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호흡과 산문의 호흡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시를 쓰는 나에 대한 깊은 사유가 곳곳에서 느껴지고, 그래서 시어 인듯한 산문이 조용하고 가만하게 다가온다.천천히 길을 걷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느낌으로.-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 10- 잘할 것 같은 자신감이 아니라 잘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든함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하고 싶은대로 했고 다행히 엉망이 되지 않았다. - 21- 내가 처음 시를 썼던 1990년대에는 속임수임이 분명한 희망들이 노골적으로 도처에 전시되어 있었다. 절망은 꼭꼭 숨어 복병처럼 안 보였다. 시가 안 보이는 것을 노래해야 하니까, 그 시절 시인들은 당차게 절망을 노래했다. 이제는 절망이 노골적으로 도처에 전시된 시대를 살고 있다. 가장 안보이는 것은 희망이다. 그러나 시가 안 보이는 걸 노래해야 해서, 안보이는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 같다. 그러나 멍청한 시인의 멍청한 시를 나는 은밀히 기다린다. 사람을 둘러싼 풍경 중에서 가장 희망에 가까운 풍경을 가장 멍청하고 가장 오롯하게 제시하는 시를 나는 기다린다. - 27- 썼던 문장이 내 귀로 되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자문하고, 했던 말이 나를 지우고 있다는 것을 자백하고, 종내는 말을 포기할 때를 기다린다. 말의 무력함과 말의 무용함과 말의 허구성과 말의 폭력성에 대하여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버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해 이상한 발명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 45-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 2522019. jan.