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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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존재, 인간, 자연, 존엄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정보의 양이 많은 이야기라 문득 취재기를 읽는 느낌도 있었지만, 다른 종에 대한 이해와 진이의 심리를 알기 위한 타당한 분량 같기도 하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단스러운 일도, 대수롭지 않은 일도 아니라는 두가지 측면의 사고를 유연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좋았다. 혼란의 시기를 지나 가차없는 선택을 내리는 모습은 장엄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 또한 ‘결단’이라고 까지 추켜세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 하다.

어쨌든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사랑의 실천’이라고 까지는 느껴지지 않았고,
당연한 ‘죄책감’, ‘부채의식’, ‘겸허함’이라는 단어로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끌어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정유정 스타일의 매력은 조금 덜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 종종 소리가 멈출 때도 있었다. 눈을 떠보면 그녀는 입술을 꽉물고 자기 앞에 놓인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선 휴대전화 반사광이 안개처럼 어룽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그녀의 목 밑이 구멍처럼 패였다가 불거지곤 했다. 그때마다 낮고 긴 숨소리가 입김처럼 밀려와 내 귀에 닿았다. 누군가 그 숨소리에 이름을 붙이라고 한다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두려움’이라 부르겠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었으나 완벽하게 혼자였다. - 326

- 나는 목의 통증을 잠깐 잊었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지니를 밀림 밖으로 끌어내고, 바다를 건너 지구 반대편까지 배달시키고, 인간이 하는 지슬 제대로 흉내내지 못한다 하여 지적하는 막대기로 교육시키는 사피엔스라는 문명인이. 그 중 가장 몰염치하고 가장 지능적인 약탈자는 바로 나였다. 지니의 몸을 무단 점령하고 정신마저 빼앗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내 처지만 돌아보느라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으나 의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한 일이었다. - 336

-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 367

2019.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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