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기 혹은 영원히 남아 있기
강보원 지음 / 민음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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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즐겁게 읽었다.
김화진 작가의 책 추천을 어느 유투브영상에선가 보고 사보았다.

문학과 음악에 대해 이런저런 주절거림이랄까.

아마도 정지돈 금정연 같은 만연체로 자기혐오의 유머를 근간으로 삼는 그런 장르의 글쓰기.

짐작보다 더 궁시렁체여서 재미있었다.

혐오가 넘쳐서 연민이 되는 산문.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 대개 지난 일들에 대한 생각이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생각이다. 아니면 나와 전혀 관련 없는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생각들이거나. 아무튼 내가 생각한 것들을 글로 잘 쓰지 않으려는 이유들 중 하나는 그것들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는 그것들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 15

- 일을 하고 싶은 이유는 뭐랄까,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은 이유와 비슷하다. 물론 직장은 자기만의 방이 아니다. 내 말은 문학이나 여타의 공부와 좀 관련되지 않은 삶의 영역을 갖고 싶다는 뜻이다. 가급적 출판사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주면 가겠지만. 돈은 벌어야 하니까. 그래도 좀 부품 같은 게 되고 싶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 - 18

- 요즘에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 중이다. 좋은 태도를 갖고 싶다. 좋은 태도가 뭔가를 해결해 주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태도를 내가 취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범박하게 말하면 혼자서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것, 외부의 이런저런 사정들과 나 자신의 이러저러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를 획득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늘 잘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생각한다. 잘 살기. 잘 살아야 하고, 잘 살고 싶다. - 21

- 인생이란 게 도대체 가능한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할 때가 있다. 인생을 살려면 인생과 보폭을 맞춰서 착착 잘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모든 일들이 너무 빠르게 나를 지나쳐 간다. 지나쳐 가서 그냥 깔끔하게 헤어지면 차라리 좋겠는데 앞에서 목줄을 당기고 나를 질질 끌고 가는 것 같다. 해야 할 건 너무 많고, 하지 않은 것은 정말이지 너무 많다. 그것들은 결국 돌아오는데 그럴 때가 되면 숨이 턱턱 막힌다. 내가 할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했겠지. 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안 한 건데 왜 끝끝내 하라고 나한테 이러는 것인지? 억울하지만 그런 억울함은 어떻게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해야 한다. 하고 나면 좀 낫긴 하다. 다른 하지 않은 일이 만기가 차서 내 목덜미를 움켜쥐기 전까지는. 천천히. 좀 천천히 살게 해 주면 안 될까? - 28

- 자유라는 건 확실히 없을 땐 불행하지만, 그것이 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는 종종 끔찍한 것일 때가 많다. 이 사실을 외면하는 작품이나 주장은 내게 비현실적인 몽상으로 느껴졌다. - 50

-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작은 공터에 풀을 심는 일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을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돌려놓는 일처럼, 어쩌면...... 어차피 달리 할 것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을 써 보자.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 70

- 하루하루 실시간으로 성격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약간 콩나물 자라듯이...... 눈 돌리고 다시 보면 더 나빠져 있다. 이 기세라면 조만간 아무도 만나지 못할 정도가 될 것 같다. 내 성격...... 내 성격 어떻게 하나. - 72

- 나는 현재가 싫고 미래는 더더욱 싫다. 가장 싫은 것은 지금 도래-한-비-미래로서의 현재다. - 99

- 대개 나는 끔찍하거나 끔찍하게 멍청한 생각들만을 하고 그래서 내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생각을 말하려고 이 글을 쓴 게 아니라, 어떻게든 내 생각을 말하지 않으려고 이것을 쓴 것이다. 이 연재를 유심히 읽은 사람이 있다면 알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남의 일기를 유심히 읽을 리는 없으므로 나는 내 생각을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어떻게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가능하다면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생각이란 것은 내가 겪는 온갖 종류의 괴로움 중 압도적으로 대부분의 원인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 117

- 침묵은 금이지만, 사람이 또 금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 124

-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을 모르고 뭐 낭만적이고 그런 사람이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극도로 실용주의적인 사람들만이 예술을 한다. - 158

2026. jul.

