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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수많은 단절과 머뭇거림이 스며들어, 잔잔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나에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잡았는지, 못본 채 했는지, 기겁을 하고 도망쳤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종수의 실패담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가 대체 뭔지 정말 모르겠다가도, 어떤 장면을 마주하면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가만히 있는 기쿠 박사님을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기쿠 박사님이 내게 말했다.
“종수, 인생은 길러, 정말이지 길어.”
나는 그게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 25
나를 대학원에서 ‘내쫓아낸’ 기쿠 박사님을 더이상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일은 여전히 내게 복잡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일 뿐이다.” - 27
그릭 문득,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아 류가 떠올랐다. 그는 앞으로도 내 집 문을 두드릴까? 그가 그 문을 계속 두드린다 하더라도 이제 거기엔 내가 ‘없다’. 이제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내가 머무는 곳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이제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81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한 글을 끊임없이 읽어댔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나 자신을 떨어뜨려놓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내게 닥친 문제들에 너무 무심하지도, 혹은 너무 애쓰지도 않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마치 공중에 걸린 줄 한가운데에 언제까지고 균형을 잡으며 서 있을 수 있다고, 그런 착각 속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면서. - 92
지아 류 말이에요. 있잖아요, 그 친구는 내가 학교에 안 나간 후부터 내 집 문을 두드렸어요. 노크 말이에요. 누군가 내 집 문을 노크해줬죠. 섀넌, 나는 그걸 계속 비웃었지만, 이제는 비웃는걸 그만해야 할까봐요. 섀넌, 이 세상의 누군가는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 그냥 잘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돼요. 그냥 당신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 270
물론 나는 자주 실패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을 때가 있다. 망원경이 고장났을까봐, 내가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그들 표정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어쩌면 소설가로 살아가는 내내 그런 걱정에 휩싸여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행복한 삶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저 나는 소박한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내가 ‘매우’ ‘멀리’ 존재하는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게 되기를. - 작가의 말 중.
2017. 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