라니 지체할 일인가. 바로 읽었다.

최근작들이 판타지나 신화적 요소들이 있었는데, 이런 결은 조금 취향의 범위를 벗어났다.
앞으로 나올 작품들은 이제 이런 길로 가나? 싶은 마음에 조금 서운해하면서
이번 작품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돌아왔다. 취향의 그 구병모.

파과의 무드랄까.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보이는 아가씨의 존재에 집중해서 따라가다가 확장되는 이야기에 더더욱 빨려 들어갔다.
외로운 인간 사이의 불가해한 동행이라고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상처에 접촉해 타인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게 생각해 보면 이런 범죄의 분야에서나 유용할 법한 능력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면서...

그렇게 공허해지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이 독서, 책을 읽는 일이 된다는 것이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졌다.

오랫만에 책에 푹 빠져든 독서였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 칼로 당신에게 구애하고
상처 입혀서 사랑을 얻어냈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

- 비단보로 감싼 은수저도 시나브로 닿은 공기에 검게 변해버리듯이, 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심장이 그리 안전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우주에서 제일 불안정한 공간임을 상기하면, 뭐라도 말하거나 쓰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기보다는 한 발자국만큼이나마 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로도 하고 글로도 써내려가겠지만 가능한 한 저의 해석과 감정이 그 일들을 덜 변색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겹의 문장으로 감싸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진실은 은닉과 착란 속에서 뒹굴 때 비로소 한 점의 희미한 빛을 얻기도 합니다. - 9

-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란 비록 그것으로 인해 변하는 실재가 없음은 물론 그것이 거쳐가는 길이 모순의 흙과 불화의 초목으로 닦이고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에 결핍과 공허만 남아 영원한 교착상태를 이룬다 한들, 그 행위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거드는 법입니다. 언어의 본질과 역할을 두고 명멸하는 무수한 스펙트럼 가운데 그것만큼 괜찮은 구실이 또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 41

- 바람직하지 않음이든 재미없음이든 간에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 가운데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 63

- 천만에, 오히려 반갑지. 그보다 안 하긴 뭘 아무것도 안해, 책을 읽잖아. 지적인 무리는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난 지성에 대해서는 허영이란 말 붙이는 거 찬성하지 않아. 그건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켜. - 164

- 솔직히 고용된 입장에서는 돈 준다는데 뭘 따질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인간에게는 과잉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무언가를 초과하고자 하는 마음, 잉여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듭니다. 하물며 배움의 과잉은, 무엇을 배우는지가 때로는 관건이겠습니다만 인간에게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넘쳐도 해로운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학을 위해, 승진을 위해,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배움은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되겠습니까. 보스가 애호하는 듯싶은 셰익스피어를 빌려오자면 <리어왕>의 2막 4장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필요에 대해서는 이유를 따지지 말라. 아무리 비천한 거지라고 해도 하찮은 물건일지언정 필요 이상을 가지게 마련이며, 자연이 인간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허용치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짐승의 그것보다도 가치가 없어진다. - 166

- 책을 읽었다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때로는 뱀의 몸통을 손으로 붙잡는 식으로 책을 이상하게 읽고서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 205

- 한편 이야기를 익고 나면 그 뒤에 존재하지 않는 속편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게 되는 재미가 잠깐은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그만두었어.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속편을 없애버리는 데 가담한 사람이니까. 내 이야기 또한 속편이 없어야 마땅하니까. - 274

- "신이라는 건 있잖아, 그냥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라고 생각해."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신을 응답의 존재로 간주하며 신이 대답을, 특히 그중에서도 축복에 가까운 무언가를 내려주지 않으면 멋대로 증오하거나 부정하기 일쑤인데 질문이라니, 그건 좀 사고의 전환같았어. - 285

- 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그렇다면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인생의 목표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인지 되물을 필요는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목표를 부여하지 않았고, 우주는 우리의 의미 따위 알지도 못할 뿐더러, 신은 우리에게 별 관심 없으니까. 동양사상으로 예를 들자면, 노자의 <도덕경> 가운데 한 줄을 불러줄 테니 이건 받아 적으렴. 일단은 수업시간인데 한 줄이라도 남겨야지.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하늘과 땅 같은 자연은 그냥 존재할 뿐이지 딱히 어진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 따위 만물의 입장에서는 짚으로 엮은 개만도 못하다는 뜻이야. 그러니 너의 눈앞에 있는 한 권의 소설은 그 무의미의 운명에 어떻게든 의미 비슷한 걸 부여해보고 죽으려던 예술가들의 오랜 싸움과 필연적인 패배의 흔적이야. - 302

-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 344

2025. oct.