#지나가기혹은영원히남아있기 #강보원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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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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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책을 구매했었을까?
분명 무슨 계기가 있어 사둔 책일텐데.

서사가 있는 이야기만 죽 읽어대서 잠시 환기하는 기분으로 책장에 있던 책을 골랐다.

육아하는 부모들, 저연령 대상의 선생들이 참고할 만한 책이다.

- 읽기는 관조의 행동이다. 주의를 분산시키는 상황에서는 저항의 행동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를 시간과 더불어 생각하게 한다. - 데이비드 울린

- 나는 읽기의 고유한 본질이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의 지혜가 떠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느낀다. 이례적인, 더욱이 신적이기까지 한 법칙에 의해 그들의 지혜가 끝나는 지점이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지혜가 시작되는 지점처럼 보이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중

- 우리가 소설을 읽는 동안, 타인의 관점을 취해보는 과정과 소설 내용 자체가 공감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도덕 실험실'의 역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는 뇌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식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따라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을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이때 우리는 잠시나마 타인이 되어보는 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를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와 아주 비슷하거나 때로는 너무나 다른 감정과 분투에 지배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런 시뮬레이션을 거치면 우리의 읽기 회로망은 정교해집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생활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 92

- 21세기의 가장 큰 실수를 꼽는다면, 첫 번째는 20세기의 최대 실수를 무시한 것이고, 두 번째는 점점 파편화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비판적인 분석력과 독립적인 판단력을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준 것은 아닌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우리의 핵심적인 능력이 이미 감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 297


2026. jun.

#다시책으로 #매리언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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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돌멩이 -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ㅣ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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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실패담 크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바로 뒤이어 노 피플 존을 읽었다.)
정말 세련되고 정곡을 찌르는 문장으로 글 쓰는 작가가 아닌가. 부럽다.
하나의 단편 속에 실패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자연스러운 블렌딩.
계급이라는 무형의 실체에 대해 곱씹게 만드는, 은근하게 예리한 이야기.

지나친 진심.... 그게 불편해진 세상에 대하여...

- 수진이 죽은 후 재한은 수진을 생각한다는 의식도 없이 종종 그렇게 수진을 떠올렸다. 수진이 했던 말과, 어떤 순간의 표정과 몸짓 같은 것들. 기억하는 줄도 몰랐던 장면들을. 그것은 유미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웠던 누군가가 떠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둘은 이제 알게 되었다. 그 무력함과 슬픔을. 이어서 뒤따르는, 대상이 모호한 분노도. - 위수정, 눈과 돌멩이, 13

- 재한은 고개를 틀어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재한은 창밖으로 보이는 희고 고요한 식물들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소리와 풍경의 불일치가 오히려 재한의 불안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그것은 낙관이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 위수정, 눈과 돌멩이, 21

- 누구나 가족과 연인과, 결국엔 삶과 이별해야 한다. 예외는 없다. 그 모든 일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건들은 일어난다. 나의 이해와 무관하게. 그러므로 나는 내게 일어난 일들을 사후적으로라도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 되새겨보아도 불가해한 일들은 있을 것이다. 불가해한 채로 받아들이는 연습도 필요하겠지. 살아가려면.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그것을 애도라고 불러도 될까? - 위수정, 문학적 자서전, 62

- 원희에게서 조금 떨어진 벤치 주위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남녀 무리가 보였다. 짧은 스커트에 어깨가 드러난 셔츠. 누군가 농담을 던졌는지 무리는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못 견디게 아름다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질투심이 솟아났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나도 저런 때가 있었던가? 저들도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ㅏ 아름다운지 모를까. 무심할까. 원희는 한동안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무지하기를 바랐다. 실수를 반복하고 좌절하기를. 그리고 후회하기를. 내가 그랬던 것처럼. - 위수정, 오후만 있던 일요일, 91

- 해진이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
나는 끔찍한 내용보다 아직도 해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기억하는 해진은 열여섯 살에 멈춰 있을 텐데 사람들은 어떻게 성인이 된 그 애를 알아본 걸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누구하나라도 말을 걸었다면 그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게. 사람들은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고 믿으면서 그 애의 죽음 만은 상상하지 못한다. - 이민진, 겨울의 윤리, 209

- 페이스트리는 뜻밖에 정치적인 빵이다. 겹겹이 쌓인 층과 층 사이, 선처럼 얇은 틈이 숨어 있다. 한 입 베어 물면 버터 향이 입안에 퍼지고, 부스러기는 겹의 바깥으로 바스스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이미 어디에든 속해 있다. - 정이현, 실패담 크루, 253


2026. jun.

