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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넷플릭스 <그레이스> 1화를 보다가 이건 책 부터 읽고 봐야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읽었다.
어떤 책이든 캐릭터를 머릿속에서 그려내는데 약간의 수고와 시간이 들어가는 걸 감안해보면, 1화를 보고 시작한 건 매우 도움이 되는 과정이었다.
읽으면서 진짜 여주인공 캐스팅은 정말 잘했구나 싶다는 생각 무한 반복.
반면 조던 박사를 드라마에선 어떻게 그려나갈지 모르겠으나, 약간 사기성짙은 캐스팅이 아닐까한다. 아무래도 주요 화자의 매력을 어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살인마 그레이스의 잊혀진, 잊은, 잊은척하는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서사는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결국 내가 마주한 것은 진실도, 실체도 아닌 어떤 체념(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여성들의 삶의 지난함)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레이스에게 어른스럽게 굴었지만 결국 17살도 안된 소녀였던 메리가 불법적이고 비위생적이며 과연 제대로 행해졌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던 낙태시술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 그레이스에게 가장 큰 불행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믿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의 상실이 어떤 거대한 전환점일 수는 있겠지만,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그레이스라는 하층민 여성이 끝끝내 어떤 행복의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그런게 있었을까 하는 의문.
사실에 기반한 어떤 인물로 이야기를 그려낸 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지점이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그레이스의 기억의 소환을 매우 다채롭게 그려냈다. 역시 애트우드라는 생각이 들게...
단 한명의 유의미한 남성 캐릭터가 없었다는 점 역시 애트우드 답다 라는 생각.
묵직한 이야기다. 매우 추천. 이제 드라마를 정주행해야겠다.
나는 빛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빛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다...... - 유진 마레, <흰개미의 정신>
메리는 소수의 몇 사람은 가진 게 너무 많고 나머지는 가진게 너무 없는게 신의 섭리일 리 없다며 씩씩거렸어요.(...) 그러면서 기회만 보이면 숲으로 달아나 활과 화살을 들고 돌아다닐 거라고, 그러면 머리를 묶거나 코르셋을 입을 필요도 없을 거라고 했어요. 저에게 같이 가자고도 했고요. - 225
제가 실수를 해서 그걸로 걱정하면 메리가 위로해 주면서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실수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수 없는 법이라고 했어요. 제가 허니 부인한테 모진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면 식초 한 병을 마시고 혀로 내뱉는 여자라 늘 그런 식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고요. 그러면서 우리는 노예가 아니고, 하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앞으로 계속 하녀로 살지도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했어요. 이건 일종의 직업에 불과하다면서요. (...)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고, 이 땅의 사람들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느냐에 따라 출세를 하는데, 원래 그래야 하는 법이라고도 했죠. - 235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경고의 의미라는 것을요. 선생님이 침대를 평화로운 곳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건 침대가 휴식과 편안함과 단잠의 상징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침대에서 위험한 일들이 아주 많이 벌어지거든요. 침대는 우리가 태어나는 곳이니 우리가 인생 최초의 위기감을 맛보는 곳이죠.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곳이니 종종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선생님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남녀 간의 행위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죠. 선생님도 무얼 말하는지 아시겠지만,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하고, 누구는 절망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참아야 할 모욕일 뿐이라고 하죠. - 240
어떤 사람들은 이걸 이브의 저주라고도 부르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이브에게 주어진 진짜 저주는 무슨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녀 탓으로 돌렸던 바보 같은 아담을 참고 견뎌야 했던 거라고 말했어요. - 245
나는 그를 쳐다본다. 그는 조그만 하얀색 네모가 그려진 노란 넥타이를 하고 있는데, 농담을 하는 게 아니다. 정말 모르는 거다. 그와 처지가 비슷한 나자들은 자기가 어지럽힌 것을 치우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지럽힌 것뿐 아니라 그들이 어지럽힌 것까지 치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앞날을 걱정하거나 저지른 일의 결과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렇게 길러졌을 뿐이다. - 316
한 무리에 수탉이 한 마리 있으면 암탉들이 행복해진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한 마리도 많아요. - 322
불완전한 것이 우리의 낙원이다. - 윌리스 스티븐스, <우리 풍토의 시>
2017. d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