#절창 #구병모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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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수업 ㅣ 교양 100그램 2
변영주 지음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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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에 관한 내용이 꽤 많았다.

퀴어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도, 독립영화 제작의 부흥에 대해서도,
노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여성주의에 관하여서도,
문학에 대해서도..

하나의 문장을 찾는 일에 대해서도.

이 시리즈가 기대에 못 미친다고 이전 두 권을 읽고 생각했었는데
창작수업은 좋았다.

- 나는 우리가 애초에 같은 전선에 섰던 적이 없으며, 조심스럽게 우리의 교집합을 조금씩 확인해 보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깃발을 흔드는 이들에게 누가 당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아직은 교집합의 크기가 외로움과 욕망에 비해 작을 뿐이라는 그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결국 우리가 교집합을 키우기 위해 해야 할 단 하나의 일은 '너'의 이야기를 수줍게 듣는 것밖엔 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 5

- 우리 사회와 환경을 더 건강하게 바꾸는 건 결국 스스로를 '일개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함게 무언가를 만들어야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40

2025. jul.

#창작수업 #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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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하게 서글픈 자의식
박참새 지음 / 마음산책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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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깊은 우울, 자기 비하에 침잠한 시인.
위태롭다... 라는 위험신호를 받기도 하고
나조차도 위태로워진다는 전염의 느낌을 받기도 하고

그러나 이 글로 어느 정도 위태로움이 해소가 되었으면 하는 염려.

다음 시집을 기대하고 있으므로.

- 슬픔에게 언어를 주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멕베스>

- 나는 가끔 내 안의 어떤 부품이 완전히 고장 나서,
뭔가를 전혀 할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이런 생각을 오래 하면 이어서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혹시 내가 잘못 태어났나, 그 흠결이란 것이 너무나도 미세해서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그리하여 긴 세월을 조금 부서진 채로 견디다가 끝에 다다라서야 한계를 느낀 나머지 스스로의 모든 것을 점검해야 하는 정도의, 가느다란 결함. - 8

- 나는 슬픈 사람이다. 이유 없이 슬픈 사람이다. 그 어떤 시절도 사람도 내가 슬픈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모든 슬픔에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아주 많은 슬픔이 이유 없는 채로 우리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갈 곳 잃은 슬픔들이 매일매일 산책한다. - 8

-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일기는 조금...... 징그럽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으니 그의 일기를 읽는 것보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는 게 더 쉬울 테다. 게다가 글을 쓴다는 건 가식적인 일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일기인들이 일기에 모든 것을 다 적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실상의 사람과 일기 안의 사람의 차이가 더욱 심해질 텐데, 그 이격을, 자꾸만 벌어지는 이격을 계속해 확인하면서 다시 깨닫게 되겠지 쟤는 살아 있었던 거야, 안 죽었다고. 그래서 나는 산 사람들은 산 채로 보고 싶고 읽고 싶고 그렇다. - 30

- 필요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내게는 오래되고 낡은 부채감이 있다. 수치심에 가깝다. 그것은 자주 나를 찾아온다.
내가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나 혼자 말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나 홀로 어떤 대열의 맨 뒤로 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 36

- 방향을 잃으면 시간이 걸린다. 사람을 잃으면 마음이 걸린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을 잃으면 나는 무엇을 걸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아주 오래 슬프게 한다. - 40

- 우리 모두에겐 뭔가가 있어. 그건 너무나 깊이 내재되어 있어서 삶 동안 발현되지 않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고, 사실은 조금씩 엇비슷한 크기의 서글픔이라는 걸, 그렇다는 걸 알아서는 아니고 그냥 조금 그렇게 믿어보기로 했다. - 157

- 언어는 머무르지 않는다. 영원히 떠다닌다. 항해하고 선적된다. 여행하며 옮겨진다. 그리고 기꺼이, 그것을 추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를 횡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 186

2025.. jul.

#탁월하게서글픈자의식 #박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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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소설 전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
이상 지음, 권영민 엮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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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고 있던 소설 두어 편은 아무래도 잘 읽혔다.

처음 접한 소설들은.... 문장과 문단을 읽고 지나가면 그 사이의 구조들이 모조리 해체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달까.