#눈과돌멩이 #위수정 #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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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지옥으로 사뿐사뿐 ㅣ 타이피스트 시인선 12
김하늘 지음 / 타이피스트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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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지옥에 함께 해줄거라는 말부터 다정하지 않은지.
결코 다정하기만 하진 않은 세상에서.

시인의 다른 시집도 읽을 마음을 먹었으나
절판된 3권의 중고가는 최저 45000원이었다. 배송비 별도로.. ㅋㅋ
허허허 웃게 되는 허무한 기분이 됨.

취향의 시와 시인을 만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까 이럴 땐 좀 아쉽다.
이 세상의 모든 시인의 책을 출간되자마자 손에 넣을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
업계 관계자도 아니고서야.



- 우리는 활자에 갇힌 망령이어서,
당신이 나를 읽어 준다면 나는 나비가 되지
너의 지옥에 놀러 갈게. - 시인의 말

- 툭하면 죽겠다던 마음에는 갈피갈피 네가 살아서. 코밑으로 기억하는 너의 숨을 영원히 영원히 맡고 싶어. 나는 때때로 젊은 산모처럼 너를 낳았다가 너를 죽였다가. 내가 낳은 네 발등에 키스를 했다가 전전긍긍 나쁜 계획을 세웠다가. 이따금 무기질 상태가 되어 버린 그리움에는 너의 그 물활론적 사려가 남아 있어. 따뜻해. 심지어 따끔해. 이건 내가 써 내려갈 신화여서, 몇백 쌍의 달이 뜨고 지는 동안 놓지 못하는 욕망이 있어. - 이것은 우리의 존재통 중

- 모든 것을
증오의 힘으로 살아 냈다고,
네가 속삭여 줄 때 나는 가장 빛나
아, 내가 사랑하는 불가해한 사람!
오늘도 네 무릎에서 까무룩 잠이 들어
온 세상 인간이 사라지는 꿈을 꾸겠지
사실 난 그게 좋아 - 불발된 이야기들 중

- 오만 생각이 다 떠올라도, 모든 게 미완성인데, 어머! 그런 편이 이별하기에 좋아서, 순탄했던 삶을 야금야금 좀먹으며, 우리는 우울한 포옹을 한다, 진심으로 사랑을 섬겼던 시간들을 기억하기에 - 프러시안블루 중

- 우리는 세상이 낳은 부작용
사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태어났는데
요즘은
흔들리고 위태롭고 야하게 웃는 너를 만나
도대체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
그럼 넌 이렇게 말했지
70분만 기다려 줘 - 70분만 기다려 줘 중

- 나는 제법 낭만에 너그러운 사람이라서,
일부러 연민을 즐긴다
아름다운 불신
그것도 아니면 무슨 재미로 산담 - 발랄한 유언 중

- 말도 안 돼, 라고 생각하지만 쓰지 않을 때의 나는 나의 쓸모를 자주 되물어야 한다. - 편의점에서 구원도 팔았으면 좋겠어 중

2026.

#너의지옥으로사뿐사뿐 #김하늘 #타이피스트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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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공항 ㅣ 타이피스트 시인선 13
이원석 지음 / 타이피스트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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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의 쓸쓸한 정서.

밤이라서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지
쓸쓸하니 밤이었던 것인지... 모호해지는 그런 감각.

