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도둑맞은 가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1
박완서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으로 파괴된 가족.
오죽하면 전쟁 전에 죽어버린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충분히 이해될 지경. 바스라진 내면을 제대로 하소연 할 곳 없이 생존을 위해 정신을 다잡은 딸이라는 무게가 제대로 느껴진다.

시대를 통찰할 뿐 아니라 인생역시 통찰하는 작가.
전율이 오는 대목들에서 멈칫거리는 생각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시련의 시대에는 깊은 내상을 입는 사람이 여성이기가 얼마나 쉬운지.

아닌 척, 모른 척 한다 한들. 사실이 그렇다.

- 가슴 밑 명치께가 요사이 늘 그렇듯이 체중 비슷한 거북함으로 보깨기 시작했다. 나는 엎드린 채 그 밑에 베개를 괴고 지그시 눌렀다. 난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사랑하고픈 마음이 얼마나 세차게 꿈틀대고 있는지를. 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덩달아, 누구를, 무엇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 16

- 엄마, 우린 아직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건 변화하게 마련 아녜요. 우리도 최소한 살아 있다는 증거로라도 무슨 변화가 좀 있어얄게 아녜요?
왜? 이대로도 우린 살아 있는데.
변화는 생기를 줘요, 엄마. 난 생기에 굶주리고 있어요. 엄마가 밥을 만두로 바꿔만 줬더라도...... 그건 엄마가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잖아요. 그런 쉽고 작은 일이 딸에게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걸 엄만 왜 몰라요?
어머니의 부연 시선이 아무런 뜻도 지니지 않은 채 나를 보는지 내 어깨너머로 윗목의 장롱을 보는지 초점없이 한군데 머물러 있었다. 나는 이내 그녀가 다만 나에게 잡힌 그녀의 치맛자락을 놔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또한 내 바람이 완강하게 거부당하고 있음도, 그 거부 앞에 내가 얼마나 무력한가도 알아차렸다. 나는 치맛자락을 놓으면서 맥없이 지껄였다.
줄창 그러자는게 아니에요. 네, 엄마, 때때로, 아주 때때로 만이라도...... - 98

- 나는 늘 두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한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그 생각조차 바뀌어갔다. 정말로 억울한 것은 죽은 그들이 아니라 그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나일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 나이에,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가장 반짝거리고 향기로운 시기에 그런 것을, 그 끔찍한 것을 보았다니, 그리고 그것을 소리도 없이 삼켜야 했다니! 정말이지 정말이지 억울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삼킴 죽음을 토해 내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낯선 길모퉁이 초상집에서 들리는 곡성에도 황홀해져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래 서성대기가 일쑤였다. 저들은 목이 쉬도록 곡을 함으로써, 엄살을 떪으로써, 그들이 겪은 죽음으로부터 놓여나리라. 나에겐 곡성이 마치 자유의 노래였다. - 324, 부처님 근처 중

- 나는 그것들을 다시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내 가난을, 내 가난의 의미를 무슨 수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의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아흔아홉냥 가진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 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쳐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나는 쓰레기더미에 쓰레기를 더하듯이 내 방 속에, 무의미한 황폐의 한가운데 몸을 던지고 뼈가 저린 추위에 온몸을 내맡겼다. - 442, 도둑맞은 가난 중


2020. Ma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