전반적으로 하루하루 살이의 서사들이고, 결핍, 빈곤, 체념, 무력감이 느껴지는 관조적인 시대의 시선.
논리라는 지점과는 거리가 있는 듯 무질서하다는 감각이 지배적이었다.
아무래도 근대 문학에는 취약한 독자의 어려움이 있다고나 할지.
파편화 되어 있는 심리의 반영일지도.
당시의 모던보이라는 번드르르한 계층의 허점 같기도.

시대상의 관찰이 유효하긴 하나, 그 지점도 한 성별 한 계층의 시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이라는 작가의 아우라 출중함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묘한 기분.

- 그저한없이게으른 - 사람노릇을하는체대체어디얼마나기껏게으를수있나좀해보자. - 게으르자.-그저한없이게으르지. - 시끄러워도그저모른체하고게으르기만하면다된다. 살고게으르고죽고 - 가로대사는것이라면떡먹기다. 오후네시. 다른시간은다어디갔나. 대수냐. - 60, 지주회시

- 18가구에 각기 별러 든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아내가 특히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으로 이 함석지붕 밑 볕 안 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따라서 그런 한 떨기 꽃을 지키고, 아니 그 꽃에 매달려 사는 나라는 존재가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거북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 87, 날개

-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 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 91, 날개

- 나는 조소도 고소도 홍소도 아닌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본다. 아내는 방그레 웃는다. 그러나 그 얼굴에 떠도는 일말의 애수를 나는 놓치지 않는다. - 95, 날개

- 나는 또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 114, 날개

-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ㅓ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 115, 날개

-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 질러 버려라 운운. - 127, 봉별기

- '사람이 유희적으로 살 수가 있담?'
결국 나는 때때로 허무 두 자를 입 밖에 헤뜨리며 거리를 왕래하는 한 개 조그마한 경멸할 니힐리스트였던 것일세. 생을 찾다가, 생을 부정했다가 드디어 처음으로 귀의하여야만 할 나의 과정은 - 나는 허무에 귀의하기 전에 벌써 생을 부정하였어야 될 터인데- 어느 때에 내가 나의 생을 부정했던가...... (...)
그동안에 나는 생을 부정해야만 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지 않았던가?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이 앙감질로 허탄히 허무를 질질 흘려 왔다는 그 희롱적 나의 과거가 부끄럽고 꾸지람하고 싶은 것일세. 회한을 느끼는 것일세.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다. 허무를 운운할 아무 이유도 없다. 힘차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재생한 뒤의 나는 나의 몸과 마음에 채찍질하여 온 것일세. 누구는 말하였지.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내 몸을 사바로부터 사라뜨리는 데 있다."고. 그러나 나는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부정되려는 생을 줄기차게 살아가는 데 있다.' 이렇게...... - 270, 십이월 십이 일

- 너는 또 어느 암로를 한번 걸어 보려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일찍이 이곳을 떠나려는가. 그렇다. 그 모닥불이 다 꺼지고 그리고 맹렬한 추위가 너를 엄습할 때에는 너는 아마 일찌감치 행복의 세계를 향하여 떠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 395, 십이월 십이 일

2025. sep.

#이상소설전집 #이상 #민음세계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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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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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빛의 호위가 장편으로 거듭났다.

분쟁지역의 상흔들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한반도에서는 직접 느끼기 어려운 아픔들을 보여준다.
멀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일들이다.

- 태엽이 돌아가는 동안 멜로디가 흐르고 눈이 내리고 둥글고 투명한 세계에서, 그 세계의 유일한 주민인 양 늘 혼자서......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 9

- 나는 가엾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 위험하게 살았고 결국 그 위험을 피하지 못해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그녀는 하고 싶었다. - 33

- 임신 육 주 차에 접어든 여성이 공습이 이어지는 도시에 남겨진 현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아이가 아이일 동안에는 좋은 것만 감각하고 싶다는 당신 혼자만의 생각이 대체 왜 중요한데? 인내심을 잃고 그런 질문을 쏟아낸다면 오늘 저녁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리라. - 40