- J에게
벚꽃이 지는 거리를 차로 달리며
꽃 봐 저기 저기
햇빛에 모가지가 떨어지는 죽음을 뿌리치며
꽃 좀 봐
나는 안타까워서 여러 번 소리쳤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팠는지 마음이 부서졌는지
그렇게 아파서 스러지고야 마는지
뒷좌석에서 힘없이 눈을 감고 기울어져 있던 네가
잠시 고개를 들어 꽃을 보아 줄 때
얼마나 안심했는지
얼마나 두려웠는지
내 모가지를 꺾어 너에게 달아 주고 싶던
봄 - 시인의 말

- 걷는다는 것은 삶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시간을 두 다리로 천천히
되밟는 것이다 - 순찰 기록 중

- 물에 가라앉는 것이 필요해
손에 쥘 수 있는 마음 같은 것
쇠로 만든 막대 같은 것
두드리면 울리고 손에서 놓으면 가라앉는 것
내려다보면 일렁이는 바다
바닥을 바라고 가라앉기 위해
파도를 버리고 내려가는 위안 - 쇠막대의 규격 중

- 손님이 모두 떠나고
먼 자리부터 불이 꺼지고
하나 남은 배려마저 캄캄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일어난다 비가 오는
아무것도 없는 돌무더기 위에 서서
바닥돌 하나를 골라
반듯하게 놓아 본다 쇠락한 공항을 세우기엔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 - 기초공사 중

- 모든 불행은 나의 가족이다
커다랗고 못생긴 마음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기울어서 바닥에 모두 쏟아져 버린다 해도
주워 담을 사람이 없어 이리저리 쓸려 다녀도 - night shift - 야간 근무 중

- 이 밤의 주요 고민이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을 받으며 나아가기엔 지나치게 길고
부질없는 마음을 바둥대기에는 너무 짧다 - night bus 심야 버스 중

- 희망이고 전망이고 개나 주라지
난 절망을 겨우 비껴 난
허망에 자리 잡았어
단순하고 자족적인 삶을 꿈꾸며
복잡하고 소모적인 세상에서
죽음을 집어삼키는 게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린 다 알고 사랑하는 거야 - 나, 맥도날드 맨 중

- 고장 나기 직전까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사람과
고장 나기 직전인 나를 붙들고
놓지 않아 준 사람
감사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 날에는
아무에게도 감사하지 않았다 - 업무 외 일지 중

- 이 시는 인천의 민족, 민주, 노동 열사를 추모하는 <인천 투데이> 신문기사의 발췌, 편집만으로 작성되었다.
추모제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시 낭독을 잘 들었다는 한 노동자 시인이 술잔을 놓고 내게 말했다. "아람전기는요?" 그는 젊은 시절 아람 전기에서 노동운동을 하며 갖은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그가 잠시 후 다시 말했다. "아람전기는요?" 나는 시를 고치겠다고 약속했다. - 우리들의 리스트 중 각주

- 밤이 되면 사위가 잠잠해지고
우린 바로 옆도 지켜 주지 못할 만큼 외로워져요
내려다보면 멀리 무관하게 빛나는 불빛들
사람이 작아지고 희망도 절망도 작게 보여요
다 사라지고 나면 내가 보여요 - 드리운 이야기 - 한국 옵티칼하이테크 470일 고공농성에 부쳐 중

- 해적왕이 될 거야
누군가에게 물들었다고 생각하는 너를 뒤로한 채
나는 대장장이였지
대장이 되고 싶진 않았지
두드리고 두드려서 치밀해지는 쇠를
치밀하다 못해 집요해지고
집요하다 못해 지나치게 되는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꺼지고
더 차가울수록 단단해지는 쇠를 만지고 싶었지
빛이 날 때까지 물을 뿌리고
숫돌에 문지르면서
너와 나는 격이 없어 - 누구에게나 각자의 이야기 중

- 그리서 자주 잊어요
멀리서도 듣지 못하는 다정한 말이
갚을 수 없는 불행이
저녁 모퉁이마다 마주쳐
당신의 얼굴에 묻은 불행을 보고
내 얼굴을 문지릅니다
몇 번씩 확인을 하고도 믿기지 않는 죄목을
어찌 세세히 기억하겠습니까
죽거나 죽겠거나 죽을 거거나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 휴양지 중

- 문장과 문장 사이의 대단한 반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거부할 수 없는 진실, 그걸 마주했을 때 인간은 마음이 흔들린다.
시란 그런 것이 아닐까. - 럼주 상자 중

2026. may.

#밤의공항 #이원석
#타이피스트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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