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시인선 38
오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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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들이, 이 시들이 뭐라고...
푹푹 꼿혀. 울적하고 절절하게.
두고두고 읽고 싶다.

- 어떤 날에는 손바닥에 그려진 실금들 중 하나를 골라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동요하고 싶었다. 가장 가벼운 낱말들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 반대도 상관없었다. 낱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싶었다. 어떤 날에는 알록달록한 낱말들로 무채색의 시를 쓰는 꿈을 꿨다.
그림자처럼 평면 위에서 입체적으로 움직이고 싶었다. 한동안 내가 몰두한 건 이런 것들이었다. 입벌리는 일을 조금 줄이고, 귀 기울이는 일을 조금 늘렸다. 귀를 벌리면 나비떼, 입을 기울이면 나이테. 터지고 있었다. 아무것이, 아무 것도, 아무 것이다.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동요하는 어떤 낱말이. 그러고도 한번 더 동요하는 어떤 마음이.
돌아오는 길에는,
으레 영혼을 삶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답다. - 2013년 봄의 어떤 날 시인의 말.

- 어떤 느낌들이 있다. 문밖으로 나가는 누군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살면서 그 사람과 한 차례는 더 마주칠 것 같다는 느낌. 단어들은 그렇게 내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기다리고 품고 헤어지고 또 한 시절을 헤매다가 처음인 양 다시 스칠 것이다. 모든 시집은 단어들의 임시 거처다. - 9

- 네 이름 속에는 엄청난 진실과 그 엄청난 진실이 알고보면 거짓이라는 명제가 모두 담겨 있다 - 커버스토리 중

- 어떤 명제는 계절이 바뀌면 효력을 잃는다
그리고 어떤 계절에는 이 명제가 거짓이어야 한다
따사롭다는 말은 꼭 필요할 때만 써야 한다
익살은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부리려 애써야 한다
영원이나 죽음처럼
언어의 밀도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내가 들어가 여백을 최대한 넓혀놔야 한다
내가 들어갈 관은 내가 짜야 한다 - 부조리, 명제에 담긴 취향 중

-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 오릅니다
어제의 밤이, 그제의 욕심이, 그그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 1년 중

- 온탕의 물이 넘쳐흘렀지만 우리 중 누구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여분입니다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 엑스트라 중

2020.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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