- 살마를 만난 뒤부터 그녀는 사람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사진이 옳은지에 대해, 가령 배고픈 사람이나 다친 사람에게, 혹은 가족이나 연인, 이웃이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이 과연 맞는 지에 대해...... 각자의 공간과 시간에서 그 사진을 접하게 될 익명의 사람들이 사진 속 고통을 미술작품처럼 관람하는 것에 그치거나 총알과 포탄이 부재한 자신의 현실에 오직 안도할 뿐이라면, 그런 사진이 과연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이상 판단할 수 없게 됐다. 사진 한 장을 제대로 찍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했던 고생 - 분쟁 지역으로 가기 위해 지난한 절차를 밟으며 여러 번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던 것이나 예고 없이 수도와 전기가 끊기는 열악한 환경에서 잠을 설쳤던 것, 무엇보다 언제라도 치명적으로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원초적인 공포를 이겨내려 애썼던 그 모든 지난 시간들이 결국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진 모래성 같은 자기 만족에 불과할 수 있다는 허무를 알게 해준 피사체가 그녀에게는 살마였던 셈이다. - 55

- 피사체와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거리낌없이 촬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거리는 결국 냉정함의  거리라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런 생각은 셔터를 누른 이후 피사체가 살아갈 실제 삶에는 무심했다는 가각,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진을 위해 한 사람의 고통을 이용해온 건지도 모른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구원이 불가능한 세계를 편집한 것에 불과한 사각형의 파일 하나, 혹은 종이 한 장...... - 60

- 그 후로 가자 지구는 한 번 더 갔고 시리아는 세 번을 방문했어. 레바논과 남수단도 한 번씩 갔지. 폭격이나 포격의 순간은 찍지 않았어. 대신 사람을 찍었어. 게리 앤더슨이 내게 가르쳐 준 방식대로 말이야. 그 시절, 아는 정말이지 사는 것 같았어. 사람을 살리는 사진이라니,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어. 사진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이전에 매번 나를 먼저 살게 했지. - 89

- 사람들이 노먼을 시대의 양심이니 유대인의 마지막 희망이니 하는 수식어로 포장하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런 거창한 수식어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정의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뭐랄까, 나에겐 천진한 기만 같아 보였죠. 알려 했다면 알았을 것들을 모른 척해놓고 나중에야 자신은 몰랐으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에 경악하며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려 했던 그 수많은 비유대인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화가 나진 않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무기력해졌을 뿐이에요. 무기력한 환멸 같은 거, 그런 거였죠. - 125

- 자신을 꿰뚫고 지나갔던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애통하다고.
애통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고, 우리는 그를 오래 기념할 거라도고......
당신은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군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죽음의 가치에 대해 멋대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였다.
그녀는 그 모든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대신 질린 얼굴로 그 말을 한 사람을 응시했다. 상대가 흠칫할 때까지 집요하게. - 159

- 외로웠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다만 알 수 없었다.
숱하게 찍어온 사진들이 과연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말을 걸었는지,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형벌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낯선 사람의 손가락이라도 힘껏 잡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아기의 절박함을 기억하게 해주었는지......
알 수 없어서 그는 새벽까지 뒤척였다. - 178

- 지유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민영이 상체를 숙여 그 손바닥에 손가락 하나를 가만히 올려놓자 힘주어 잡아주었다. 민영은 순간 삶이라는 높은 대지에 손가락 하나를 걸치고는 힘껏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유가 민영을 붙들었다. 삶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말을 대신하며, 우리가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듯......
그래, 알아.
숭준이 지유가 깨지 않도록 그 머리를 조심조심 쓰다듬는 걸 바라보며 민영은 속삭였다.
이제야......
조금은 그걸 알 것 같아. - 214

- 건물 주변을 서성이다가 미용실 출입문에 기대어진 거울을 발견한 그녀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거울 앞에서 카메라의 전원을 켠 뒤 조리개와 감도를 조절하고 앵글을 맞췄다.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로 된 무기와 무너진 건물을 지나, 올리브나무와 묘비 없는 무덤을 지나, 총성이 울리는 도시 한가운데 설치된 임시 병원에서 절망하고 흐느끼는 사람들과 그들의 상처를 봉합하고 소독하는 누군가의 손길을 지나, 살겠다는 의지를 포기한 적 없는 아기의 악센 손가락을 지나,
한 아이가 들여다보던 스노볼 안의 점등된 세상을 지나,
그 아이를 생각하며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또 다른 아이의 시름 깊은 머릿속을 지나,
거울 속 세상과 그녀를 위해,
영원에서 와서 영원원으로 가는 그 무한한 여행의 한가운데서,
멜로디와 함께......
빛이,
모여들었다. - 250

- 누군가는 비웃을지라도,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다시,
믿고 싶었다.
사람들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일이란 것을,
권은에게 증여된 카메라가 이 세상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 작가의 말 중

2025. jun.

#빛과멜로디 #조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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