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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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사건을 향해 달려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챙겨 걸어나가는 이야기다.
내가 아는 시간과 공간, 사건과 상징되는 인물들이 등장해서 오히려 영화를 보지 않고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텐데 하는 두려움이, 익숙한 시공간을 통해 다른 이야기들과는 또 다른 긴장감을 준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봐 내내 조마조마 했지만, 감독은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예상가능한 개인의 불행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던게 아닐까 하는 이해와 믿음이 생긴다.

영지 선생님과 진단서가 필요하냐 물어봐주는 어른들이 있어 더욱 안도했다.

주변의 여러 사람이 언급했던 재밌는 부분은, 천운으로 사고를 피한 수희를 보고 대훈이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인데, 주위의 언급은 #니가거기서왜울어 였다.


- 왜 이것은 기억하고, 저것은 기억하지 않는가. 왜 그 과거의 작은 디테일들을 한 주 내내, 한달 내내, 그보다 더 오래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시 어둠과 백지상태로 가는가 - 도리스 레싱

- 벌새를 만드는 과정은 집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 비로소 집을 찾게 되는 과정이었다. 나는 모든 것이 치유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용서하게 됐다고, 용서를 구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이 과정 속에서 인간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때로 잔혹하고, 서늘하고, 아프고, 그리고 치유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이었다. - 10, 작가의 말

- 선생님,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 192

-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안다. 고통은 파도처럼 마음에 들이쳤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쉼 없이 마음으로 들어와서 자국을 내고, 다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다가도 돌아온다. 나의 잘못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노력했는데도, 잘 해 보려고 했는데도 겪어야 하는 상처들이 있다. 어른이 된 나는 상처받으면서도 내가 나대로 살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게는 어느 정도의 힘이 있고, 내 힘으로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낸다면 누군가는 나를 도와주리라는 믿음도 있다. 그러나 은희 시절의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상처는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고, 내가 누구에게도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느껴졌으며, 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곧 나 자신의 가치로 여겨져서 작은 일들에도 쉽게 다쳤다. 그건 사소한 일들이 아니었다. (...) 한국 사회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처는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가. 사람으로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겠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최대한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나.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는 가해자에게 언제나 얼마간의 정당성을 주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거야. 정말 그런가.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사랑은 상처가 상처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을 상처 속에 매몰되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두지 않는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과하여 사랑 받아 성장했다. 함부로 대우 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 그때의 은희들에게, 최은영

2019. o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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